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 Referendum
10. 대법원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한 정부 여당의 반응
정부여당은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으나 1951년 3월 9일 호주연방대법원은 이 법률안에 대해 위헌무효의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의 위헌법률 판결이 나온 지 1주일 만에 정부여당은 상하원을 동시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초강경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의회를 통과한 공산당 해산 법률이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위헌 무효가 됨에 따라서 공산당 해산 법률이 무위로 되돌아가자 보수당 정부는 반공주의의 국민 여론을 등에 엎고 야당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1951년 4월 28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여당 멘지 정부는 하원과 상원(총선 실시 이전의 상원은 야당노동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에서 모두 다수의석을 차지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실시된 총선 결과는 하원에서 집권여당의 보수당 소속 52명, 국민당 소속 17명이었고, 야당 노동당은 52의석을 차지했다. 상원은 정부여당이 32석(자유당 27명 국민당 5명), 노동당이 28석을 차지함으로써 상원에서도 보수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섰다.
11. 국민투표 Referendum를 통한 헌법 개정의 방법으로 공산당 해산 추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멘지 정부는 대법원에서 위헌 법률 판결이 난 공산당 해산 방침에 대해 헌법을 개정하여 공산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방침을 밀어 부치고 찬반 투표의 국민투표[1]를 추진하였다. 정부가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개정을 의도했던 까닭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법률 선언 효과를 되돌리기 위한 목적 즉 공산주의를 대처하는데 정부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었다.
1951년 9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대법원의 위헌 법률 선언이 나온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민투표는 헌법에 51A조의 특별 규정을 삽입하고자 하는 정부여당의 헌법개정안에 대해 국민들의 찬반 여부를 묻는 간단한 형태였다.[2] 그 질문은 하나는 다름과 같았다: “당신은 “헌법 개정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권한) 법률 (1951년)로 제안된 헌법 개정 법률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정부여당이 제안한 법률 내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다룰 입법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위헌 법률을 판결한 요지가 입법부는 그러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헌법에서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국민투표를 통해서 헌법에 명시적으로 그러한 법률 제정 권한을 부여하게 되면 정부의 의도대로 공산주의자를 대처하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헌법적 제약이 사라짐을 의미하였다.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직접적인 구속을 받는다. 헌법이 법률보다 상위의 지위에 위치한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헌법 개정이 통과되었다면, 정부가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헌법적 제약이 제거되고 정부는 전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노동당의 국민투표 반대 캠페인과 보수당의 국민투표 찬성캠페인 선거 광고>
당시 국민들의 여론은 반공주의 흐름을 지지하고 있었다. 갤럽 여론 조사에서 찬성 여론은 국민투표 선거일 2달 이전인 7월달 80%에 달했다가 8월달 73%로 약간 떨어졌다.[3]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법률 제정 근거를 헌법에 삽입하고자 하는 국민투표가 거의 통과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야당인 노동당은 국민의 양심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을 전개했다. 이 때는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헌법 재판에서 부두항만 노조를 대변했던 인권변호사 출신의 에바트 의원이 노동당의 당수가 되어 국민투표 부결 선거운동을 지휘하였다. 공산당 대처 법안을 지지하는 여론은 80%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부결시키려는 야당 노동당의 선거운동이 승리할 가능성은 비관적인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는 찬성 2,317,927표, 반대 2,370,009표로써 헌법개정안은 찬성표 49.44%에 머물러 과반수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대법원의 위헌 법률 판단에 대해서 정부여당이 유권자의 정치적 힘으로 다시 뒤집으려던 정치적 시도가 헌법 앞에 무릎을 끓게 된 것이었다.
정부여당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적극 대처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추진했던 국민투표[4]가 부결된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헌법 개정안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호주국민들의 보수적인 정서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5] 또 당시 매카시즘의 절정기에서 정부의 공산당 강제 해산 방침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다수이었으나 대법원에 의해서 위헌 무효의 판결이 난 사안을 다시 국민투표에 회부한다는 것에 대한 경계 심리와 국민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가 반영되었을 것이다.[6] 다수의 국민들은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 기본권을 잠재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전제적인 권한을 내주는 것까지를 수긍한다고는 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야당 노동당의 헌법개정안 반대 캠페인은 국민의 자유 기본권 침해에 대해 의로운 반대투표를 던져달라고 국민의 양심과 정서적인 면에 주로 기대었고 또 이러한 선거 캠페인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반공주의 물결이 거세었던 당시 정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도 공산당의 강제 해산 국민투표안은 끝내 부결되었다. 국민투표 부결의 승리에 대한 의의는 다음의 말로써 충분히 공감된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 다음 번 선거에서 시정될 수 있지만 헌법 개정의 문제에서 한 번의 판단 오류를 범하면 그것은 자유와 정의로 짜여진 민주주의 옷감을 통째로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7]
<호주의 전통: 독재 정권에 “아니오 No”라고 외쳐라!” 국민의 자유권이 위협을 받을 때 호주국민들은 언제나 아니오!를 외쳤다고 하면서 공산당 해산 법률 국민투표에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는 리버티 1951년 8월 28일자 1면.>
[1] 호주연방헌법 128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개정의 절차적 요건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헌법 개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상하원에서 절대 과반수로 통과되고, 또는 상하원 중 각자 재통과되고, (2) 국민투표에서 전체 국민의 과반수로 통과되고, 또 과반수의 주에서 주민의 과반수를 얻은 경우-이를 “이중 다수결 double majority” 제도라 부른다-헌법 개정안이 성공적으로 통과된다. 호주는 연방국가이고 각주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연방 전체에서 투표총수 중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또 동시에 과반수의 주(즉 기본 6개주 중 4개주 이상)에서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보다 엄격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호주 연방의 각 주는 절대 인구수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데 만약 연방 전체 국민의 과반수만 획득하면 국민투표가 통과되게 하면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의사는 보호받기 어렵기 때문에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서 과반수의 주에서 찬성해야 된다는 이중다수결의 요건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국민투표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국민투표법(절차규정) Referendum (Machinery Provisions)Act 1984 (Cth)’을 참조하라. http://www.comlaw.gov.au/Details/C2013C00200.
[2] “Do you approve of the proposed law for the alteration of the Constitution entitled “Constitution Alteration (Powers to deal with Communists and Communism) 1951"?”
[3]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at 51, 54.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4]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에서 스위스에 기반을 둔 국민투표제도가 도입된 주된 이유는 정당 정치의 당파성과 정치적 부패 문제 때문이었다. 다이시는 국민투표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민투표는 현재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의회다수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장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국민투표는 정당 정부가 노정시켜온 결함을 상당부분 치유해 줄 수 있는 제도이다. 국민투표의 장점으로 국민의 거부권은 그 자체가 민주적 제도인 동시에 그 소극적 성격 때문에 보수적 제도로 기능한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며 유권자와 다수가 유지하기를 원하는 법이나 제도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국민투표 referendum’는 스위스에서 시작된 제도로 ‘국민의 거부권 the people’s veto”이라고 흔히 설명되는데 이는 국민투표가 유권자의 승인을 얻지 못한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주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의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결과는 크게 대조된다. 한편 호주의 사례는 1952년 공산당 해산 국민투표에서 보여준 결과가 말해주는 것과 같이 다이시가 예견했던 대로 정당 제도가 가진 취약점을 치유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5] 1901년 1월 1일 발효된 호주연방헌법의 11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44번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헌법 개정의 국민투표가 성공한 경우는 단 8차례밖에 지나지 않는다.
[6]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Bill would have fared very differently in the Commonwealth Parliament and the Caucus rooms if there had not been in the background a High Court which, over a period of nearly half a century, had shown itself a vigilant defender of civil liberties.” at 177
[7] 국민투표 부결을 주도하여 승리한 야당 당수 에바트 (1894-1965년) 의원의 회견문 중, “The consequences of a mistaken vote in an election verdict can be retrieved. But an error of judgement in this constitutional alteration would tend to destroy the whole democratic fabric of justice and libe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