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투후”를 “김일제”이라고 해석하는 한국인들에게

문무대왕 2025. 4. 11. 12:56

투후김일제이라고 해석하는 한국인들에게

 

투후 상구성-반악의 서정부와 백제 흑치준 묘지명의 투후는 누구인가

 

투후를 김일제라고 해석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잘못을 한번에 깨부숴버리는 주장으로서 우선 강희자전을 즉시 펼쳐보기를 바란다. 한자옥편만 펼쳐봐도 투후 김일제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동안 왜 한국인들은 눈뜬 봉사가 되었고 코끼리 다리 만지는 장님이 되었고 귀마저 멀은 귀머거리가 되었고 벙어리 삼룡이 농아가 되었단 말인가?

 

“한 나라가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면 그 문명은 국내적으로 사회적 분열을 겪거나 외부 군사적 침략의 위험에 노출되거나 경제적 식민지 노예 상태로 전락할 그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믿음의 상실이 가져온 결과로 인해서 문명이 쇠퇴하면 다른 종교나 다른 믿음의 체계에 의해서 고무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대체되었다."[1]

 

문무대왕릉 비문의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는 한왕신(韓王信)의 후손으로서 상나라 동이족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무공을 세우고 고관대작을 지낸 역사적 인물로서 한서에 기록된대로 투후는 商丘成(상구성)을 지칭한다.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적혀 있는 문무대왕릉 비문은 한민족 역사의 기원을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보물이다. 반악의 서정부에서 표현된侯之忠孝淳深(투후 지충효순심), 백제 흑치준 묘지명 가운데頹當 侯入仕 西戎孤□”(퇴당 투후입사 서융고신)은 문무왕릉 비문은 서로 연관적으로 해석된다.

 

① 반악의 서정부에 나타난侯之忠孝淳深(투후 지충효순심)

 

반악의 서정부에서 투후()의 정체를 알려주는 구절은 문무대왕 비문 구절 속에 등장하는투후 제천지윤투후를 설명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료에 해당한다. 서정부의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臨危而致勇奮投命而高節亮侯之忠孝淳深陸賈之優游宴喜.

이 반악의 서정부 구절을 번역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의 큰 위기 상황에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사람이 있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곧은 절개를 드러낸 충신이 있다. 이러한 사람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성이 돈독했던 투후가 있고, 물러날 때를 알고서 조용히 낙향하여 말년까지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누렸던 육가가 있다”.

여기서 투후는, 韓信(한신)과 같은 황제의 한왕(韓王)의 후손으로 동이족 출신으로서 무공을 세우고 서쪽나라 홀로된 기러기-(퇴당 투후입사 서융고신(頹當 侯入仕 西戎孤臣)-가 되었던 한퇴당(韓頹當)을 이어받은 사람이 상구 성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서에 기록된대로 (투후)商丘成(상구성)을 지칭한다.

 

② 백제 흑치준 묘지명의頹當 侯入仕 西戎孤臣”(퇴당 투후입사 서융고신)

 

백제 흑치준 묘지명에 들어있는 투후 구절은 다음과 같다: “於維后唐 求賢以理 頹當 侯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片善斯紀”. 당나라 황제가 마땅히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이치를 깨닫고 동이족 출신 한퇴당 같은 뛰어난 인물을 썼도다. 동이족 한()나라 후손 투후 상구성이 한나라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서쪽 먼 변방의 구석진 곳까지 서정을 나갔는데, 같은 동이족의 자손으로서 공적이 그들에 미치지 못함이 없을 정도로 구했으니 여기에 그들 보다 조금 뛰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기념한다.

 

③ 한자 사전에 풀이된() 내용

 

1716년에 나온 강희자전 옥편에서 “()” 한자를 펼쳐보면史記年表侯金日前漢功臣表侯商丘成-이렇게투후 김일제투후 상구성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면 투후는 누구인가 이 책의 내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율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康熙字典禾部:《廣韻當故切集韻丁故切 𠀤音妒 地名 史記年表侯金日 前漢功臣表侯商丘成 在濟成武 이와 같이 강희자전에는 侯金日”, “侯商丘成두 가지 팩트를 소개하고 있다. 중문대사전과 한어대자전에는 侯商丘成으로 설명하고 있다.

康熙字典 () http://www.guoxuedashi.net/kangxi/pic.php?f=kangxi2&p=2040 康熙字典 (同文) http://www.guoxuedashi.net/kangxi/pic.php?f=kx&p=853

 

 
<《中文大 at 1617
http://www.guoxuedashi.net/kangxi/pic.php?f=zwdcd&p=10467>
 
 
<漢語大字典(第二版) (homeinmists.com) http://www.homeinmists.com/hd/orgpage.html?page=2789>  

 

이 책은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투후 상구성의 역사에 대해 고증한 책이다. 상구성, 이 역사적 실제적 인물을 역사학적으로 밝혀내는 위대한 한 역사가의 임무를 함께 풀어보고 싶지 않는가?

 

투후 상구성 vs 투후 김일제

 

사기 년표에는 투후 김일제”, 한서 공신표에는 투후 상구성이 적혀있다. 강희자전 《康熙字典글자 설명 페이지를 보라. 史記·年表》 사기 연표 해당 페이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二月己巳光祿大夫霍光大將軍 博陸侯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太僕安陽侯上官舛大將軍.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 그런데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죽은 때가 BC 90년 최소한 BC 88년 이전인데, BC 87년 일이 사기에 적혀 있다면 이런 역사 기록은 사마천 사후 후대에 약간 가필되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문무대왕 왕릉비 비문의 투후는 투후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투후 상구성이라는 결론을 이 책은 이끌어낸다.    

                   

漢書 功臣表》에서의 商丘成

 

반고의 《漢書 功臣表》 한서 공신표를 찾아보면 商丘成이라는 구절이 보다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景武昭宣元成功臣表 

號諡姓名 功狀戶數 始封 曾孫 玄孫

 

侯商丘成 以大鴻臚擊衛太子力戰二千一百二十戶 延和二年七月癸巳封四年後二年詹事侍祠孝文廟醉歌堂下曰出居安能鬱鬱」,大不敬自殺       濟陰

 

이와 같이 한서 공신표에는 商丘成”(투후 상구성)에 대해 정리되어 있다.

한편 김일제는<한서 공신표>에서 敬侯 金日”(투경후 김일제)로 기재되어 있다. <한서 공신표>에는 이렇게 투후가 아니라 투경후 김일제”(敬侯 金日)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

 

敬侯金日 以駙馬都尉發覺侍中莽何羅反侯二千二百一十八戶 始元二年侯丙子封一日薨 始元二年侯賞嗣四十二年薨亡後 元始四年侯常以日曾孫紹侯千戶王莽敗


한서 유굴리전에서의 투후 상구성 기록

 

위와 같은 한무제 때의 기사와 공신표에 나타난 기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은 한서 열전 유굴리전이다. 유굴리에 대한 기록은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 실려 있다. 유굴리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上曰 莽通獲反將如侯 長安男子景建從通獲少傅石德 可謂元功矣 大鴻臚商丘成力戰獲反將張光 其封通爲重合侯 建爲德侯 成爲 諸太子賓客 嘗出入宮門 皆坐誅”.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무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랑 망통은 반란세력의 주동자 여후를 체포하였고,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망통을 따라서 반란세력의 주요 협력자인 태자의 소부 석덕을 체포하였으니 가히 그 공이 크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세력의 주동자인 장광을 붙잡았다. 이런 공로로 망통을 중합후에 봉하고, 경건을 덕후에 봉하며, 상구성을 투후에 봉한다’.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의 빈객 모두와 과거 태자궁을 출입한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했다.”

 

商丘成 자치통감 기록

<
자치통감> BC 91 정화2년조에상구성을 투후에 봉했다는 기사가 적혀 있다.

商丘成力戰獲張光 封通重合侯 德侯 為秺.



[1] 토인비,“Each time a nation has lost faith in its religion its civilisation has succumbed to domestic social disintegration, foreign military attack or economic enslavement. The civilisation that has fallen as a result of the loss of this faith has been replaced by a new civilization inspired by a different faith or relig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