필경사 바틀비 주해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

문무대왕 2025. 5. 27. 11:25

 13.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

 

 가이 팍스 데이 유래

 

종교혁명 당시 영국은 당시 제임스 1세 왕이 영국 성공회의 수장으로 올라서고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로마 교회는 이에 저항하였다.  반란 음모자들은 영국 의회 의사당 건물 지하실을 임대하고서는 거기에 화약고를 몰래 설치해 놓고 있다가 왕이 참석하는 1605 11 5일 의회 개회식에 맞춰 폭약을 터트려 국왕과 정부 요인들을 일시에 암살할 음모를 꾸몄으나, 거사일 직전에 발각이 되어 미수에 그쳤던 정치적 종교적 반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통상의사당 폭파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라고 부른다.  이 반란 음모 발각 사건을 주요 가담자의 이름을 따서가이 팍스음모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가이 팍스 사건에서 의사당 폭파 임무를 실행하는 주요 인물은 스페인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던 가이 팍스(Guy Fawkes 1570-1606)이었지만, 반란을 기도한 실제 주요 인물들은 로마 카톨릭 예수회 신부들과 이들과 연계된 귀족 계급들이었다.  반란 음모의 핵심자급이었던 캣츠비(Catesby)는 귀족출신으로 왕과 함께 사냥을 할 정도로 고위급에 속했다.  주요 실행 요원으로 잉글비(Ingleby)는 귀족의 친척이었고, 딕비(Digby)는 기사계급에 속했다.

 

당시 대법원장 코크의 심문으로 이루어진 재판 내용 (처음에 체포된 음모가담자가 묵비권을 행사하자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갖은 고문을 자행했고, 딕비는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으며, 음모 주동자들의 목이 효수되었다)이 널리 알려졌다.  화약 폭파 실행조 중에서 누군가가 거사일 열흘 전에 지배층 귀족에게 거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몸을 보존(preservation)하기 위해서는 의회 행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귀뜸해 준 익명의 편지 (“몬티글(Monteagle) 편지”)로 인해서 폭파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음모에 가담한 일부 귀족들은 혐의가 밝혀졌어도 사형을 면하거나 벌금형 등에 그쳤다.  종교 개혁 당시 탄압당하자 반란을 기도한 로마 카톨릭 예수회 신부들의 수도원 도피 그리고 수도원에서 시중들던 요리사의 제보로 인해서 이들 음모자들이 체포되었다.

 

영국 정부에선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전에 발각하여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Thanksgiving Act 1605” 법률로써 매년 11 5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이 사건에 대해 영국 의회는 현재까지도 역사성을 잘 간직해 오고 있다.[1]민간에선 기이한 복장을 한 가이 팍스의 허수아비를 끌고 다니다 밤이 되면 불태우는 화형식의 풍습이 생겼다.  이런 풍습은 식민지 미국에도 전해졌고, 영국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식민지 국가들에서 오늘날까지 불꽃놀이 풍습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1843년 영국에서 지방정부 조례로 화형식을 금지시키기도 했는데 당시 영국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1850년에는 카톨릭 대주교의 화형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가이 팍스 데이는 가이 팍스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반란 음모를 꾸민 로마 카톨릭을 경계하고자 하는 반면교사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쉽게 읽을 수가 있다.  로마 카톨릭이 탄압을 받자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이런 반란 음모가 사전에 분쇄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 카톨릭 신도들은 반란음모자의 배후세력으로 낙인찍혀서, 한동안 변호사도 될 수 없었고, 군대도 지원할 수 없었고, 선거권도 박탈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새길만하다. 

 

인간의 일에는 우연이 작용하고,또 제 아무리 확실한 예측을 할 수 있고 선한 의도나 대의명분을 갖고 일을 추진실행한다고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거나 의도하지 않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패착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성과 신성 모독의 경계-의도와 결과-외양과 속뜻

 

투키디데스의역사에서 말하듯이, 인류의 역사상 전쟁과 음모는 끊임없는 인간 본성에 속하고 따라서 음모자보다 미리 발각하여 음모를 사전 분쇄한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는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가이 팍스 데이는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거사일 이전에 사전 발각되어 음모자들은 처형된 사건인데, 왜 미수에 그친 음모 사건을 기념하는 것일까?  영국의회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음모를 사전에 발각할 수 있었고, 그것에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이 사건을 거국적으로 기념하는 “Thanksgiving Act”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영미인들은 선한 것뿐만 아니라 악한 것도 그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악을 본받자고 나쁜 사건을 떠올리는 행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선악개오사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선은 선대로 좋고, 악은 반대로 어떤 의미를 주기 때문에 사전에 조심하고, 사전에 미리 손을 써서 방지를 하는 것이 보다 낫다는 교훈을 얻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미(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할로-(hallow-ween)” hallow신성시하다”, ween의도하다는 뜻이 결합된 단어다.  신성해야 할 할로윈 축제에 왜죽음의 귀신과 해골 등이 등장하는 것일까?  우리 사람들은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존재다. (창세기 3:19).  우리 사람들은 죽으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All go to the same place; all come from dust, and to dust all return.” (전도서 3:20.)

 

계절이 바뀌는 11월에 벌이는할로윈(Halloween)” 축제의 기원도 비슷하다.  할로윈 축제 때 무서운 마녀(witches), 뱀파이어(vampires) 귀신(ghosts)등의 기괴한 복장으로 분장한 아이들이 집집이 돌며 “Trick-or-Treat” 무서운 해골 분장으로 협박하는 것은 모금을 목적으로 속임수 trick 쓰는 것이다) 하는 것은 의도하는 목적과 외양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Guy라는 단어는 가이팍스 데이 기념일이 생긴 이후 등장한 기이한 옷차림의 남자를 지칭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적인 남자를 지칭하거나, 친구나 동료를 지칭하는 보통명사화되었다. 

 

가이 팍스 데이 때 어린아이들이 집집마다 돌면서 모금할 때, 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동전 한 푼 적선해 주세요 (penny for the guy!) 라고 적선을 부탁하면, 이에 대해 어른들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면서 동전 한 푼 선뜻 내놓는 사람이 있을 테고, 또는 동냥할 때 옷이라도 좀 단정히 차려 입고 구걸하지! 뭐 이런 괴이한 차림을 한 놈에게 뭐 적선을 하라고?(A penny for the guy?)라며 달리 대응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불꽃놀이 화약을 사는데 필요한 동전을 구할 의도를 가지고서 어른들에게 귀신 가면을 쓰고 협박(장난치는 것)을 하는 속임수에 해당한다. 그런 복장은 참새를 쫓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허름한 차림새를 갖추고 있는 허수아비와도 같다.  복장에 대해서 어른들과 아이들의 시선과 마음은 분명히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는 속임수가 필요하기도 한데, 모금자는 모금을 달성하기 위해서 협박과 애원 사이에서 밧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음양의 이치처럼, 질서와 무질서의 이항적 대립관계가 있고, 양면의 칼날처럼두 가지 대립되는 속성이 함께 포함되어 있고 또 변증법적 통합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 

 

 

왜 가면을 쓰는가? 

 

가면을 쓰는 것은 성경 시대 때부터 존재했고 가면을 쓴 자를 위선자라고 비난해 왔다.  가면을 쓰는 이유는 본심을 속이기 위해서였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데모할 때는밴대나 수건을 쓰거나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의 시위대가 익명의가이 팍스가면을 쓰면서가두 시위를 벌인 것처럼, 바틀비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말해주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원이 밝혀졌을 때의 역풍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사건 주모자가 당국의 취조 심문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있거나 또는 최소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가면을 쓰는 또 다른 이유 하나를 보자.  가면을 쓰는 안동 화회탈춤 놀이를 상기해 보라.  탈춤놀이에는 적나라한 사회 고발과 사람들의 권력 본능을 질타하는 숨어 있는 전달 메시지가 들어 있다.  일본의 전통가극 가부키(歌舞伎)나 노()에서 가면을 쓴다.  진정한 의도는 복장이 아니라 숨어 있는 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은 옷이 날개라고 하여 화려한 치장이나 얼굴이 어떻게 생긴 누구인지에대해 온통 시선을 빼앗길지 모른다.  따라서 말하고자 하는 화자의 진정한 의도가 잘 전달되기 위해서도 가면을 쓰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는 때로는 숨어 있는 경우가 많고, 만약 발각되면 생명의 위협이나 어떤 피해를 입을 두려움이 있는 경우 그런 사회적 구조니 관계에서는 의도와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만유인력이나 중력의 법칙처럼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발견할 때까지 숨어 있는 경우도 많다.  보이지 않는 손(the invisible hand)”이 작용하는 우주질서와 인간 사회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는 수단은 밖으로 드러난 공식적으로 작성한 문건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속에 흐르는 내막을 들쳐 보면 진실은 외부로 들어난 외양과는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가이 팍스 가면은 창백한 얼굴에 검은먹 같은 콧수염이 달린 피에로 같은 모습인데 사실 가이 팍스는 피에로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거대한 음모를 실행하는 하나의 부품에 불과한 위치이었다.  영국에서 최고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이 의회 개원일[2]에 맞추어서 국가 주요 인물들을 살해할 반란 음모를 꾸몄고, 가이 팍스는 돈을 받고 그 음모를 대신 실행한 행동책에 지나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란 기도 사건에는 배후 세력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또 그런 음모가 발각되고 나서 배후 세력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살벌한 검거 색출 역풍이 부는 경우가 많았다.  반란은 혼자 실행하기 힘든 속성을 가졌기에 반란이 일어나면 그것은 한 개인의 일탈 행동으로 치부하기어려웠다.  따라서 반란 주동자나 반란 의도를 끝까지 찾아 내고자 고문까지도 서슴없이 자행했던 것이 지배권력의 속성이었다.  역사를 통해 보면 권력 세계에는 원초적 인간 본성이 결부되어 있고, 또 그것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모와 배신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러한 권력과 탐욕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속내겉보기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겉모양새로는 속마음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본문화의 특징의 하나로써 혼네다테마에의 개념이 잘 알려져 있다.

 

바틀비 스토리에서 직원들이 하는 일을 군대의 분대 공격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는데 플래툰(platoon)’은 돌을 던지며 싸웠던 인간의 원시 사회의 돌싸움에서 어원이 유래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싸움과 파괴는 피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싸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공룡의 멸망 역사가 시사하듯이 인간은 역사상 외부로부터 공격에 의해서 멸망하는 것보다는 내부의 분란에 의해서 자멸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 중요한 교훈일 것 같다.  생존투쟁의 본질과도 같이 우리 인류의 생존문제는 적군의 공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는 진짜 적(The enemy within)에 달려 있다면, 나를 파멸시키는 나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 내는 것이 승리의 출발점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은,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는 것, “누가 너의 적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라.”

 

 

 

 

실업 문제의 해결-마리우스 개혁

 

 

마리우스(Gaius Marius) 당시의 로마군은 징병제로써 군인으로 복무하려면 토지 보유 조건 등 일정한 자격 요건을 필요로 하였다.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일정한 자산이 없는 무산계급 (당시 인구조사 시 5단계 구분에서 최하층을 차지한)을 프롤레타리아라로 불렀는데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군인 징집 대상에서 면제되었다.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전리품을 챙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들 무산계층은 영원히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평민층의 지지를 받은 마리우스는 로마에 정복된 외국인이나 최하층 빈민 계층에게도 군인으로 복무할 수 있게 하여 군인 충원을 지원병제로 바꾸는 군대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징병제 대신 지원제로 바꾸는 군대개혁이 단행되자 그간 도시로 몰려든 다수의 빈민들이 군인으로 대거 지원하였고 이에 로마 정권은 잦은 전쟁으로 절대적으로 부족한 군인을 충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빈민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으로 도시의 가난한 빈민들이 군대 충원으로 흡수되었고 이들은 의무 복무가 아니라 일정한 봉급을 받는 직업군인으로써 복무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군단의 조직 구조를 대대(코호르스) 편제로 바꾼 전법 개혁 그리고 군인의 이동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식기와 모포 등 먹고 자는데 필요한 필수품을 자신의 등에 직접 둘레 매게 한 전술의 개혁이었다.  마리우스 군대개혁 이전까지는 군인의 전투야영 물품은 별도의 마차에 실어서 보병의 이동에 뒤따라가는 마차 부대가 조달하는 형태이었는데 이러한 구조로는 군대의 이동이 느릴 수 밖에 없었다.  전투의 승리는 속도가 결정한다는 원칙은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쉽게 입증된다. 오늘날 야전 군인의 기본인 식기와 모포와 전투식량을 더블백(배낭)에 넣고 직접 매고 행군하는 것도 바로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에서 연유한 것이다. 

 

대대 구조는 3개의 중대(마니풀루스)로 이루어진 부대였는데 이는 오늘날 군대 조직 편제의 기본으로 자리잡은 초기 형태이다. 마리우스는 이전의 군단 조직이었던 웰리테스와 3개의 전열(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구분을 폐지하고 대신 모든 군단병에게 똑같은 무기와 장비를 지급했다.  이전의 벨리테스와 3개 전열 구조는 병사들의 재산과 경험에 따라 구분 배치되었으나 마리우스의 개혁에 따라 군단병들이 전투대열을 만들 때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았다. 

 

이러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 군대는 더욱 유연하고 빠르고 강력해진 군대로 거듭나고 성장 발전하였다.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은 성공적이었고 마리우스 개인적으로도 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6번이나 집정관(consul)에 선출되는 등 정치적 성공을 이루었다.  그런 그가 국민의 나이 들어서 이미 은퇴한 마당에 자기의 정치적 적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영광스런 과거의 힘을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것으로 어리석게도 순진하게 믿고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가 정계에 복귀하여 지배층(원로원)이 지원하고 또 법적으로도 정식 군사지휘관인 술라(그는 젊었을 때 마리우스의 참모로써 마리우스의 부하로 근무하였다)를 지휘관에서 물러나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만약 마리우스가 민중의 지지를 업고서 군사령관을 물러나게 하는 법이 통과되면 그 최고군사령관이 순순히 응할 것으로 판단했었다면 그건 (술라 같은 군인과 지배계층의 권력 의지에 대한)인간 본성을 잘못 파악한 것-너무 순진했다 (“innocent and transformed Marius”). 

 

한 도시가 전쟁으로 폐허가 될 때 그건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다.  전쟁 고아가 생기는 것도 그 고아는 아무런 죄가 없이 그저 당한 것이다.  가난 또한 마찬가지다.  근대 국가 발전으로 가난의 문제를 국가 개입으로 해결해 낸 영미국의 빈민구제법의 기본적 이념은 동양적인 가난은 나라도 어찌할 수 없다며 개인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때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던 마리우스가 헐벗고 굶주리게 된 바로 그 철저하게 변모한(transformed)’ 모습의 사례처럼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즉 개인은 자기 책임이 없는 곳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죄 없는(innocent)’ 개인의 존재를 수긍한 발전적 전환에 있었다. 

 

이런 확률적 무작위성의 개념은 보험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맨 처음 보험의 발전 영역을 이끌었던 해상 보험에서 조난사고는 선장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일어나기도 하며, 태풍이 불거나 쓰나미가 밀려온 현대의 자동차 사고 경우처럼 전적으로 운전자 개인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경우도 흔하다.  산업혁명과 보험의 발전으로 흉년 기근이 들어도 사람을 죽여서 제사를 올렸던 미신이 지배하던 구시대에서 통하던 천벌 개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현재 헐벗고 굶주린 마리우스가 자기의지로 그렇게 됐겠는가?  그게 아니라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서 내전이 일어난 결과 타의에 의해서 그런 신세와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폐허처럼 변모한 모습에 책임 없는”, “죄 없이 당한”, “순진해서 당한마리우스 이렇게 순진해서 당했다는 해석은 당시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전쟁을 피하려면 모든 무기를 로마에게 넘길 것을 최후 통첩하였는데 카르타고는 정말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에 따라 로마의 조건대로 수많은 무기를 자발적으로 모두 로마에 넘겨 주었으나 로마는 이제 무기 없는 카르타고를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고 온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로마에서 군대 실권자 술라를 해임하려던 법이 통과되자 군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술라는 자기 휘하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로 쳐들어왔다.  당시 술라의 군대는 아직 이탈리아 본토를 떠나지도 않았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실권자는 술라이었으며 그는 지배계층인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또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리우스의 정세 판단 미숙 또는 개인적인 욕심에 의존한 노욕의 결과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 로마의 길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리우스의 술라 축출 시도는 내전에서 군대와 지배계층의 지지를 받은 술라의 반발을 사 내전이 일어났고, 마리우스는 로마를 도망쳐 빠져 나와 시칠리아 섬으로 거기서 다시 아프리카 카르타고까지 힘겨운 망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망명길의 마리우스는 한 때 승승장구한 장군의 처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심한 고난을 겪게 되었다.  마리우스는 폐허가 된 카르타고에서 자기의 쇠락한 신세를 되새기게 된다. 

 

한편 마리우스의 개혁 조치 단행의 결과 당초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전의 자기 토지를 가진 사람만이 의무복무 시민징병제하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단에 편입되고 출정하였다.  하지만 직업 군인이 된 도시 빈민 출신 병사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공익 개념-이 무뎠다.  직업군인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자신의 직속 지휘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장군과 그에게 봉사하는 군인은 사용자와 피사용자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장군 휘하로 편입 종속된 것이다.  이렇게 군인들이 자신의 이익 추구에 따라 자신의 직속 지휘관에게만 충성하는 군대로 변한 즉 사병화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것은 마침내 변방의 군대가 루비콘 강을 건너 수도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장악한 줄리어스 시이저의 사례가 말해주듯 사익에 집착한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고 그리하여 공익에 기반한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게 되는 예기치 못한 결과[3]를 가져왔다.



[2]1884년 갑신정변 때 정부 요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우정국 개국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정한 것을 상기하라.

[3]예기치 못한 결과 (unintended, unanticipated, unforeseen consequences)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