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스토리 이 책을 펴내면서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
이 책을 펴내면서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를 읽고 나서 역자는 ‘도대체 작가는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어야 좋은 글 한 편을 창작해 낼 수 있을까?’, ‘글 한편을 쓰는데 얼마만큼 시대정신, 역사에 대한 지식과 통찰, 삶의 경험이 요구될까?’-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멜빌의 이 단편은 화자가 월 스트리트 변호사이고, 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개 법에 대한 어려운 글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난해하기로 소문난 멜빌의 글을 번역하고 주해함으로써 ‘도대체 번역자는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어야 좋은 번역 작품 한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자문에 자답하여 좋은 번역의 모델로써 남기고 싶은 야심찬 기대를 갖고서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자의 능력이 기대와는 다르게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꿩 대신 닭을 그린 것은 아닌지, 혹 떼려다 오히려 혹을 부친 격은 아닌지 또는 화룡점정 대신 화사첨족은 아닌지 그런 질책의 두려움 때문에 예기치 못한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하지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되고,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요 “대기만성”이라는 노자도덕경의 경구를 새기며 멜빌 단편 번역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는 왜 새로운 번역판이 필요한가?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는 멜빌의 단편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을 번역한 책으로써, 멜빌의 소설은 다수의 출판사에서 기존에 출간되었는데 왜 <바틀리 스토리>를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하게 되었는가? 새로운 책의 출간은 어떤 독창적이고 새로움의 필요성에서 나올 것이다.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는 한 평자의 표현대로, "월 스트리트 변호사의 이야기", "법에 대한 이야기", “로 스토리(law story)”이고, 사실 영미판례법 국가의 로스쿨에서 회자되는(膾炙人口) 작품 중 으뜸에 해당된다. 그런데 멜빌의 글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난해한 표현들이 많이 들어 있고, 또 변호사 법조인 시각, 법적 측면에서 정확하게 해석하고 번역한 경우는 기존의 번역서 중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로 스토리(law story)"에 걸맞게 법조인 역자의 보다 정확한 번역이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다. 기존의 번역 중에서 오역이나 부족한 부분은 보다 좋은 번역으로 만들고, 좋은 것은 더 좋은 번역으로 만들어 하나의 원천적인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더욱이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는 법률가의 입장에서 상세한 주해를 달고 번역한 책으로써 최초의 시도라고 사료된다. 이 책은 대륙법 제도와 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에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영미법철학적 내용에 대해서 쉽고 간결하고 정확하게 해설하고자 노력하여 독자들이 영미국인의 사고와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번역 Translation이란 무엇인가?
좋은 내용과 진실성을 지닌 책은 정보와 지식의 보고이자 마음의 양식이고 깨달음의 기쁨과 삶의 지침을 준다. 그런데 좋은 책이 다른 언어로 되어 있어서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데 곤란함을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번역의 개념에 대해서는 킹제임스성경 번역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서문”에서 표현한 문장만큼 더 적절하게 비유할 수 있는 말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번역이란 햇빛이 들도록 창문을 여는 것이고, 알맹이를 먹기 위해 껍질을 까는 것이며, 지성소를 들여다 보기 위해 휘장을 여는 것이며, 야곱이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우물가의 돌을 들어내 치워야 하듯이 사람들이 샘물을 길러 올릴 수 있도록 우물 덮개를 여는 것과 같다.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일상 언어로 된 번역이 없다면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은 마치 샘이 깊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두레박이나 다른 떠올릴 수단이 없어 마냥 서 있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1]
이 글을 읽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젊었을 때부터, 그저 편안하고 쉽게 살아가는 삶이 최고의 인생이라는 신념을 확고하게 줄곧 견지해 왔다. 그리하여, 나는 다들 알다시피 활력이 넘치고, 또 때론, 심지어 분격하기도 하는, 긴장의 연속인 직업에 속하고 있긴 해도 그런 격렬함으로 인해서 나의 평화가 깨뜨려지는 경우를 겪어보지 않았다. 나는 어려운 배심원 재판을 맡거나, 대중의 찬사를 불러 일으킨 적이 없는 그런 야심 없는 변호사 부류에 속하고, 더욱이 아늑한 휴양지같이 차분하고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돈 많은 부자들의 채권, 담보증권, 부동산 매매 업무를 주로 맡으며 안정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나를 아주 안전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79쪽)
“내가 어쩌다 이 필경사를 만나서 겪은 이런 고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 예정되어 있었으며, 바틀비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른 어떤 신비한 목적-따라서 나 같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일개 미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지만-을 띠고 내게 배치되었을 거라는 이론이 설득력 있게 조금씩 와 닿기 시작했다.” -(160쪽)
“마침내 나는 이것을 보고, 이것을 느끼는 거다. 바로 내 삶의 예정된 목적을 이제 꿰뚫어보게 된 것 바로 이것 말이다. At least I see it, I feel it; I penetrate to the predestinated purpose of my life.” -(160쪽)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글쎄다. 나는 그저 신성한 강제명령-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말씀을 상기했을 뿐이다. 그렇다. 나를 구해 준 것은 아담의 자손인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이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고차원적인 해석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선은 불확실성이 따르는 미래의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낙관주의보다 비관주의에 따라야 하고 또 미리 조심하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인 ‘삶의 지혜의 원칙’과 ‘보수성의 원칙’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뛰어난 안전장치가 된다. 사람들은 질투심 때문에, 또한 노여움 때문에, 또한 증오 때문에, 또한 이기심 때문에, 또한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 때문에 살인죄를 저질러왔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극악무도한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다.” -(158쪽)
“바틀비의 기이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좋게 해석함으로써 애써 간과해 버리거나 무심코 넘겨버린 것, 감옥의 간수나 사식업자들까지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한 행동에 기대었던 모든 임시적인 조치들은 전부 실패한 것으로 결론난다.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긴급 구호 물자마저 “수신자 불명 우편물 처리소”로 귀결되는 현실을 보면서 모든 ‘임시적 구제조치’들은 바라는 대로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인간 세상에서 임시방편은 한계가 크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사회의 문제점을 언제 깨닫게 되었는가? ‘수신자 불명 우편물’처럼,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 They were too late.-만시지탄-이것이 우리 인간사의 고통이고 현실이다. 이런 인간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사회의 문제점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하며 상황개선론을 주장한다.”-(197쪽)
본문 속의 한 문장소개
“아, 바틀비! 아, 인간이여!
Ah, Bartleby! Ah, humanity!”
(각주. 아포스트로피 apostrophe 수사적 표현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아포스트로피 수사적 표현은 거론된 사람(바틀비)은 이제 죽고 없다. 여기에 현재 없는 사람을 두고서 한 말을 쓸 때 사용된다. 아아, 비록 그는 갔지만, 인간의 삶은 죽고 나서 깨닫는 것! 만시지탄. 사람의 일은 항상 일이 지나고 나야 알 수 있다는 것. 모멘토 모리 Memento mori “뒤돌아 보아라! 당신도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라! Look behind you! Remember that you are but a man!"
보편적인 인간성(common humanity). “Humanity”의 뜻은 인간다움, 인간성, 인간본성 등 다양하다. 인류(humankind) 인간종족(human species) 인간족속(human race) 인간(mankind) 사람(man) 개인들(individuals) 등으로 상호 교환되는 단어이다. 조지 엘리어트 Eliot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강조하는 인류애, 박애주의, 인도주의를 강조한 “휴머니즘 종교(religion of humanity)”의 열렬한 지지자이었다. 인간이 신이라 부른 모든 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필요성과 욕망이 만들어낸 이념적 산물 즉 인간은 자기 형상대로 신을 창조하였는데, 최고의 법칙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고, 사랑이 인간을 결합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인간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타인에 대한 사랑, 이해, 동정심, 희생을 강조했다.)
[1] “Translation it is that openeth the window, to let in the light; that breaketh the shell, that we may eat the kernel; that putteth aside the curtain, that we may look into the most Holy place; that removeth the cover of the well, that we may come by the water, even as Jacob rolled away the stone from the mouth of the well, by which means the flocks of Laban were watered [Gen 29:10]. Indeed without translation into the vulgar tongue, the unlearned are but like children at Jacob's well (which is deep) [John 4:11] without a bucket or something to draw with.” Translators to the Reader, Preface to the King James Version 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