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릉비 연구-제1권-비문 앞면 해석

비문 앞면 24행 해석-태백인가 진백인가

문무대왕 2025. 4. 1. 11:11

24민족중흥 오태백(吳泰伯)은 누구인가?

 

▨▨▨▨▨▨▨▨貺更興泰伯之基德

 

국편위 번역: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추홍희 해석: 오나라 시조 오태백은 덕치에 기반하여 새나라를 건설했는데, 그와같은 도덕정치로 민족 중흥의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국편위는 글자 판독을 “秦伯(진백)으로 하였으나, 정확한 판독글자는 "진백"이 아니라, 유희해의 판독대로 “泰伯(태백)이 옳다.

 

更興

 

황은 선물을 주다, 선사하다, 베풀다의 () ()의 뜻이다. 更興(경흥)復興(부흥) 中興(중흥)과 같은 말이다.  貺更興 민족 중흥의 선물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민족 중흥은 그 바탕인 민족 정신의 부활을 의미한 다. 그것은 정신적 복록이고 축복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갖는 단어는 靈貺(영황)이다. 영황의 사전 풀이는 神靈賜福(신령사복)이다. 승선태자비 가운데 “白魚呈貺”이 나온다. 靈貺(영황)이 쓰인 예는 후한서 광무기찬의 “世祖誕命 靈貺自甄, 이신의 시에 “瑞彰知有感 靈貺表無災”의 구절이 찾아진다. 따라서 貺更興 결자부분은 “靈貺更興(영흥경흥)으로 메꾸어서, ‘민족 중흥의 선물을 선사하였다’고 해석된다.

 

“更興泰伯之基”(경흥태백지기)를 국편위는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고 해석했으나, 이 문장은오나라 시조 오태백은 덕치에 기반하여 새나라를 건설했는데, 그와같은 도덕정치로 민족 중흥의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는 의미이다. 국편위는泰伯”(태백)秦伯”(진백)으로 오판했다. 비문앞면24행의泰伯之基에 대해서 국편위는秦伯”(진백)으로 판독했으나, 저자는泰伯”(태백)으로 판독하고 오나라 시조 오태백으로서 해석하여민족 중흥의 의미와 그 조건을 풀어냈다.

 

泰伯之基

泰伯(태백)

泰伯(태백)은 오나라의 시조 오태백을 지칭한다. 오월춘추의 오태백전, 사기의 오왕세가를 참조하라. 왜 사마천이 오태백을 세가 중 맨 첫 번째로 올려 놓고 추앙했는지 그 이유가 무언가 있지 않았겠는가? 정치이념이 다른 공자가 왜 오태백을 논어에 기술하고 칭송했겠는가? ()의 정치를 펼쳐서 천하의 인심을 얻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던 오태백이었다. 오태백은 덕의 대명사인 것이다. 오태백의 정치 기초는 德治(덕치)에 있었다. 성인군자의 대명사 오태백의 정치이념의 기초인 덕화의 물결이 다시 부흥하게 되는 큰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가 비문의 내용으로 보인다. 이런 후사는 바로 조상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오태백의 天下三讓(천하삼양)의 미덕은 김춘추의 천하삼양 고사로 이어진다. 김춘추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사과가 아니지 않는가? 훌륭한 선조 오태백의 후손이기 때문에 오태백의 부활의 그의 화신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민족중흥의 황금 시대의 부활은 누구에게 달려 있을까? 천의인가? 인사인가?

도와 덕의 정치 개념에 대해선 운급칠첨의 총서도덕(道德) 부분을 참조하라.

 

진백 秦伯

秦伯(진백)은 민족중흥의 기틀을 닦았다는 의미로는 적합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백은 주나라가 쇠퇴한 결과로 나타난 역사이기 때문이다. “平王之 周室衰微 諸侯强弱 齊 楚 秦 晋 始大 政由方伯”. 주평왕(周平王, BC 781-BC 720) BC 770년 주나라 수도를 낙읍으로 옮기는 동천을 단행했다. 귀족들의 발호가 심해지자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대신 제후국들인 초나라 제나라 진나라가 강성해졌는바, 함곡관 서쪽의 하서 지방은 주양왕(周襄王) 때 진나라를秦伯”(진백)으로 봉해서 서쪽의 우두머리 제후국으로 강성해지고, 결국 춘추전국시대 들어서 진()()()()()()()의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나타나 최강대국 진나라에 대항해서 합종연횡책을 구사하면서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秦伯嫁女(진백가녀)

또 진백가녀(秦伯嫁女)라는 고사성어의 의미에서도 진백을 민족중흥의 의미로써 쓸 수 없다. 진백가녀(秦伯嫁女)는 진() 목공(穆公)이 진()나라와 결맹을 맺고 자기의 딸을 진나라 공자에게 시집을 보낼 때 금은비단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시녀들을 70명이나 함께 딸려보내면서 진공자가 자기 딸을 어여삐 봐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정반대로 진공자는 공주 대신 딸려온 시녀를 사랑해버리는 바람에 애초에 기대한 결과가 망쳐지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실질은 도외시하고 겉만 화려하게 겉치레하려는 속빈 생각을 질타하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겉치레를 배격하는 사상을 강조하였던 묵자와 한비자 또한 당연하게 진백가녀를 질타했다.

 

 

 

학자적 양심과 올바른 학문적 태도

 

“신라인들은 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흉노로 자처했을까?”[1] 이런 비과학적이고 거짓된 글들이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학자적 탈을 쓰고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다.

 

나의 반론적 증거로 인해서 이러한 일말의 학자적 양심도 없고 학문적 근거가 미약하고 부실한 글들로 점철하면서 (왜냐하면 학자의 의무는 자신의 이전에 제기된 사실 예컨대 문무왕릉비문의 글자가진백이 아니라태백이라는 사실(팩트) 1832년에 알려졌고 또 그 팩트가 1873년과 1881년에 세상에 공표된 책에 의해서 이미 제기된 것은 사실이므로 이러한 사실을 검토하지 못한 학자라면 그 연구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여지껏 식민지 기부 기득권층 쓰레기들이 쌓아올린 적폐들이 일거에 일소될 것이다. 거짓과 혼란을 부추기는 말세의 혼탁을 일거에 쓸어 버리고자, 이순신 장군의 맹서문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삼척장검을 들고 하늘 앞에 맹세하니 강산도 감동하여 색깔을 바꾸는도다의 결기를 담은 저자의 국편위를 정면으로 통박하는 실증주의 문언 해석 결과가 책으로 드디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2020 529일자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에서신라 문무왕 비문 등에 중국 서북지역에서 살던 흉노의 후손이라 적시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또문무왕릉비에는 신라인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기원을 더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글자도 있다. 그의 비에는 진백(秦伯)이라는 사람도 나온다. 이 이름은진목공’(秦穆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진시황의 22대 선조로 중국 서부에서 유목민들을 평정하고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라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가짜 지식인들의 거짓된 주장을 밑받침하는 것과 같이 정말로 문무왕릉비문에진백(秦伯)”이라는 문구가 나올까?  다시한번 살펴보자.  제아무리 까막눈들이라고 해도 사람의 양심까지 까막눈은 아니지 않는가?

문무왕릉비 탁본에 의거 판독한 유희해의 비문판독문을 똑똑히 보라.

 

문무왕릉비 비문 글자는진백(秦伯)”이 아니라泰伯”(태백)이라는 글자가 분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한겨레 신문 게재(2020.5.29.) 글과 같이 명색이 사학과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갖고 쓴 글들이 그동안 주구장창 외쳐왔던 근거가 장평대전의 기왓장이 무너지듯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팩트가 무너지면 결론이 무너지게 되는 증거법칙에 대한 확률적 의미를 설명하는 저자의 아래 글을 참조하라.

 

일제식민지사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지도 아래 성장한 한국사학자들이 그동안 국사학계를 장악하면서 쌓아놓은 적폐가 하루아침에 와장창 무너지게 된다.  국편위가 여지껏 문무왕릉비 판독 근거로 삼거나 현재까지 국편위가 소장하고 있는 탁본 근거 판독문은 1922년에 발간된 오흥유씨(吳興劉氏) 유승간(劉承幹, 1881-1963)의 희고루간본(希古樓刊本)이다.  이 유승간의 발간본(劉喜海《海東金石苑》八卷,《補遺》六卷,《附錄》二卷)은 국편위가 스스로 인정하듯이[2], 시간적 가치측면에서나 학문적 가치 측면에서 이전 시기에 출간된 다른 판본에 비해서 학문적 가치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실정은 2020 5월 현재까지 네이버 지식백과의 기술과 국편위의 저자 문의에 따른 답변에서 확인되는 바대로, 저자가 정리표에서 서술한 1873, 1881, 1888년 중국에서 발간된해동금석원의 서적들 조차 전혀 보유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그만큼 가장 낙후되고 무척 한심한 기관에 머물러 있음이 노출되었다.

 

이에 저자는 정리표에서 알 수 있다시피, 국편위가 여지껏 공개하지 못한 1922년 유승간보유본보다 무려 40여년이나 앞서 발간된해동금석원문무왕릉비탁본 판독문을 한국 최초로 공개한다.  공개되는 판독문은 1881년 발간된 동무유씨海東金石苑이므로, 국편위가 과거 언론에 공개했던 1922년에 발간 오흥유씨 유승간의 희고루간(希古樓刊)보다 무려 40여년이나 앞서 발간된 사료이므로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한 매우 유용한 자료로써 그 가치가 무척 높다.  국내학계에서 공개된바 없는 가장 앞선 시기에 출간된 탁본에 의거한 문무왕릉비 판독문을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새로운 사료 제공은 물론 그동안 학계의 학문 수행의 구겨지고 잘못된 관행으로 역사의 진실이 은폐되어 온 식민사학의 적폐를 쓸어내고 바로잡아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를 기대한다. 일제식민사학의 적폐에 물들지 않는 저자의 새롭고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정확한 해석이 식민사학의 적폐에 가위눌린 그동안의 잘못된 한국사를 발칵 뒤집어 놓는 반만년 한국사의 위대한 혁명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기대한다.

비문의 글자판독은 지금까지의 식민사학자들이 판단한대로의秦伯”(진백)이 아니라泰伯”(태백)이다.  따라서 문무왕릉비 비문에는秦伯”(진백)이 나오지않고, 문무왕릉비에 나오는 글자는 " 泰伯”(태백)이다.  그리고 "泰伯”(태백)이 되어야泰伯之基德”(태백지기덕)이라는 문무왕릉비 비문 구절의 문맥상 의미가 올바로 해석된다.

 

그동안 식민사학자들의 비학문적 태도와 비학자적 양심의 결과들이 낳은신라인은 왜 스스로를흉노의 후예라 불렀을까또는신라 문무왕 비문 등에 중국 서북지역에서 살던 흉노의 후손이라 적시하였다는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은 곡신불사 영광불멸 문무왕과 당태종의 혼령에 인도된 저자와 같은 진실의 추구자들이 추적한 실증주의적 문언해석의 업적에 따라서 이제 일거에 멸지될 것이다.

 



[2] “현재 국내에 알려진 劉承幹 印本 외에 학문적 가치가 뛰어난 판본이 중국 내에 존재하고 있지만, 국내에 보급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후대의 어느 金石文集에도 소개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김애영, “海東金石苑 연구”(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