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주의와 아담 스미스의 공감 개념
1. 필연주의와 아담 스미스의 공감 개념
아담 스미스의 공감 개념
사람은 누구나 정념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대신 경험할 수 없고, 다만 타인의 행위와 상황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타인의 감정을 상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으로부터 나의 감정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자 감정으로써, 인간은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하기에 공감은 일종의 능력(faculty)이며 인간의 본성에 속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 공감은 인간이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감정에 대해 느끼게 되는 감정으로써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갖는 연민, 동정심과 동의어이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1장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들이 존재한다. 인간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 밖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하는 그런 원리들 말이다.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또는 그것이 아주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나 동정심이나 감정이 이런 원리들에 속한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목격하고 슬픔을 느끼게 되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감정은 비록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본성의 다른 원초적 감정과 마찬가지로 꼭 착하고 배려심 높은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1]
인간 본성에는 자기애(self-love)와 자기 이익 추구(self-interest)의 경향이 들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타인들의 삶에 대한 본원적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관계적인 감정[2]을 갖고 있다.
반대자와의 공존이 필요한 이유
필연주의 경험철학론에서 ‘Necessity’이란 말의 의미는 다른 것과의 밀접한 관계(connection) 즉 ‘연결 고리’를 강조한다. 세상은 다른 것들과 서로 연결 고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발적인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으며 모든 사건에는 그 원인이 있는 즉 ‘필연적’인 것으로 본다. 각 부분은 ‘상호 의존’하는데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어떤 연결 고리가 하나라도 빠지게되면 안되기 때문에 서로가 꼭 ‘필요한(necessary)’ 부분이 된다. 여기서 ‘필연’이라는 말은 철학 용어로 순수 이성, 선험적인 가정, rational, pure, a priori 등과 동의어가 된다.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는 인간 사회에서 악과 고통의 존재를 수긍하는 사고체계이다.[3] 악의 존재는 전체적으로 볼 때 단지 미미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고 또 악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인간 발전을 위한 신적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악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악을 실행해도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악은 선의 반대편에 있지만 선의 실현을 위해서 존재한다. “선악개오사”란 우리나라 속담과 같이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도 모두가 나의 발전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스승이 된다. 인간 세상의 악과 고통은 인류 전체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필요악(necessary evil)’이라는 개념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배가 고파야 밥의 고마움을 알고, 반대자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악이 있기 때문에선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반대자의 존재는 나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어쩌면 고마운 존재라고 볼 수 있다.[4]
홉스의 필연주의 철학에서는 상대방의 존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여기므로 투키디데스가 그러했듯이 적을 전멸해 버리는 싹쓸이 정책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고 대신 유화정책을 쓰는 것이 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1차 대전 후 패전국 독일에게 전쟁배상금을 너무 과도하게 밀어붙인 프랑스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나치 체제의 등장을 불러오게 된 하나의 원인을 제공했던 예가 보여주듯이 전멸 정책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필연주의철학에서 자유 의지와 니세시티 Necessity개념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흔히 자유의 반대말을 ‘부자유’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자유의 개념은 불명확하다. 자유(liberty)의 반대말을 속박이라고 이해하면 보다 명확해 지는 것 같다. 자유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억압당한 상태는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은 토마스 홉스의 자유와 구속의 개념을 이어받고 있다. 홉스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보자.
“자유라는 말의 뜻은, 언어의 적절한 의미작용에서 판단하건대, 외부적인 장애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장애물은 간혹 어떤 사람이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의 일부를 빼앗아 갈 수 있으나, 그의 판단과 이성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서 그에게 남겨진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5]
“자유란 행동을 나타내는데 외부로부터의 아무런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 장애물이란 행위자의 본성에 속하지 않고 또 행위자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내재적인 성질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6]
홉스는 ‘자유’를 ‘외부적 장애물의 부재(absence of external impediments)’의 개념으로 보고 물의 흐름에 비유 설명하였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자유롭게 흐르는데 이것은 물을 막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물은 강둑이 있어서 넘치지 않고 아래로 흘러간다. 물은 거슬려 올라가는 법이 없는데 그것에 대해 우리는 물이 거슬러 올라갈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거슬러 올라갈 힘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장애물은 물의 속성과 같고 또 그것은 내재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7]
이와같은 홉스의 설명은 자유(freedom, the absence of external impediments)와 힘(power, the internal ability to do something)의 개념을 구분하는 것으로 외부적인 제약이 없어서 자신이 원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스런 상태인지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내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느냐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에게 외부적인 또는 내재적인 구속이 존재하느냐의 구별적 인식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 안의 모든 물체와 같이 물리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행동을 하는 존재라고 이해할 때, 어떤 행동을막아서는 장애물이 존재하는 경우 그가 원하는 행동은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부적 속박이 있는 경우 먼저 그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8] 어떤 사람의 손발에 수갑이나 족쇄가 채워진 경우 이 사람은 자유롭게 걸어 나갈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족쇄나 수갑은 외부적인 속박이지 자기 내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손발이 잘려 나간 장애인의 경우에는 걸어 나갈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는데 그건 장애물이 자신의 몸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9]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유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해도 외부적 속박이 있는 곳에는 자유의지를 행사한다고 볼 수 없다. 외부적 강제에 의한 동의는 비록 형식적으로는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한 자발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강압의 결과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10] 복종에 대한 동의가 없으면 결국은 내전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11]
니세시티 Necessity란 무엇인가?
극한 상황과 긴급 조치
‘니세시티(necessity)’는 욕망과 그 결과와 결부되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의 한계상황적인 개념이다.[12]“필경사 바틀비 스토리”에서 “as a last resort, under such peculiar circumstances, it seemed the only plan.”라고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이러한 극한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해결책의 개념을 설명해 준다. 불가피한 긴급 조치는 어떤 “특별한 상황(such peculiar circumstances)”에 처한 가운데, “마지막 수단으로써(as a last resort)”, 그것만이 “유일한 방안(the only plan”이라고 여겨질 때 취해질 수 있다.
법원은 최후의 보루로써 개입하는데 신도 어쩔 수 없는 마지막 극한상황에서 허용되는 니세시티 (necessity: 생존의정당방위가 필요한 긴급피난의 상황)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13]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스스로 문제 해결이 있는 반면 법은 외부적 강제력을 의미하므로 법이 개입되는 순간 인간의 자유의사는 그만큼 구속 받게 되기 때문이다. ① 특별한 상황에 처한 가운데 ② 마지막 수단으로써 ③ 다른 방안이 없고 오로지 그것만이 유일한 방안일 때 비로소 법이 개입되어야 한다.
인간 사회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의 사회적 합의에 따라서 결성되었다면 거기에서 파생한 문제 또한 당사자간에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의 기초는 사람들간의 동의와 합의(consent)에 기초하므로 (국가권력에 대한 동의가 없으면 결국은 내전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압력을 동원한 분쟁의 해결방법은 한계가 노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14]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으로 통상 번역하는데 여기서 ‘필요’는 욕구(desire), 수요(demand)의 의미는 물론이고 또한 그것을 넘어선 어떤 한계상황을 가르킨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누가 밥을 먹을 생각이 나겠으며, 인간 세상에서 어려운 문제가 없다면 어떻게 인간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역설적인 가치를 지닌 말이다. “Difficult situations inspire ingenious solutions.” “위기는 곧 기회”라는 우리 속담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의 생존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necessarily)’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면 인간은 새로운 창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존문제가 결려 있는 막다른 한계상황에 처한 경우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강구하게 되니까 새로운 발명품을 고안해 낼 수 있다는 것인데 인간은 위기를 절실하게 겪어야 변화를 가져 온다는 말이다. 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마지막 순간의 굶주림과 추위와 갈증의 극한 상황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무슨 수단이라도 강구하는 긴급피난과 정당방위의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necessity’의 생존 투쟁의 절박한 상황을 ‘필요’로 번역한다면 어감상 그 강도가 약해지는 감이 있어 ‘니세시티’라는 영어 그대로 써서 새롭게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칼빈주의(Calvinism) 운명예정설과의 차이점
필연주의 결정론에서 ‘우연’(운, chance, fortune)은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우주법칙은 필연적인 법칙대로 움직이므로 ‘우연’이라는 우발적 사건이 일어나기 어렵다. 필연은 우연과 반대되는 말이다. 필연 Necessity이란 말은 “논리적 필연성” 등 각 분야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사전적 정의는 “물리법칙” 즉 “인과론(The doctrine holding that events are inevitably determined by preceding causes)”을 말한다. 우주 만물의 모든 사건은 서로 연결 고리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어떤 사건은 다른 앞선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는 즉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말한다. 필연주의 결정론에서 어떤 사건에 선행하는 원인이 있다는 말은 우주에서 동일한 사건은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주만물은 물리학법칙처럼 원인결과가 분명하게 움직이므로 똑같은 상황이라면 똑같이 일어나기 마련이며 또 반대로 상황을 바꾸지 않는 한 누구든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연주의 경험론은 현실적인 상황을 수긍한다는 면에서 자유의지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와는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15]
“될 성싶은 아이는 떡잎부터 알 수 있다”는 우리 속담이 이에 가까운 표현이다. 여기서 동양의 ‘숙명론’, ‘운명론’과 동의어로써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동양의 ‘운명론’은 미리 정해져 있어서 운명을 바꿀 수가 없다는 체념적인 개념에 가깝지만 필연주의 결정론에서는 적극적인 상황타개론이 전개된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상황개척론을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체념적인 숙명론과는 차이가 난다.
칼빈의 운명예정설 predestination
필연주의 철학은 칼빈의 운명예정설(predestination)과 구별된다. 칼빈주의 예정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정되어 있다는 교리를 말하는데 초자연적인 시련을 통해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주장을 하는 반면 필연주의 결정론은 인과론에 의거하여 죄인은 벌을 받게 마련이지만 영원한 타락으로 단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칼빈주의는 천국 갈 사람과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처벌을 받을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정해지는데 즉 영원한 저주가 존재한다고 여기나 필연주의에서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존재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칼빈은 사형(화형)을 지지했던 반면 필연주의 경험론은 사형제를 반대했다.
프리스틀리는 악마의 존재도 신의 질서 속에 편입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악의 존재는 신의 오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완전한 발전을 이루는 하나의 계획 가운데 존재하며, 악은 소수에 한정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현재의 개신교와 미국인들의 본질적인 신념은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 (humans must consent to their own salvation)’는 ‘자유 의지’를 믿는 것에 있다.[16]
생존 명령 의무 이행과 비자발적인 행위
“바틀비 스토리”에서 바틀비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필사 일을 더 이상하고 싶지 않다며 변호사의 지시와 명령을 거부하게 된다. 지시와 명령을 거부하는데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말 한 마디 밖에 하지 않고 끝내 거부하고 만다. 국가와 사회를 움직이는 기초는 서로간의 합의에 의한 것인데 서로 합의된 계약을 거부한다면 국가와 사회의 작동은 멈추게 될 것이다. 바틀비가 갑자기 평소 해오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그만 두자 변호사는 그럼 다른 일을 하면 어떠냐며 충고와 권유를 하는데, 바틀비는 다른 대안마저 하고 싶지 않다면서 막무가내로 거부하고 만다. 변호사가 다른 직업을 권해보자 바틀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누구 밑에서 단순한 종업원의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I would prefer not to take a clerkship.)” 이에 변호사는 다른 일들을 계속 권해 보는데, 바틀비는 그런 일도 모두 싫다고 대답한다. “난 한 곳에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내가 유별난 것은 아니에요.” 자신은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는 정형화된 대답만 하고 있다. 그러자 일생 동안 신중함과 참을성의 미덕을 제일의 신조로 삼아 온 변호사이었지만 여기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한 곳에 그대로 붙어 있어라. (Stationary you shall be then).” 그 후 바틀비는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 사람은 어떠한 필사도 거절하고, 어떠한 일도 하기를 거부하며, 그저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만 할 뿐이고, 그 건물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어요.”[17]
바틀비는 이 일도 싫다 하고 저 일도 싫다 하며 “하고 싶지 않다 (prefer not to)”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런 바틀비의 ‘선택(preference)’은 바틀비의 ‘자유의지(free will)’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바틀비의 이런 행동은 미리 정해져 있는가? 필연주의 결정론에 따르면 바틀비의 선택은 프로그램화되어 있어서 항상 똑같은 결과를 되풀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록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스스로 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바틀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라고 보일지 모르지만 바틀비의 선택은 미리 입력된 대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므로 바틀비의 선택은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같은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걸까? 에드워즈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의지는 인간이 ‘바라는 대로(will)’‘자유로운 것이 아니라(not free to will)’, ‘비자발적인(involuntary)’ 것이고, 루소의 말로 대답하면, 인간은 쇠사슬에 매여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사슬이 외부적 장식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적인강제력이 없는 것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의 차이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책임성과 사회 책임성
자기 책임성에 대한 근대 이전의 철학적 사고는 “심은 데로 거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응보론(retributative system)이 지배하였고, 이는 인과론과 ‘천벌론’에 맞닿아 있어 생활의 모든 면에서 신(교회)이 지배하였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누릴 수 있다”는 개인 책임성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스스로의 책임과는 무관하게 삶의 불행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공황’이란 피할 수 없는 존재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자기의 노력(hard work)과 자신의 능력(talent)과는 무관하게 생존 수단인 일터를 어쩔 수 없이 잃을 수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이 요구되는 것이고, 여기에 이 사태를 초래한 개인의 ‘마땅한(deserved)’ 응분의 책임 여부(즉 개인 책임이므로 굶어죽어야 한다)를 따질 계제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명제이고 다만 ‘누가’ 대신 그 비용을 감당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와 재산권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고 또 침해해서도 안되는 신성불가침의 자연권에 속한다. 자유와 재산은 삶의 생존이 지속되는 한 갖고 있는 자연권이기에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신성불가침의 권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 있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다할 직장은 신성불가침의 재산권에 속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생존의 바탕이 되는 직장을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잃게 된다면 그것은 누구 책임이고 또 누가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가?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국가가 세금으로 자기 책임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생존을 보호해 주는 체제가 복지 국가(welfare state)이다.
프리스틀리는 누구인가?
필연주의경험 철학의대표적인 인물은 영국의 신학자, 화학자, 정치철학자인 조지프 프리스틀리이었다. 프리스틀리의 “The Doctrine of Philosophical Necessity Illustrated”(1777)에서 펄친 주장을 보자. 인간은 기계적이고 법칙적으로 움직이는 자연 세계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인과론(causation)’에 지배를 받고 있어서 자유의지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인간세계 또한 우주질서 법칙인 인과론이 작동하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동기(motive)가 결과를 낳은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선행하는 연결고리로써 정신을 개조하지 않으면 새로운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다. 인간은 자유로운 사고, 탐구 정신, 의견 교환을 통해서 올바른 지식을 축적시켜 나갈 수 있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프리스틀리는 언어는 다양성이라는 특성에 의해서 발전하는데 언어는 역사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고 여겼고, 따라서 후세 세대에게 역사와 언어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리스틀리는 성경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혁신적인 사회를 열어갈 기초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성경의 언어는 비유법을 많이 쓰고 있으므로 축자적 문자해석에 머무르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프리스틀리는 산업 혁명을 개척한 특출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정치 종교 역사 교육 기술 화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버밍햄 보름달 협회 (The Lunar Society of Birmingham)”
산업혁명을 이끈 증기기관 발명자 제임스 와트,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의 조부이자 뛰어난 의학자이었던 에라스무스 다윈,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프리스틀리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특출난 인물 14인은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에 함께 모여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하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 정치 종교 기술 사업 등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심도깊게 토론하는 사교 모임 단체 “버밍햄 보름달 협회(The Lunar Society of Birmingham)”을 결성하였다. 미국의 국부 중 한명으로 추앙받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여기의 준회원으로 활동하였다. Luna는 라틴어로 달을 뜻한다. 혁명적인 발상과 사고방식을 지녔던 이들 소수 선각자들은 보름달이 뜬 날 학구적인 토론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들은 “과학이나 문화는 공식적인 교육보다는 오히려 대화를 서로 교환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으로써 달빛이 밝은 밤에 이웃들과 모임을 갖는 것이 지식을 습득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여겼다. 루나협회가 갖고 있던 기본적인 인식은 “좋은 삶이란 물질적인 풍요 그 이상의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있는데 최소한 물질적인 풍요가 밑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삶이 불가능하다 (the good life is more than material decency, but the good life must be based on material decency)”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배기득권계층이었던 국교도는 이들을 미친 사람들(미치광이를 영어로 lunatic이라고 부른다) 로 규정하였다. 급기야 프랑스 혁명 발발 2년 후인 1791년 7월14일 이들의 정기회합 때에 난동을 피우고 프리스틀리의 실험실과 교회 등을 불태워버렸다. 이러한 난동의 결과 프리스틀리는 어쩔 수 없이 179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1]“How selfish soever man may be supposed, there are evidently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which interest him in the fortune of others, and render their happiness necessary to him, though he derives nothing from it except the pleasure of seeing it. Of this kind is pity or compassion, the emotion which we feel for the misery of others, when we either see it, or are made to conceive it in a very lively manner. That we often derive sorrow from the sorrow of others, is a matter of fact too obvious to require any instances to prove it; for this sentiment, like all the other original passions of human nature, is by no means confined to the virtuous and humane, though they perhaps may feel it with the most exquisite sensibility.” Smith,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I.I. Ch1. Of Sympathy.
[2] “the chief part of human happiness arises from the consciousness of being beloved.”Smith,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Ch V, Of the selfish Passions.
[3]자연 질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한다. 수학의 황금비를 보면 자연은 연접한 ‘상대방’이 존재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항상 조건에 대한 최적의 해를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physical reality itself is mathematical.” “Two pairs of opposite attitudes toward the problem of explaining th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4]현재의 “인정의 정치학 politics of recognition”과 “분배의 정치학 politics of redistribution”에 대한 개념과 그입장을 참조하라.
[5] “By liberty is understood, according to the proper signification of the word, the absence of external impediments; which impediments may oft take away part of a man's power to do what he would, but cannot hinder him from using the power left him according as his judgment and reason shall dictate to him.” Hobbes, “Leviathan”, Ch 14. (1909 ed).
[6] “Liberty is the absence of all impediments to action, that are not contained in the nature, and in the intrinsic quality of the agent.” 프리스틀리는 홉스의 자유의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Hobbes, “Leviathan”, Ch 21. (1909 ed).
[7] Hobbes, “Leviathan”, Ch 21 (1909 ed).
[8]필연주의 철학에서 세계는 기계가 작동하듯 철칙처럼 움직이므로 똑같은 상황에서는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법칙적으로 작동되는 인간세계에서 기적-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극히 희박하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먼저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인간의 발전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9] Hobbes, “Leviathan”, Ch 21 (1909 ed).
[10]외부적 속박이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저항권’이 인정된다. 홉스와 로크 등 사회계약론자들이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반면 대륙법에서는 개인은 (계약당사자가 아니라) 국가의 객체이므로 저항권의 개념이 부정된다.
[11] “A covenant not to defend myself from force, by force, is always void. For (as I have shown before) no man can transfer or lay down his right to save himself from death, wounds, and imprisonment, the avoiding whereof is the only end of laying down any right; and therefore the promise of not resisting force, in no covenant transferreth any right, nor is obliging.”, Hobbes, “Leviathan”, Ch 14. (1909 ed).
[12]자유이냐 필연이냐의 문제, Necessity(니세시티) 개념은 자유이냐 생존이냐의 질문에서의 ‘생존’이라는 용어에 보다 적합할 것 같다. 사람은 의식주가 충족되지 못하면 한계상황에 이른다. 니세시티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꼭 ‘필요하다’는 의미를 말한다. 종교철학의 예를 들어 보자. 구원 신학에서 큰 논쟁을 불러왔던 칼빈주의 5대강령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보다 쉬울 것이다. 구원을 받는데 믿음과 세례는 필수적인 필요 조건이라고 말할 때 이 필요조건을 니세시티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필요조건을 ‘불가피하다’는 말로 대체하기도 하는데 불가피하다는 말은 공급자(하나님)가 공급하는 어떤 조치(불가항력적인 은혜, 무조건적인 선택, 구원의 선물)들이 불가피하다는 칼빈주의의 입장에서 선호하는 감이 있다.
[13]대륙법국가는 예컨대 조선의 ‘경국대전’과 같이 ‘율령 체계’가 정비된 때를 국가 체제의 완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즉 법을 인간 행위를 이끄는 지도적 위치로 상정하는데 비해 영미법은 ‘사적 자치’의 전통이 우선하고 법의 개입은 “마지막 수단(as a last resort)”으로써 이해한다.
[14]한국에서 어떤 분쟁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당사자간에 문제해결의 노력을 시도하기 보다 무조건 먼저 고소 고발부터 제기하는 법문화적 경향이 존재하는데 이건 옳지 못하다. 고소 고발이 오남용되는 법 제도와 법 문화는 과도한 검찰권이 개입되고 국가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오게 되어 개인의 자기 결정권이 침해되고 그만큼 인간의 자유권을 향유하지 못하게 만든다.
[15]콜린스 영어 사전 정의에 따르면 필연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opposed to libertarian”. “The necessitarian falls back upon the experienced reality of facts.” (The Century Dictionary, The Century Co., New York, 1911). 필연주의 경험 철학은 오늘날의 카네만의 전망이론, 뇌신경학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이 왜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대항한 진보파에 속하는지 그 배경(철학체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6]“19세기 개신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반칼빈주의 신념으로 돌아섰다. 이는 미국인들의 매우 본질적인 신념이다. But in the 19th century, Protestantism moved toward the non-Calvinist belief that humans must consent to their own salvation — an optimistic, quintessentially American belief.”
[17]건물 퇴거 조치에 대한 법이론은 재산권에 기초하고 있다. 변호사의 재산권 논리는 자유지상주의자 노직이 잘 설명하고 있음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