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학습 교육 방법론과 소크라테스 질문법
2. 탐구 학습 교육 방법론과 소크라테스 질문법
카아가 역사는 대화의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메논과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며 전체를 이어가듯이, 질문의 방법으로써 이뤄진다.[1] 이런 카아의 역사 방법론은 본질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 방법론은 전통적인 영국의 교육방법론에 적용되어 왔는데, 존 듀이의 교육론 그리고 최근에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탐구 학습 방법론 또한 이를 적용한 교육론이다. 소크라테스 질문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잠깐 설명해 보기로 한다.
① 첫 번째 단계는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하였다. 나의 책에서 ‘문무왕의 유언은 무엇인가?’라고 핵심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는데 이 질문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 문답법에 대해서 잘 알려진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6년 담뱃대 파이프 그림[2]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첫 번째 명제는 ‘이 그림은 파이프이다’.
② 이 문장의 명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파고 들어가 보자.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가정하고서, 이와 어긋나는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이런 질문으로는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도 파이프로 보일까요?’라는 것이 되겠다. 만약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다음 단계의 질문으로 넘어가고, 만약 예라고 대답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파이프가 아니고 작대기나 만년필로 보인다면?’ 같은 질문을 해보자. 즉 담배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파이프라고 여기게 될까? 언어와 재현의 문제이겠지만 이러한 질문은 사물이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당황함을 안겨줄지 모른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③ 예외적인 것을 감안하여 첫 번째 명제를 다음과 같이 바꿔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그림을 파이프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한정된다는 것일까?’
④ 위 명제를 또 다른 질문으로 반박해 보자. 만약 그림에 글자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면 그래도 파이프라고 보일까? 이 질문에 상대방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바로 상대방의 첫번째 명제와는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감각은 상대적이라고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대적이라는 명제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서 오로지 질문만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담배 파이프를 화선지 위에 그린 그림일 뿐이지 파이프 그 자체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도의 3D 프린트 기술이 발전한 현재에서도 담배 파이프가 아닐 수 있다. 또한 트레이시 에민[3]의 작품 속의 텍스트도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를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간단해 보이는 그림 하나가 수 많은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 문답법은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의존하고 있는 기본 전제를 부정해 들어가며, 질문[4]을 통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끔 만드는 기술이다.[5] 위의 마그리트 그림의 예를 통해서 알다시피, 사물은 사람들이 인지한 대로 그들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관점이 달라지면 그 사실도 달라질 수 있다는 철학적 사고로 전개할 수 있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 아랫쪽에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자를 써 놓고 있는데, 그림과 문장의 의미는 모순되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화가가 대상인 사물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사물 자체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위에서 소크라테스식 질문을 ‘파이프란 무엇인가?’로 전개해도 같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 상대방은 파이프로 보인다고 말했지만.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 즉 인지는 그들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고, 또 관점이 달라지면 그 사실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고를 꺼낼 수 있다.
‘그래픽’의 어원인 그리스어 graphein의 뜻은 글을 쓰다 write와 그리다 draw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갖고 있고, 한자의 圖書도서 또한 서적書籍 문서를 뜻하는 단어인데, 글이나 이미지나 그것이 나타내는 그 사물과 꼭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 즉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은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그렇다면 화가가 파이프 그림을 그려 놓았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마그리트의 그림 속의 명제가 합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푸코(Foucault)는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그 철학적 사유를 펼쳤는데 푸코의 구조주의 비판에 대한 관련 부분은 그 책[6]을 참조하라. 푸코는 조형적 재현인 이미지와 언어적 지시인 텍스트 이 둘 사이의 분리를 주장하고, 유사(resemblance)와 상사(similitude) 개념을 분리해 내고, 유사와 확언(affirmation) 사이의 등가성(equivalence)을 제시했다.
시인이 언어를 통해 보는 상상의 세계나 화가가 대상을 시각적 이미지로 읽는 초현실의 세계는 서로 같은 동궤를 타고 있다. 그러므로 시적 감수성은 회화적 상상력과 같은 힘의 원천이 된다. 마그리트는 밤의 풍경과 낮에 보는 하늘을 한 화면에 재현한 <빛의 제국>의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낮과 밤의 기억이 우리 마음에 서로 불러 일으키는 감정의 환기성은 우리들에게 경이감을 느끼게 하고 매혹에 빠지게 만드는 힘을 선사해 준다. 나는 이 힘을 문학적 시(詩)라고 부른다.”[7]
[1] History… [is] both the inquiry conducted by the historian and the facts of the past into which he enquires”. , 카아, “역사란 무엇인가?”, at 55.
[2] “Ceci n'est pas une pomm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é Magritte (1898-1967),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 1928~29년, 63.5 cm × 93.98 cm, 캔버스에 유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3] 영국의 유명한 화가 Tracey Emin (1963-),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1995), You Forgot to Kiss my Soul (2007).
[4] elenchus; questions
[5]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황하게 (aporia; puzzlement) 만드는 기술이다.
[6] Foucault, M., Harkness (Editor, Translator), René Magritte (Illustrator), “This Is Not a Pipe”, Quantum Books.
[7] Rene Magritte, The Dominion of Light, 1954년, 146×113.7cm, Musee Royaux des Beaux-Arts, in his 1956 Guggenheim Prize speech, saying: “I find the evocation of night and day is endowed with the power to surprise and enchant us. I call this power poe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