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8
나는 내 돈을 꺼내려고 본능적으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오늘이 선거일[1]이라는 것이 기억났다.[2][3] 내가 엿들은 말은 바틀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시장직에 출마한 어떤 후보가 당선되느냐 아니면 낙선하냐에 관한 것이었다. 내 마음이 긴장된 상태에서, 나는 말하자면, 브로드웨이에 모인 사람 모두가 나처럼 흥분해서, 나와 똑 같은 문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하고 있는 줄로 혼자 상상한 것이다. 길거리의 소요 사태[4] 때문에 내 정신이 잠시 깜빡 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이걸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며, 나는 가던 길을 마저 갔다.[5]
나는 의도적으로,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출근했다. 현관 앞에 도착해서 잠시 동안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그는 당연히 떠났을 테지. 나는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옳거니, 내 일처리 방식이 훌륭하게 효과를 나타낸 거구나. 그가 정말 사라진 것이 틀림없어. 하지만 뭔가 우울한 기분이 함께 뒤섞여 일어났다. 내가 거둔 빛나는 성공에 괜시리 미안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틀비가 나를 위해 남겨두기로 했던 열쇠를 찾으려고 사무실 문 앞 깔개 아래로 손을 넣어 더듬다가, 실수로 내 무릎이 문짝에 부딪히는 바람에 마치 사람을 부르는 듯 노크 소리가 났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내가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바로 바틀비였다.
나는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그 때 나는 오래 전 버지니아 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여름 날 오후에 번개에 맞아, 담뱃대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죽은 바로 그 남자처럼 한 순간 빳빳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아늑하고 열려진 자기집 창가에서 사망했는데, 그 꿈결 같은 아름다운 오후에 창 밖으로 몸을 구부린 상태 그대로인 채 있다가, 누군가가 건드리자 푹 쓰러졌다고 한다.[6]
“아직 안 갔어!” 한참 만에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불가해한 필경사가 나를 지배하고 있고, 또한 내가 갖은 몸부림과 안달을 다해도, 완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불가사의한 권위에 이번에도 복종하면서,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길거리로 나왔고, 그러다 근처 구역을 걸어 돌면서, 이렇게 황당하게 전례없는 일을 당해서 이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 궁리해 보았다. 내가 물리적인 완력을 행사해서 그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었고, 심한 욕을 해서 그를 몰아내는 방법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으며, 경찰을 부르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발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게서 일말의 작은 승리라도 거두게 내버려 두는 것-이것 또한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아니,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면, 내가 이 문제에서 예측가정할 수 있는 것이 더는 없을까?[7] 그래, 이전에 내가 미래를 내다보며 바틀비가 떠날 거라고 가정했듯이, 이제 과거를 돌아보며 그가 이미 떠났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가정을 논리적으로 적용하면, 황급히 사무실에 뛰어들어가 바틀비가 마치 공기인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 척하면서,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일견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정의 원칙’을 적용한다면 바틀비가 버텨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8]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계획이 성공할지는 좀 미심쩍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를 상대로 원점에서 철저히 재검토하기로 다짐했다.
“바틀비,”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며, 차분하면서도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심히 불쾌하다. 바틀비,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다. 난 그래도 널 좋게 보았는데. 난 네가 신사다운 됨됨이를 지니고 있어서, 어떤 미묘한 곤경에 처해 있어도 약간의 암시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정의 원칙’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내가 기만당한 느낌이야.” 내가 진정 놀란 표정으로, 내가 전날 저녁에 놓아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돈을 가리키면서, 다음 말을 덧붙였다. “아니, 넌 아직 그 돈에 손도 대지 않았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떠날 테야, 아니면 안 떠날 테야?” 내가 여기서 불끈 화를 내며,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다그쳤다.
“난 변호사님을 안 떠나고 싶습니다.” 그가 “안”이라는 그 단어에 부드러운 강세를 넣으며 대답했다.
“네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여기 머물겠다는 거냐? 임대료라도 내냐? 내 세금이라도 부담하냐? 아니면 이 빌딩이 네것인가?”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젠 필사할 준비가 되어 있고 지금 필사를 하겠니? 눈은 다 회복됐냐? 오늘 오전에 간단한 문서 하나를 필사해 줄 수 있니? 아니면 몇 줄 정도 검토하는 걸 돕겠니? 아니면 우체국에 잠깐 다녀오겠어? 한 마디로, 네가 이 건물에서 떠나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그럴듯한 구실이 될 만한 어떤 일이라도 하겠니?”
그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은둔처[9]로 물러났다.
나는 그때 신경질적으로 화가 치민 상태이었으므로 당장 더 이상의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바틀비와 나 둘 밖에 없었다. 나는 비운에 간 아담스 그리고 이보다 더욱 불운한 [10] 콜트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단둘이 있을 때 일어난 비극이 기억났다.[11] [12] 콜트가 아담스에 의해서 몹시 격분해진 상태에서, 경솔하게도 자신도 걷잡을 수 없게 더욱 흥분하는 바람에,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살인 행위-분명히 누구보다도 행위자 자신이 가장 후회했을 행위-로 치닫고 말았는지 콜트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13] [14] 종종 그 사건을 음미해 볼 때마다, 그런 말다툼이 공공의 길거리에서나, 또는 개인 집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사건의 결말처럼 그런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5] 건물 위층에 가족들이 주거하는 것을 내버려둠에 따라 매우 불결해진 건물에 외딴 사무실- 카펫도 깔리지 않은 사무실에, 그러니 먼지 날리는 것이 뻔할 테고, 외양은 남루하다 싶은-에 둘만 남아 있는 정황-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 비운의 콜트가 급성 공황발작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음이 틀림없었을 것 같다.[16][17]
그러나 구약의 아담 시대부터 있어온 인간의 원초적인 분노 감정이 내게도 치밀어 올라 바틀비를 해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나는 그 원초적 분노라는 놈과 맞서 싸우고 그 놈을 내동댕이쳐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글쎄다. 나는 그저 신성한 강제명령-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를 사랑하라”[18]는 신약의 말씀을 상기했을 뿐이다. 그렇다. 나를 구해 준 것은 아담의 자손인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이었다.[19]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고차원적인 해석들은 차치하고서라도,[20] 자선은 불확실성이 따르는 미래의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낙관주의보다 비관주의에 따라야 하고 또 미리 조심하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인 ‘삶의 지혜의 원칙’[21]과 ‘보수성의 원칙’[22]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뛰어난 안전장치가 된다. 사람들은 질투심 때문에, 또한 노여움 때문에, 또한 증오 때문에, 또한 이기심 때문에, 또한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 때문에 살인죄를 저질러왔다.[23]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극악무도한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고상한 동기[24]를 찾을 수 없다면,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모든 인간은, 특히 성질 급한 사람은 사랑과 박애정신을 바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답을 찾아야 할 당면 현안에 대해서, 나는 그 필경사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에 대한 나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불쌍한 사람, 불쌍한 사람이야! 하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으니, 그가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너무 개의치 말자.
나는 또한 바로 일에 매달리려고 애썼고, 이러면서 동시에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힘썼다. 나는 오전 시간 중 바틀비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자기 형편에 잘 맞는 때에 자신의 은둔처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정해진 행진대열에 참여하리라는 상상을 애써 해보았다.[25]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열두시 반이 되자, 터키가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며, 잉크병을 뒤엎고, 여느 때처럼 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니퍼즈는 차츰차츰 조용해지고 정중해졌다. 진저넛은 점심대용으로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바틀비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막힌 벽을 바라보며 깊은 공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런 것을 누가 믿어줄까? 내가 이것을 인정해야만 할까?[26] 그날 오후 내가 그에게 더 이상 말 한 마디도 않고서 내 사무실에서 나왔다는 이것 말이다.
이렇게 또 며칠이 지나갔고, 그 사이에 한가한 틈을 이용해서, “에드워즈의 ‘자유 의지’에 관한 고찰”과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에 관한 고찰”이란 책을 틈틈이 들여다 보았다.[27]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러한 책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28] 내가 어쩌다 이 필경사를 만나서 겪은 이런 고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 예정되어 있었으며, 바틀비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른 어떤 신비한 목적- 따라서 나 같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일개 미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지만-을 띠고 내게 배치되었을 거라는 이론이 설득력있게 조금씩 와닿기 시작했다.[29] ‘바틀비, 칸막이 뒤 거기에 그대로 있어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더 이상 널 박해하지 않으련다. 넌 이런 낡은 의자들 중 하나처럼 해도 안끼치고 시끄럽게 굴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큼 내가 그렇게 사적인 느낌이 든 적이 없다.[30] 마침내 나는 이것을 보고, 이것을 느끼는 거다. 바로 내 삶의 예정된 목적을 이제 꿰뚫어보게 된 것 바로 이것 말이다. 나는 만족해. 다른 사람들은 좀더 고상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바틀비, 이 세상에서 나의 임무는 네가 머물러 있고 싶은 대로 그 필요한 기간 동안 네게 사무실 방 한 칸을 제공하는 것이다.’
[1] ‘선거(election)’의 의미는 정치적 대표자를 뽑는 공적 영역에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선택(election)’의 효과는 중요하다. ‘election’은 법률 용어로는 ‘선택(choice)’의 뜻을 갖고 있는데, election은 형평법에서뿐만 아니라 보통법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계약법에서도 어느 것을 ‘선택(election)’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보통법에서의 election은 형평법과는 달리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은 선택할 수 없고 그에 따라 권리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선택권의 행사는 매우 중요하다.
[2]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물건을 팔았는데 잔금을 받지 못한 경우, 계약을 취소하면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가 없다. 그런데 취소와 무효의 법률효과는 다르다. 계약이 무효이면 소유권이 매도자에게 되돌아오고 그 당연한 결과로 물건값은 그대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취소하게 되면 법률관계가 달라지고, 잔금만큼 물건으로 되받거나, 아니면 손해배상을 소구할 수 있다. 손해배상 소송을 선택하게 되면 이 때부터는 자기 물건이라고 되가져갈 수가 없고 만약 가져갈 경우 도둑으로 취급 받을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선택한 그 때부턴 물건의 소유권이 매수인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순간의 선택으로 법률 관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륙법에서는 물건값을 다 받지 못해서 손해배상을 추구하더라도 동시에 물건을 되가져갈 수도 있다. 대륙법에서는 상계의 개념이 우월하기 때문에 잔금을 다 받지 못한 경우에는 그와 동시에 권리를 추구할 수 있다. 예컨대 물건 판매대금 중 잔금이 밀려 있으면 물건을 다시 강제로 찾아오고 다시 손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상계가 원칙적으로 허용되므로 소유권으로 인한 불법 여부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미법에서는 상계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므로 해결의 관점 또한 크게 달라진다.)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 국가에서는 꿩 먹고 알 먹고식의 일석이조의 개념이 우월한 것 같다. 하지만 “꿩 먹고 나면 알은 먹을 수 없다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는 결론은 자명하고, 이같이 상호 배타적인 성질의 것은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릴 수 없음(trade-off 관계에 있다)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중요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지 못한 우리나라의 법문화인 것 같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문제에서도 토마스 페인의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서는 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trade-off 관계’와 ‘선택’에 대한 개념은 정확히 이해되어야 하고 또 강조되어야 한다.
[3] ‘trade-off 관계’와 ‘선택’에 대한 개념은 대학교‘경제학’ 교과서(“맨큐의 경제학”, “새뮤엘슨의 경제학”)에서 경제학의 기초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참조하라. 영미법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권리 자체도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영미인들이 정치적 선거에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자유 의지의 철학적 인식뿐만 아니라, ‘선택’의 중요성에 대한 문제를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통하여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참고로 요즈음 미국에서 투표율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영미인이 아닌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난 사실에 있기도 하다.
[4] 1849년 아스토르 길 거리에서 10,000명 이상의 군중이 모인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1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1850년 재단사의 쟁의가 발생하였고, 1851년 철도노동자의 파업 사태가 일어났고, 1852년 인쇄공 노조가 결성되었다.
[5] “very thankful that the uproar of the street screened my momentary absent-mindedness”-이 문장에서 “screen”의 뜻은 “은폐”의 의미가 아니라 마치 의사가 전염병이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때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 줄 때의 스크린 의미를 말한다. 의사의 체크, 스크린은 환자가 병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해주는 행동을 가르키는데 이는 좋은 의미를 갖는다. 스크린은 은폐를 의미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의사가 진단할 때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똑같은 사건에서도 수용자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의미는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6] 산업혁명의 급격한 진행으로 삽이나 파이프 라인 등의 쇠붙이에 번개가 닿아 사고사를 당한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사망 확인서에 사망원인(cause of death)으로써 번개(lightning)에 의한 사고사가 처음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때는 1852년이었다. 당시 산업 재해 사고가 크게 늘어나 보험 약관의 해석 문제로 법적 분쟁이 증가하였다. 화재 보험 약관에 따라 “화재에 의해서(by fire)” 사고가 발생하였는지 사고원인을 둘러싸고 보험금 지급 분쟁이 많이 일어났다. 화재 보험 약관에 대한 법률 해석에 대해서 III부 8장을 참조하라.
[7] 구제 조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면 가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전제나 가정은 어떤 결론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제로부터 결론을 잘못 도출하는 논리적 오류-난 세퀴터(non sequitur)-를 범하는 경우 즉 전제와는 전혀 무관한 결론을 꺼낸다든가 또는 원인과 결과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무리한 연관을 이끌어 낼 때는 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가 없다.
[8] 그런 식으로 ‘가정의 원칙(doctrine of assumptions)’을 적용하면 불합리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바틀비가 분명히 앉아 있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그가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황당한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법인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데 법은 법인을 사람인양 똑 같은 것으로 가정하고 의제 (legal fiction)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의 원리는 불합리한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존재한다. “난 세퀴타”의 오류처럼 말이다. 화자인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밀린 임금을 정산해서 주고 거기에다 20달러를 더 보태주면 거금에 해당하니 그가 냉큼 받을 줄로 가정했고 그에 따라 돈을 주었는데 바틀비는 그 돈에 손도 안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자 자신의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돈이면 다 통할 줄로 알고 가정했는데 그건 자신의 주관적인 확신에 따른 가정일 뿐 상대방의 가정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9] Hermitage, retreat은 은신처, 은둔처, 요양원, 수용소, 보호소, 수도원으로 상호 대체될 수 있는 말인데 이들 단어들을 좀더 세분한다면 자신의 ‘자유 의지’의 존재 여부에 따라서 이 말들이 나타내는 상황과 의미를 구별할 수 있다.
[10] 콜트는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끝냈기 때문에 더욱 불운한 사람으로 말한 것 같다. 즉 사고사로 죽은 아담스보다 자살을 택한 콜트가 더욱 비운했다고 보는 것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배격한다.
[11] 아담스는 인쇄업자 즉 언론계에 종사하였고, 콜트는 사업가이었다. 사건당사자들의 배경으로 살인 사건은 장안의 큰 화제거리였다. 주요신문들도 크게 취급했다. 콜트의 형은 총기제조 사업가로 부자이어서 유능한 변호사들로 변론단을 구성하고 과실치사, 정당 방위, 정신이상에 무죄 등으로 정상 참작의 변론을 펼쳤다. 하지만 배심원에 의해서 살인죄로 평결 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12] 범죄자로 처벌되기 위해서는 범죄 의도가 입증되어야 한다. 형법상 가장 기초적인 구성요건은 범죄 행위와 범죄의사가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 즉 범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위법 행위(guilty act)’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범죄 행위가 일어났을 때 범죄 의사 즉 ‘범행을 일으킬 마음의 상태가 존재 (guilty mind)’했음을 동시에 입증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검찰은 피고인이 범죄를 충분히 일으킬만한 범죄 동기와 범행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밝혀내야 할 임무가 있다.
[13] 당시 신문 기사와 여론은 콜트의 살인사건을 백만장자의 도덕파탄에 의한 파렴치범으로 몰고 갔다. 화자인 변호사는 그러한 여론 재판의 인식과는 달리 the murder as a "misfortunate accident(우발적인 사고)"라고 여기고, 피고인 콜트에 약간의 동정을 보이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III부 10장 글을 참조하라.
[14] 정신이상에 의한 무죄항변 기준 믹노텐 원칙(M'Naghten rule)에 대한 설명 III부 10장 글을 참조하라. 정신이상의 무죄 판단은 판사의 재량적 판단 discretion 영역에 속한다. 판사의 재량적 판단에 따라 살인범으로 사형이 선고될 수 있고, 아니면 무기징역으로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법은 때로는 ‘사회의 선호’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배심원단 평결도 결국은 그 당시 공동체의 선호도에 따른 것이 아닌가?
[15] 완전히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사적 공간인 ‘집’에서 또는 완전하게 공적 공간인 ‘길거리’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하였다면 그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화자의 추측이다. 즉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화자의 의견인데 현대 사회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서로 연접되어 있지만 그 연관관계와 접점이 불분명하고 혼합되어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Wall(사적 공간)+Street(공적 공간)의 월 스트리트의 의미에 대해서 III부 8장의 설명을 참조하라.
[16] “domestic associations” 이 표현은 가정도 각자 독립된 한 사람과 다른 또 한 사람이 서로 결합된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동양적인 부부일심동체라든가 대리인의 모형이 아니라 가정도 각자 독립된 두 별개의 인격체가 서로 독립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결합체’의 구조로써 인식한다.
[17] 화자인 변호사가 범인에게 동정하는 시각을 가진 이유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환경에 구속 받아 자신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믹노텐 룰”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불법성을 분간해 내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 인식 능력이 결핍된 경우 즉 이러한 경우는 이성적 판단 능력이 상실되었고 또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자제할 수 없는 ‘정신적 충동 상태’(Irresistible Impulse)가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러한 정신적 질환의 결과 사람의 자유 의사에 의한 결정 능력이 상실된 경우에는 형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책임론을 수긍하였기 때문이리라.
[18]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ment I give to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even as I have loved you, that you also love one another.” (요한복음 13:34).
[19] 황금률(Golden Rule), 상호주의(reciprocity) 윤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III부 3장을 참조하라.
[20] 사랑(charity)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선에 대한 해석 III부 5-6장을 참조하라.
[21] 자선은 “세상 지혜 원칙 wise principle”에 따라서도 행하는 것이 옳다. 세상 지혜의 원칙은 십계명 같은 절대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지혜의 말씀을 모아놓은 잠언이나 격언 정도에 해당하는 유용한 삶의 원칙이다. 칸트의 철학으로는 ‘가언명령’에 해당된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III부 3장을 참조하라.
[22] “신중의 원칙” 또는 “보수성(Prudence)의 원칙”에 대해서는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6부1편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보수성의 원칙은 변호사가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III부 5장을 참조하라.
[23] 7대 악(Seven deadly sins): ①색욕(Lust) ②식탐(Gluttony) ③탐욕(Greed) ④나태(Sloth) ⑤분노(Wrath) ⑥시기(Envy) ⑦교만(Pride).
[24] 동기(motive)는 to induce a certain action(어떤 행동을 낳은 원천)을 말한다. III부8장 설명을 참조하라.
[25] 인간이 공동체 사회를 이룬 법적 기초는 동의 consent에서 나온다. 홉스, 존 로크, 사회계약론자, 존 롤즈 “정의론”을 참조하라.
[26] 사람이 충격적 사건을 접할 때 나타나는 태도에 대해 Kübler-Ross의 5단계 이론은 ① 부정과 고립(denial and isolation) ② 분노(anger) ③ 타협(bargaining) ④ 우울(depression) ⑤ 수용(acceptance)의 5단계 stages로나타난다.
[27] 여기서 “Edwards on the Will,” and “Priestley on Necessity.”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중인유법 Double Allusion이 쓰였다. 따라서 “자유 의지”에 관한 에드워즈의 생각이 무엇인지와 “필연주의 상황결정론”에 관한 프리스틀리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 (1703-53는) 미국의 신학자로 ‘자유 의지’에 관한 저서를, 프리스틀리 (1733-1804)는 영국의 신학자로 ‘필연주의 철학’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28] ‘필연성(necessity)’이란 어떤 ‘결정(determination)’을 내릴 때 반드시 꼭 ‘필요한(necessary)’ 것을 이르는 개념이다. 결정은 인간의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념과 연결된다.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의 입장은 모든 인간은 완전한 자유 의지를 갖고 있는데 이 자유 의지의 행사는 외부적인 속박이 없는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본다. 필연주의 철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III부 1장을 참조하라.
[29] 근대 사회는 각자의 동의(consent)에 기초하므로 설득(persuasion)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30] 갈릴레오는 상대성의 운동 역학과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뉴튼의 작용-반작용의 법칙 (“모든 작용에 대하여, 그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항상 존재한다.”)으로 이어졌다. 수학의 황금비를 보면 자연은 연접한 ‘상대방’이 존재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황금비를 이루는 피보나치의 수열을 보라. 수열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이 수열은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하는데 서로 이웃하는 두 수의 합을 구하면 바로 다음 항이 되는 수열이다. 피보나치 수열은 황금비를 만들어낸다. 2/1 3/2 5/3 8/5…을 계속 계산하면 1.618…이란 황금비에 수렴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항상 조건에 대한 최적의 해를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physical reality itself is mathematical.” “Two pairs of opposite attitudes toward the problem of explaining th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