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앞면 25행 해석-挹婁(읍루)족과 여진족의 귀순
25행 挹婁(읍루)족과 여진족과 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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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편위 번역: 교화가 북으로 읍루(挹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추홍희 해석: (歸德)之風 덕으로 주변을 교화시키는 덕화정치의 바람이 산을 흔들듯이 세차게 불어서, 北接挹婁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어 있는 읍루까지 불어서, 蜂(翔吐飯) (호전적이던 읍루족이 마치 벌꿀이 만들어지듯이 완전히 변화해서 귀순해 왔고 감히 도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평화가 정착되고 서로 잘 살게 되었다.)
▨▨之風 北接 挹婁 蜂▨▨▨
歸德之風 搖山之風
歸德(귀덕)은 덕화정치 德政(덕정)으로 인해서 귀부(歸附) 귀순(歸順)해 온다는 뜻이다. 한나라 응초의 글에 “京師歸德 四方影附”의 예가 그것이다. 비문의 결자부분을 전후 문맥상 연결고리를 찾아서 추측하여 메꾸어 본다면, 歸德之風 搖山之風 北接挹婁 蜂翔吐飯의 의미가 들어 있다.
덕으로 주변을 교화시키는 도덕 정치가 산을 흔들 만큼의 큰 기세를 타고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어 있는 읍루(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 만주족, 금나라를 건설한 말갈족의 선조)에까지 불어서 이들 읍루족이 완전히 변화되어 (우리들에게 귀부 귀순해 온 바 그리하여 평화가 정착되었다.)
蜂翔吐飯 봉상토반
吐飯蜂翔(토반봉상)은 吐飯成蜂(토반성봉)과 같은 말로써 사람이 완전히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吐飯成蜂(토반성봉)의 의미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비유하면 “진화론”에 해당한다. 제3의 길을 여는 것과 같다. 사람은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존재로 전제한다. 사람의 변화는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변화 발전된다. 다만 그 변화와 발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벌꿀은 하루아침에 모아지지 않으며, 덕화와 교화는 시간이 걸린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교육이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벌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벌이 벌꿀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그 원리를 에라스무스가 잘 설명해 내고 있는데, 에라스무스가 들고 있는 벌꿀의 비유를 읽어 보자.[1] 벌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반대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알겠지만, 개구리가 올챙이에서 나오듯이, 파충류가 탈각을 통해서 새로이 태어나듯이, 나비가 애벌레에서 나오듯이, 사람 또한 여러 변화 발전의 과정을 겪어서 온전한 인간이 만들어진다.
토반성봉의 어원을 설명하는 오숙의 봉부 蜂賦에서 인용주해를 보자. “蜂飛入口 悉復成飯”.[2]
당나라 왕계의 “吞刀吐火賦”의 구절 “且夫神仙兮不常 變化兮多方 或漱水而霧含 或吐飯而蜂翔”을 읽어보자.
사람은 변화 발전되는 존재-교육의 목적-덕화의 의미-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로 변화 발전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四方聞之 來附者衆 … 靺鞨畏服 不敢犯焉”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말갈은 읍루를 지칭하는 말이고, 따라서 靺鞨畏服(말갈 외복)은 ‘북쪽의 읍루가 귀순해 오고 또 감히 처들어올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는 의미이다.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사방에서 듣고 와서 복종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어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호전적이었던 읍루족이 어찌해서 완전히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고 신라에 귀순해왔을까?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그 정치철학적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꿀먹은 벙어리”라는 우리속담이 있는데, 꿀을 입에 바르면 양 입술이 붙어서 말을 못하게 입이 닫혀진 모습에서 그런 말이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입에 꿀이 흐르면 여자 입술처럼 상대방을 유혹하는 그래서 침샘이 꿀컥할 정도일테고 따라서 입술에 벌꿀의 윤택이 흐른다는 것은 말을 잘 한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사실 꿀벌이 꽃을 찾듯이 상대방이 입으로는 교묘하게 좋은 말로 구수리고 마음 속에는 다른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口蜜腹劍(구밀복검)의 고사성어가 있다. 입에 꿀을 바른듯한 말은 자기 속내를 감추고 상대방에게 감언이설로 꼬시는 것을 이른다. 양약은 입에 쓴 법인데 입에 쓰면 뱉고 달콤한 벌꿀 같은 감언이설에 꼬드겨 넘어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벌의 침샘에 쏘여서 퉁퉁 부어 오르거나 까닥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고만다. 북방민족의 속임수나 달콤한 미끼에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아니되지만 상대방을 덕으로써 교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도 아니된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항상 교만하지 않고 상대방을 설복시키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런 대외 외교 정책은 외유내강의 철학에 기인한다.
봉상토반- 握髮吐哺(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
주공단이 자신의 아들을 노나라 제후로 봉하면서 인재를 널리 구하고 후대하며 결코 교만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는데, 이처럼 천하의 권력을 손안에 두고 있는 최고의 권세가도 자식을 가르칠 때는 교만함과 오만함을 경계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 교만하고 오만한 자식을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그래서 명심보감은 훈자(訓子)편에서 다음의 경구로써 재삼강조하였다: “憐兒多與棒 憎兒多與食”(련아다여봉 증아다여식), ‘아이를 사랑하거든 회초리를 들고, 아이가 밉거든 먹을 것을 더 주라.’ 요사이 자녀가 비만스러워지는 것을 경계하는 바와같이, 아이가 배부르면 게을려지고 나태해지기 쉽다.
“나는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이며, 주나라 제2대왕인 성왕(BC 1055-BC 1020)의 숙부로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최고 권력자이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감다가도 손님이 오면 머리채를 양손으로 감싸고 손님접대하기를 하루에도 세 번씩,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밥상을 물리치고 즉시 손님응대하기를 하루에도 세 번씩,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유능한 인재를 모시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유능한 인재를 구해서 모시지 못할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했다. 이제 천부의 혜택을 받은 땅 노나라의 제후에 봉해졌으니 나라안에 누구라도 교만한 사람이 결코 나와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명심하여라.”[3]
北接 挹婁 북접 읍루
挹婁(읍루)는 민족적으로 구분하면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 금나라를 건설한 말갈족의 선조에 해당한다. 청나라가 국호를 후금으로 정했던 사실이 말해주듯 청나라는 금나라를 건국했던 여진족의 후손이고 이들은 청나라 건설 이후엔 만주족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의 총칭은 흉노족에 속한다. 읍루라는 명칭을 흉노족을 한나라 때 부르던 이름이다. 당나라 때는 이들을 말갈족으로 불렀다. 국편위의 주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靺鞨은 隋•唐代에 불리웠던 명칭으로 ‘靺鞨’이 중국기록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北齊書》 부터이다.”[4]
삼국사기는 “읍루”를 “말갈”로 바꿔쓰기하였다.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사방에서 듣고 와서 복종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어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5]
동명성왕 때 접촉한 북쪽의 말갈이란 족속은 당시 한나라 때의 명칭으로는 “挹婁”(읍루)에 해당하므로, 국편위의 주해에서 인용하는 일본인학자의 견해와 같이 “(삼국사기)본문의 동명왕 시기의 말갈은 挹婁를 말하는 것으로 후대의 칭호가 치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다.[6]
문무왕 때는 당나라 시대인데 왜 한참 이전인 한나라 때 부르던 “挹婁”(읍루)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그만큼 신라는 독자성이 강하고 전통을 유지해 왔다는 반대 증거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숙신 부여 읍루 말갈 물길 여진 만주족은 중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변경 국가인 관계로 중원의 왕조의 교체기에 따라 민족의 흥망성쇠가 부침을 거듭하였다. 같은 민족 중에도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고 각자의 처한 상황 때문에 동화되고 사라진 지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서북쪽에서 침입하는 서하 흉노족은 오늘날 아프카니스탄이 오랜 외세 지배에 대해 반감을 갖고 호전적이듯 이들 유목 민족은 대체적으로 호전성이 강하다. 종교적으로는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이슬람이고 동쪽으로는 그 이전에 불교가 이들의 종교이었다. 말갈족의 금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몽고의 원나라, 여진족 만주족의 청나라 등은 기본적으로는 서하, 서강, 숙연, 돌궐, 선비, 읍루, 흉노 제국에 해당한다. 시대에 따라서 족속 명칭이 바뀌어서 혼란이 생기는 측면도 있는데, 한나라 때 읍루, 위진시대 돌궐, 당나라 때 말갈, 송나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때 여진,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명칭들이 바뀌었을 뿐 흉노종족의 기본적인 맥은 유지해 왔다.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이후 고구려 계통 말갈족이 세운 나라이었다.
蜂王(봉왕) 여왕벌
“蜂 ” 결자 부분을 “蜂翔吐飯”(봉상토반)의 의미로 추측할 수 있다고 앞에서 논했는데, 이러한 해석을 더불어 밑받침하는 다른 말을 찾아보면, “蜂王”(봉왕)이라는 단어로 메꿀 수 있다. “蜂王”(봉왕)은 여왕벌이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일족 가운데 최고위 인물 추장(chief) 즉 “首領”(수령)을 말한다. 당 이조위의 유의(柳毅)전에 나오는 “王久不至”(왕구부지)의 의미가 봉왕 즉 치프(chief), 수령의 의미로 쓰였다.
“北接挹婁蜂王”(북접읍루봉왕)의 의미는 오늘날로 치면 (한민족 개념을 차치하고 법치국가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와 반대되는 북한의 공산사회주의 비사법국가 독재체제이라는 측면에서 적대적인 국가체제이고 적성국이다) 북한의 백두혈통의 김씨 “수령”과 비슷하다. 북한은 오늘날도 “수령”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北接挹婁蜂王”(북접읍루봉왕)은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어 있는 읍루족의 수령이 (귀순해 왔다)’는 의미이다.
25행
之風- (歸德)之風 (搖山)之風 |
덕으로 주변을 교화시키는 덕화정치의 바람이 산을 흔들듯이 세차게 불어서 |
北接挹婁 |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어 있는 읍루까지 불어서 |
蜂 - 蜂(翔吐飯) |
(호전적이던 읍루족이 마치 벌꿀이 만들어지듯이 완전히 변화해서 귀순해 왔고 (감히 도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평화가 정착되고 서로 잘 살게 되었다.) |
[1] “자연계에서 한 예를 보자. 벌은 벌집에 꿀을 모이기 위해서 하나의 수풀에서 재료를 모와 오는가? 그게 아니라 벌은 온갖 종류의 꽃, 잡목, 수풀 모두를 정말 열심히 날아다니지 않는가? 또 벌이 모아온 것 그것이 바로 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벌은 그들이 모아온 재료를 자신의 기관을 이용하여 액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이전의 꽃이나 수풀이 가졌던 향기나 맛은 가려낼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재료들이 적당한 비율로 서로 혼합된 것인데 벌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암양은 한 가지 풀로 뜯어 먹고서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암소는 온갖 가지 풀을 뜯어 먹고 또 풀에서 즙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즙에서 변화된 우유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Erasumus, Ciceronianus (The Ciceronian) at 82).
[2] (吳淑, 事類賦‧蜂賦, 注引 葛仙公別傳). “仙公與客對食 客曰 當請先生作一奇戲 食未竟 仙公即吐口中飯 盡成飛蜂滿屋 或集客身 莫不震肅 但皆不螫 良久 仙公乃張口 蜂飛入口 悉復成飯”.
[3]사마천, 사기, 魯周公世家(주노공세가), “而使其子伯禽代就封於魯 周公戒伯禽曰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捉髮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 愼無以國驕人”.
[4] 국편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번역, “퉁구스 계통의 종족으로 중국 史書에서 秦•前漢代에는 肅愼, 後漢•魏代에는 挹婁, 北魏代에는 勿吉이라 하였다. 靺鞨은 隋•唐代에 불리웠던 명칭으로 ‘靺鞨’이 중국기록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北齊書》 부터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동명왕대에 이미 고구려가 말갈과 접촉한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이후에도 《삼국사기》에는 말갈이 간혹 나오는데, 隋•唐과의 전쟁 시기 이전에 보이는 말갈은 ‘僞靺鞨’로서(정약용, 《강역고(疆域考)》 권2 《말갈고(靺鞨考)》, 《여유당전서》 6집), 이는 濊(濊貊)를 가리킨다는 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19쪽)이 지배적이다. 특히 본문의 동명왕 시기의 말갈은 挹婁를 말하는 것으로 후대의 칭호가 치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鳥山喜一). 말갈은 그 종족의 일부(白山靺鞨•粟末靺鞨 등)가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었다.”
[5] Ibid.
[6]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