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부에서 열거한 인물 리스트
1. 서정부 단락에서 열거한 인물 리스트
역사를 회고해 보면
소하
조참
위상
병길
이런 명재상들과
蕭何(소하)
蕭何(소하, ?-BC 193) 강소성 출신으로 유방이 한나라를 개국한 후 소후(蕭侯)에 봉해지고 승상에 올랐다. 나라의 기틀을 정한 여러 법률을 제정한 법률가이었다.
曹參(조참)
曹參(조참, ?-BC 190) 강소성 출신 재판 담당 관리로 출발하였는데 유방 밑에서 군사전공을 세웠다. 개국공신으로 평양후에 봉해졌다. 소하의 승상 자리를 이어받고 그의 국정철학을 그대로 펼쳤다.
魏相(위상)
魏相(위상, ?-BC 59)은 BC 66년 한선제 때 승상에 발탁되었고 고평후에 봉해졌다. 易經(역경)에 밝았다. 한서 반고가 위상과 병길을 “유방의 한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으뜸 공신은 소하와 조참이었고, 한선제의 중흥기를 이끈 재상은 위상과 병길이었다는 명성을 들을 만하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한선제 때 흉노와 강화를 맺었으므로 흉노 출병 반대론에 대한 그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
邴吉(병길)
邴吉(병길, ?-BC 55)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 곡부 사람으로 노나라 재판관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승상을 지냈다. BC 92년에 일어난 무고지화 위태자 반란 사건 때 병길은 위태자의 자손을 숨겨 몰래 키워 주었는데 그렇게 살아 남은 무제의 손자가 후에 황제에 오른 한선제로서 이런 인연으로 병길은 박양후에 봉해지고 재상에 오르게 되었다. 병길 스스로 한선제를 몰래 키웠다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실이 결국 황제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병길이 위상의 승상 자리를 이어 받아 한선제의 중흥 시기를 이끌었다.
辛慶忌(신경기)
辛慶忌(신경기, ?-BC 12)는 흉노 서역 강족을 정벌하여 이름 높은 장군 신무현(辛武賢)의 아들이고 아버지를 닮아서 흉노와 서역 족속들을 굴복시킨 장군으로서 한성제 때 중임을 받고 주천(酒泉)태수 우장군 좌장군 등을 지냈다. 그의 전기는 한서 권69 신경기전에 실려 있다.
李廣(이광)
李廣(이광, ?-?)은 흉노와의 전쟁을 70여차례나 치룬 백전노장의 장군이었다. 사마천은 “적을 만나 싸울 때는 용감했고, 부하 군사들을 인자하고 자애롭게 대했고, 명령이나 규정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군사들이 모두 이광을 따르고자 했다. 그 이광 장군의 전기를 여기에 쓴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군인으로서 이 정도의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이광의 아버지는 진시황을 저격하려고 유명한 자객 형가를 고용하였다 실패한 연태자단을 섬겼다가 연나라가 망하자 한고조 유방에게 넘어온 장군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손자까지 삼대에 걸쳐서 장군을 배출한 병가의 유력 가문이다. 사마천의 변호로 더욱 유명해진 이릉이 이광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는 60평생 70여 차례나 전투를 치루며 국가에 큰 공을 세웠고 부하들을 사랑하고 베풀어 청렴결백했던 장군이었지만 결국 공신작위 하나 받지 못하고 새카만 부하에게 죄를 취조당할 상황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자결을 택했던 이광 장군이었고, 아버지는 실권자에게 개죽음을 당했고, 자신이 항복했다는 이유로 고국에 남아 있는 처자식을 사형시켜 버린 고국인데 무슨 삶의 의미가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소무의 말은, “不辱君命”(불욕군명)이었다. 임금의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고? 그래야 임금의 위신이 서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과 가문을 멸문해 버려놓고서 조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은 무슨 명분이 있다는 것이며 충과 효의 의미가 무엇인가? 귀국하면 부귀영화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이릉이 귀국의 회유를 거부한 이유는 이렇다. “丈夫不能再辱”(장부불능재욕): 사람은 두번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두 번의 실패는 없다고 실패를 성공의 거울로 삼는 대장부에게 치욕을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피하고자는 사람의 자기 보전 본능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경제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위험 회피보다 손실 회피(loss aversion) 경향이 크다. 인생은 도박판이라고 전쟁에서의 큰 공을 노리는 군인일지언정 사람들은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회피하려는 마음이 훨씬 크다는 것이 요즈음의 다니엘 카네만 등의 행동심리학의 이론으로 입증되지 않는가?
衛青(위청)
衛青(위청, ?-BC 106) 한무제의 위황후의 동생으로 무제 때 중용되어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올랐고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BC 127년 흉노를 대파했고 BC 119년에도 곽거병과 함께 흉노의 주력 부대를 섬멸한 무력정벌의 큰 공을 세웠다. 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위청의 아내이다. 평양공주는 원래는 조참의 증손인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였으나 그가 일찍 죽어서 미망인이 되자 위청에게 개가했다.
霍去病(곽거병)
霍去病(곽거병, BC 140-BC 117) 위청과 하동평양 동향출신으로 위청과 외조카 사이이다. 관직이 표기장군에 이르렀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BC 121년 흉노를 대파하여 서역통로인 하서지구를 개척하였고 BC 119년에도 흉노군을 대파하였는데 이 때 김일제와 망하라 망통 등 흉노의 고위층 상당수를 포로로 잡아왔다. 곽거병이 전사하자 그의 공로를 높이 산 한무제가 그의 묘를 크게 조성해 주었다.
신경기
이광
위청
곽거병 이런 명장군들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 원정을 나갔다고 적국에 사로잡혔으나 20년 동안이나 전향을 거부하며 버텨오다 끝내 살아서 돌아온 소무,
먼 타국까지 무력의 위세를 떨친 장건,
이들은 문화 전파와 교화를 통해서 세상 질서를 바로잡았는가 하면
무력원정을 통해서 황제의 위엄을 선양하고 높혔다.
蘇武(소무)
蘇武(소무, ?-BC 60)는 BC 100년에 중랑장에 임명되어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혀 19년동안이나 먼 北海(북해) 호수에 격리 억류되었으나 BC 81년에 한나라가 흉노와 휴전강화를 맺자 풀려나 귀국하였다. 이릉과 소무간의 편지가 남아 전해 온다.
張騫(장건)
박망후(博望侯) 장건(BC 164-BC 114)은 BC 138년 먼 서역변방 사막의 나라 대월씨(大月氏)국에 파견 나가는 사신 일행에 자원하여 서역에 나갔다가 인질로 잡혀서 흉노 땅에서 10년을 넘게 머물며 거기에서 처자식까지 얻었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흉노가 장건 일행을 더욱 서쪽으로 끌고 가려고 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하여 근방의 대원(大宛), 대월지(大月氏)국 등으로 전전했다. 그후 126년 귀국하는 도중 흉노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흉노의 내란을 틈타 도망쳐 한나라 장안으로 복귀했다. 위청(衛青, ?-BC 106)의 BC 123년 흉노 공격전에 참가하여 세운 전공으로 박망후(博望侯)의 작위를 받았다. 博望(박망)은 天門山((천문산)으로도 불리는 국경 요새에 해당되어 역사상 주요 접전 지역이었다. 한서 장건(張騫)전에 “騫 以校尉從大將軍擊 匈奴 知水草處 軍得以不乏 乃封 騫 為 博望侯” 장건을 대흉노 전공으로 박망후에 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2년후 이광(李廣)장군과 함께 흉노를 공격하다가 크게 실패하여 군법상 사형을 당할 뻔했으나 서인으로 강등되어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사마천이 군대 장수로서 그토록 크게 칭송한 비장군 이광은 이 때의 흉노전 실패로 끝내 제후 작위를 받지 못했고 BC 119년 자결했다.
장건은 BC 119년에도 오손국 대원국 대하국 안식국 등 서역국가들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어 이들과 연합책을 모색하였다. 이 때 서역의 비단길을 개척하고 여러 나라간의 도로를 개설하여 주변 나라와의 신뢰와 상호 이해관계를 높이고 선린교역과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장건은 BC 115년 귀국하여 외국 사신 접대와 각 나라간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대행인(大行人)의 관직을 수행하다 1년 후 세상을 떴다. 대행인의 관직은 육조 장관의 관장 업무로 보면 국가간 외교와 전례를 담당하는 예조판서에 해당하였다. BC 104년 한무제가 대행(大行)의 관직을 대홍려(大鴻臚)로 개칭했다. 투후 상구성은 BC 91년 일어난 무고지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투후에 봉해지고 어사대부로 승진하기 전까지 대홍려직을 지냈다.
서정부에서 震遠(진원)이라고 표현한 배경은 이렇듯 먼 서역국가들에 파견되어 힘을 바탕으로 한 외교술을 펼친 장건의 경력을 두고서 한 말이고 이런 장건을 소무와 함께 한 구절로 포함시킨 배경에는 소무가 19년 동안 흉노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는데 먼 북방 호수에서 격리 구금되었어도 전향하지 않고 끝내 돌아와 한나라를 위해서 봉사한 사실과 같이 장건 또한 11년 동안 흉노에 억류되었어도 굴복하지 않고 되돌아와 외교술을 펼친 사실이 있다.
국가가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절개를 드높인 충신에는,
충효지심이 돈독하고 깊었던 투후가 있고,
떠날 때를 알고 은퇴하여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즐긴 육가가 있다.
秺侯(투후)
투후 충효순심의 투후는 商丘成(상구성)을 가르킨다. 상구성에 관한 글을 참조하라.
陸賈(육가)
陸賈(육가, BC 240-BC 170)는 초나라 출신으로 정치외교가이었다. 한나라 건국 공신으로 잘 알려진 장량이 군사상 책략가라면 육가는 외교술의 대가에 속했다. 육가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망한 주요 원인과 한나라의 건국의 배경을 이론적으로 심층 분석하여 한나라의 통치술을 ‘문무 병행’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신어”의 저자이다. 육가는 유가적 문치주의에 경도되기 보다는 “行仁義 法先聖”(행인의법선성)의 도가 사상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유방이 죽고 난 뒤 여씨의 전횡 시기에 물러나 있다가 도가의 문무병행의 국정통치술을 펼친 한문제 때 다시 중용되었다. 육가는 유방이 항우와 맺은 강화 조약 등을 검토하는 등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에 정통하여 유방의 외교정책을 입안하고 수립한 전략가이었다. 육가는 문무 병행의 국정철학을 논한 한고조 때의 드문 문신이지만 동시에 남월에 출정한 군 경력이 그의 철학과 전략을 대변해 준다. 육가는 지금의 베트남인 남월에 출정하여 조타를 남월왕으로 옹립하고 남월을 한나라의 우호 제후국으로 만든 군사와 외교술의 대가이었다.
사마상여
왕포
양웅 같은 명문장가
馬相如(사마상여)
司馬相如(BC 179-BC 118)는 “상림부” 등으로 유명한 한나라의 대문장가로서 그의 자(字)가 長卿(장경)이다. 유비의 촉나라 수도인 촉군(蜀郡) 성도(成都) 출신이다. 이곳에는 당나라 두보가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곳으로 두보의 무후사가 있다.
王褒(왕포)
왕포(王褒, BC 90-BC 51) 자는 자연(子渊)이고 촉(蜀)군 출신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주경야독하여 육예와 초사에 능통한 사부가(辭賦家)로서 양웅과 더불어 “淵雲”(연운)으로 불린 명문장가이었다. 돈으로 사고 파는 노비가 종사해야 할 각종의 일을 꼬치꼬치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 노비계약문서 기록인 《僮約》(동약)의 작자이다.
揚雄(양웅)
揚雄(양웅, BC 53-18)은 자(字)가 子云이다. 어릴 적 지은 “甘泉賦”(감천부) 등의 사부(辭賦)로 일찍이 문명을 날린 명문장가이다. 논어와 역경을 통한 논한 저작 “法言”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
유향
유흠 같은 역사학계의 걸출한 인물들
司馬遷(사마천)
司馬遷(BC 145-?)은 字(자)가 子長(자장)이다. 사마천의 사망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기전 86년경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역사서 “사기”의 저자로서 불후의 이름을 남긴 사학자의 대가로 추앙받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흉노에 투항한 이릉을 한무제에게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 무고죄로 투옥되고 부형(腐刑)을 당했으나 아버지의 유언인 사기를 기필코 완성하고자 모든 치욕을 감수하며 끝내 “史記”(사기)를 완성하였다는 그의 한많은 이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는 문무왕릉의 비문 해석과 관련되는 투후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검토되지 못한 분야인 바 나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劉向(유향)
劉向유향(BC 77-BC 6) 자(字)는 子政(자정)이다. 한나라 황실 종친으로 역사서 “說苑”(설원)이 유명하다. 홍경 석현의 환관 득세기에 투옥되었다.
劉歆(유흠)
劉歆유흠(BC 50-23) 자(字)는 子駿(자준)이다. 유향의 아들로서 부친과 함께 “山海經”(산해경)을 수정편찬했다.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三統曆譜”(삼통역보)를 펴냈다. 유흠은 왕망 정권 때 중용되었는 바 왕망이 황권을 찬탈한 후 관직을 개편하면서 한나라 때의 태사령(太史令)을 羲和(희화)로 개칭하고 천문역법을 담당하게 하였고 유흠을 천문관으로 임명했다. 왕망이 피살되자 유흠은 자살하였다. 대대적인 도서재정리 작업을 펼치면서“周官”(주관)을 經(경)으로 올리리는 등 유교경전화 사업에 큰 공을 올린 유향 유흠 부자이었다.
조광한
장창
왕준
왕준
왕장 같은 서울시장을 지내며 명망을 쌓은 행정가들
趙廣漢(조광한)
趙廣漢(?-BC 65)은 한선제 때 영천태수에 임명되었고 그 후 경조윤을 지냈는데 당시 실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행정을 살폈다. 소망지의 탄핵으로 요참형에 처해졌다.
張敞(장창)
張敞(장창)은 생졸연도는 미상이고 한선제 때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곽광이 전권을 휘두를 때 승상을 지낸 양창의 아들 양온이 대역죄로 사형을 당할 때 그와 교분이 있는 관리들은 죄다 파면되었는데 이 때 장창도 면직되었다가 후에 예주자사로 재등용되었다. 양온의 숙청 때의 권력생리를 경험해서인지 장창은 아내의 눈썹을 그려주는 일로 소일거리를 삼았는데 이것이 조정에 알려져 웃음거리를 사자 선제가 그에 대해서 채근하자 눈썹 하나 미동하지 않고 태연하게 “아무도 모르는 부부 관계의 재미 중에는 눈썹 그리는 일보다 더 심한 것이 많을텐데요”라는 대답에 황제도 그냥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거나 눈썹을 깔고 덤비면 권력자에게 화를 입지 않겠는가? 장창의 눈썰미는 눈썹 그리면서 권력생리를 터득했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장창은 위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꼿꼿해서 요참형을 당한 조광한과는 달리 생을 선종으로 마쳤는지 모르겠다. 공직사회에서 부담이 가는 일은 처리하지 않고 질질 끄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편한 처세술의 하나인데 이러한 질질 끄는 지체 지연의 문화 연명(延命)문화 즉 상사가 곧 바뀔 것 같으면 영이 잘 안서는 공무원 권력 생리를 말해주는 “五日京兆”(오일경조)라는 말의 출처가 한서 張敞(장창)전이다. 양온의 필화사건에 연루된 장창이 경조윤에서 곧 파면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자 자기 부하 한 사람이 상사에게 대들고 “오일 후이면 경조윤에서 목이 짤릴텐데 내가 왜 그의 명령을 따르겠냐?”고 말하며 상사의 명령을 듣지 않자 바로 즉결처분해 버렸다.
王尊(왕존)
왕존(王尊)은 한원제(BC 75-BC 33)와 한성제(BC 51-BC 7) 때 탁 (涿)군출신으로 조실부모하였으나 경조윤(京兆尹)까지 오른 관리였다. 황하가 홍수로 범람할 때 대홍수를 이겨낸 인물로 이름 높았다.
王章(왕장)
王章왕장(?-BC 24)은 한성제 때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왕봉이 권력을 휘두를 때 직언을 서슴지 않고 간하다 투옥되고 옥사하였다.
王駿(왕준)
王駿왕준(?-BC 15)은 한성제 때 BC 23년 京兆尹(경조윤)에 임명되었다.
“삼왕”이란 문장 내용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 다른 뜻을 가진 대명사로 쓰인 바, 서정부 여기서는 반악이 “3왕 윤경”이라고 말했으므로 문장내용상 경조윤을 거친 유명한 세 사람을 말한다. 한서 왕길(王吉)전에서 말하길 “前有 趙 張 後有 三王”이란 말이 회자되는데, 조 장은 조광한과 장창을, 삼왕은 왕씨성 3인 王尊(왕존)、王章(왕장)、王駿(왕준)을 지칭한다.
우정국
장석지 같은 명재판관들
우정국
于定國(우정국)
于定國(우정국, ?-BC 40)한선제 때 광록대부에 올랐고, BC 69년에 재판관인 廷尉(정위)에 임명되었다. 어정국은 웬만하면 풀어주어 사람들로부터 “어정국이 재판관을 맡으면서 원망과 탄원이 사라졌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BC 52년에 어사대부, 일년 후 다시 승상으로 승진하였고 서평후에 봉해졌다.
張釋之(장석지)
張釋之(장석지, ?-?)는 생졸연도 미상인데, 한문제 때 재판관인 廷尉(정위)에 임명되어 한경제 때까지 지내며, 불편부당하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린 공정무사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사기”에 풍당과 함께 “張釋之馮唐”열전이 실려 있고, 한서에는 급암 정당시를 추가한 “張馮汲鄭”열전이 전한다. 장석지를 명재판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그의 판결 2건을 소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2] [3] 왜냐하면 사마천의 장석지에 대한 논평이 특히 지금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4] 장석지는 법 앞에 만인이 공평하다는 “法不阿貴 刑無等级”(법불아귀 형무등급)의 생각으로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 공정(公正)하고 공평(公平)무사의 신조를 지켰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그의 친구를 보라’는 속담 “不知其人 視其友”(부지기인 시기우)의 출처이기도 하다.
급암 같은 정직한 관리로 명망 높은 사람들
정당시 같이 인재추천시 신뢰받는 사람들
급암과 정당시는 추가 김정희가 “세한도”에서 언급하면서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인물이다. 서정부의 “汲長孺之正直,鄭當時之推士” 표현은 한서의 장석지급암열전의 논평에 들어 있는 "汲黯 之正直 鄭當時 之推士 不如是 亦何以成名哉”의 부분에서 그대로 가져온 표현이다.
汲黯(급암)
汲黯(급암, ?-BC 108)은 字(자)가 長孺(장유)이다. 급암은 한경제의 태자의 가신 출신으로 한무제 때는 동해군 태수를 지냈다. 愚直之臣(우직지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직언으로 이름이 높았다.
鄭當時(정당시)
鄭當時(정당시, ?-?)는 정환공(鄭桓公, ?-BC 771) 22세손이고 형양(滎陽)정씨 선조이다. 정당시의 부친은 항우의 부하로 근무하다 항우가 죽자 한나라에 귀순한 사람이었고 정당시는 한 경제 때 태자의 가신으로 임명되었고 한무제 때 제남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정당시는 겸손하고 사람 교제술에 밝았다.
賈誼(가의)
賈誼(가의, BC 200-BC 168) 가의는 장사왕 태부, 양회왕의 태부를 지냈다. 따라서 유방의 한나라 개국 후 일어난 오초칠국의 반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해서 가의는 정치적인 불운을 겪게 되었는데 가의의 이러한 정치적 불운이 춘추전국시대 초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하자 자살을 택했던 굴원과 비슷한 처지에 해당될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의는 굴원을 추모한 ”吊屈原賦”(조굴원부), 굴원의 생각과 같은 뜻을 실은 “鵬鳥賦”(복조부) 등으로 명문장가로 이름 높았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굴원과 가의를 함께 묶은 굴원가의열전이 전한다. 가의의 복조부는 우리들의 전통적 생사관을 말해주고 있어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성이 있으므로 복조부를 부록으로 게재하니 참조하기 바란다.
이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비단옷 휘날리며 구슬옥을 단 신발 걸음소리 쩌렁쩌렁 울려가며 궁정을 드나든 고관들이 다수이다.
이 가운데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옷을 옆으로 접혀 입고 다니는 풍습이 있는 이적 외국 땅에 잡혀 들어가 치욕을 딛고 일어선 사람도 있고,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교분을 쌓고 의기투합하거나 돌아가는 판세를 미리 꿰뚫어 보고 기회를 포착하여 처세에 능한 사람도 있다.
또 한편으론 현저하게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일찍 꺾여버린 이도 있고, 재능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높은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들 모두가 앞서 열거한 유명한 인사들처럼 맑고 신선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좋은 소문이 끊이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싶다. 리듬 있고 낭낭한 옷자락 소리가 내는 울림소리처럼 아름답게 이야기가 들려오기를 바라고 싶다.
왕음
왕봉
공현
석현 등 외척 환관 세력들이 득세하던 시절에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사방팔방으로 서울과 시골은 물론 온 땅이 꺼질 듯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그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
王音(왕음, ?-BC 15)은 어사대부를 거쳐 BC 22년에 대사마 그후 거기장군이 되었고 앙양후에 봉해졌다. 왕봉의 아버지 왕금의 조카이다.
王鳳(왕봉, ?-BC 22) 한성제 때 외척 실권자로서 한원제의 황후 왕정군의 부친이다. 왕씨 4형제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나라를 15년간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운 왕망을 왕봉이 발탁하여 신도후에 봉했다.
弘恭(홍공, ?-BC 47)은 어려서 궁형을 받고 한선제 때의 환관이었다. 홍공은 중서령, 석현은 복야(仆射)에 임명되었는데 홍공 사후 석현이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石顯(석현, ?-BC 33)은 홍공과 같이 한선제와 한원제 때의 환관이었다. 원제가 병을 얻어 정사를 기피하고 환관이 달래주는 음악에 빠지니 환관의 전횡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나라는 외척세력의 손에 놀아나 마침내 왕망(王莽, BC 45-23)의 찬탈(8년-23년)에 넘어가고 말았지 않았는가.
죽고난 후에 앞서 열거한 10여명의 명망가들의 반열에 과연 몇 명이나 견줄 수 있을까?
명성을 얻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지 않는가?
[1] 《漢書·魏相傳》:元康中,匈奴遣兵擊漢屯田車師者,不能下。上與後將軍趙充國等議,欲因匈奴衰弱,出兵擊其右地,使不敢復擾西域。相上書諫曰:「臣聞之,救亂誅暴,謂之義兵,兵義者王;敵加於己,不得已而起者,謂之應兵,兵應者勝;爭恨小故,不忍憤怒者,謂之忿兵,兵忿者敗;利人土地貨寶者,謂之貪兵,兵貪者破;恃國家之大,矜民人之眾,欲見威於敵者,謂之驕兵,兵驕者滅:此五者,非但人事,乃天道也。間者匈奴嘗有善意,所得漢民輒奉歸之,未有犯於邊境,雖爭屯田車師,不足致意中。今聞諸將軍欲興兵入其地,臣愚不知此兵何名者也。今邊郡困乏,父子共犬羊之裘,食草萊之實,常恐不能自存,難於動兵。 『軍旅之後,必有凶年』, 言民以其愁苦之氣,傷陰陽之和也。出兵雖勝,猶有後憂,恐災害之變因此以生。今郡國守相多不實選, 風俗尤薄,水旱不時。案今年計,子弟殺父兄、妻殺夫者,凡二百二十二人,臣愚以為此非小變也。今左右不憂此, 乃欲發兵報纖介之忿於遠夷,殆孔子所謂『吾恐季孫之憂不在顓臾而在蕭牆之內』也。 願陛下與平昌侯、樂昌侯、平恩侯及有識者詳議乃可。」 上從(其)〔相〕言而止。
[2] 釋之為廷尉。上行出中渭橋,有一人從橋下走出,乘輿馬驚。於是使騎捕,屬之廷尉。釋之治問。曰:「縣人來,聞蹕,匿橋下。久之,以為行已過,即出,見乘輿車騎即走耳。」廷尉奏當,一人犯蹕,當罰金。文帝怒曰:「此人親驚吾馬,吾馬賴柔和,令他馬,固不敗傷我乎?而廷尉乃當之罰金!」釋之曰:「法者,天子所與天下公共也。今法如此而更重之,是法不信於民也。且方其時,上使立誅之則已。今既下廷尉,廷尉,天下之平也,一傾而天下用法皆為輕重,民安所錯其手足?唯陛下察之。」良久,上曰:「廷尉當是也。」
[3] 《史記·張釋之馮唐列傳》:其後有人盜高廟坐前玉環,捕得,文帝怒,下廷尉治。釋之案律盜宗廟服御物者為奏,奏當棄市。上大怒曰:「人之無道,乃盜先帝廟器,吾屬廷尉者,欲致之族,而君以法奏之,非吾所以共承宗廟意也。」釋之免冠頓首謝曰:「法如是足也。且罪等,然以逆順為差。今盜宗廟器而族之,有如萬分之一,假令愚民取長陵一抔土,陛下何以加其法乎?」久之,文帝與太后言之,乃許廷尉當。是時,中尉條侯周亞夫與梁相山都侯王恬開見釋之持議平,乃結為親友。張廷尉由此天下稱之。
[4] 太史公曰:張季之言長者,守法不阿意;馮公之論將率,有味哉!有味哉!語曰「不知其人,視其友」。二君之所稱誦,可著廊廟。書曰「不偏不黨,王道蕩蕩;不黨不偏,王道便便」。張季、馮公近之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