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
문무대왕
2025. 4. 14. 12:04
7. 투후 상구성
1.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
商丘成(상구성)이 秺侯(투후)에 봉해진 기사는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나타난다.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二千一百二十戶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한다.
시호성명 | 제후 봉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 | 봉읍지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한다.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찌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겠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제음현 |
이와 같이, 여태자의 무고의 반란을 진압 타도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은 상구성과 마통 그리고 경건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봉작 사실을 적고 있는 한서의 사서 기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무제소제선제원제성제 공신표》
시호성명 | 제후 후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 | 봉읍지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 대홍려 직위에 있던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하고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했다.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옮겨 떨어져 있으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으리요”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제음현 |
중합후 마통 | 시랑의 직위를 맡고 있는 마통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자들을 추격하여 반란세력 주동자인 여후를 잡은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을 수여받았고, 그 봉읍의 호수는 4천8백7십호수에 달했다. 。 | 같은 날 7월 계사일에 제후 작위에 봉했고, 2년 후 정화4년 도위 궤 등과 모의하여 군사 반란을 기도한 죄로 후작이 취소되고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 발해 |
덕후 경건 |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마통을 따라서 여후를 함께 체포하고 반란세력의 주요인물인 태자소부 석덕을 체포한 공로로 덕후에 봉해졌고, 봉읍의 호수는 3천7백35호에 달했다. | 7월 계사일에 제후 봉읍 작위가 수여되었고, 2년 후 정화4년 마통과 함께 반란을 공모하고 기도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 제남 |
號諡姓名 | 功狀戶數 | 始封 | 子 | 孫 | 曾孫 | 玄孫 |
秺侯商丘成 |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二千一百二十戶 | 延和二年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為詹事侍祠孝文廟 醉歌堂下曰 出居 安能鬱鬱 大不敬 自殺 | 濟陰 | |||
重合侯莽通 | 以侍郎發兵擊反者如侯 侯 四千八百七十戶 | 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發兵與衛尉潰等謀反 要斬 | 勃海 | |||
德侯景建 | 以長安大夫從莽通共殺如侯 得少傅石德 侯 三千七百三十五戶 | 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共莽通謀反 要斬 | 濟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