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지화(巫蠱之禍)
12. 무고지화
무고(巫蠱)의 뜻
무고(巫蠱)는 무술사(巫師)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저주와 해를 입히는 행위를 말한다. 蠱(고)의 한자 고어체는 인데 글자모양처럼 벌레 먹은 것 즉 고독무술(蠱毒巫術, poisonous magic)을 의미한다. 증거를 날조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헐뜯는 무고(巫蠱)는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서의 “吊 戾園 于 湖邑 諒遭世之巫蠱”(조려원어호읍 량조세지무고) 구절 표현처럼 BC 91년에 일어난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 사건을 가르키기도 하다.
반악의 서정부 무고지화 구절
반악 서정부 구절 | 문선 이선 주 |
弔戾園於湖邑 諒遭世之巫蠱 探隱伏於難明 委讒賊之趙虜 加顯戮於儲貳 絕肌膚而不顧 作歸來之悲臺 徒望思其何補 | 〈漢書曰:戾太子據與江充有隙。會巫蠱事起,充遂至太子宮,掘得桐木人。太子無以自明,乃斬江充。與丞相劉屈氂戰,兵敗,東至湖邑,自縊而死。車千秋訟太子冤。上憐太子無辜,乃作思子宮,為歸來望思之臺於湖。宣帝即位,謚曰戾,以湖邑閿鄉為戾園。又太子罵充曰:趙虜乃亂吾父子也。蒼頡篇曰:委,任也。尚書,王曰:弗迪有顯戮。漢書,疏廣曰:太子,國儲副君。宋均元命苞注曰:儲君,副主。言設以待之。王命論曰:高四皓之名,刻肌膚之愛。幽通賦曰:雖覆醢其何補?〉 |
호현에 위치한 여태자 능원을 조문하노니 무고지화의 여태자 반란 사건 그 때가 생각난다.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기란 무척 어렵다. 참소한 적이 있는 조나라의 포로 출신을 고관으로 임명해줬더니, 부자지간을 이간질시키고 황태자를 사형에 처해서 핏줄의 정마저 영영 끊으려고 하는가? 죽은 영혼이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슬픔의 망대를 짓고, 걸으며 지나간 과거를 사모해 본들 어찌 한번 죽은 목숨이 되살아난다는 것일까? |
한무제 때의 무고지화 반란에 대한 설명에 앞서 권력암투의 생생한 예시로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기묘사화를 조선왕조실록 기사로 인용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묘사화와 走肖爲王(주초위왕)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년) 기묘년에 일어난 권력 투쟁 사화(士禍)이다. 사림파 조광조(趙光祖),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이 사약의 극형을 당했고,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입었다. 기묘사화의 상징적 사건은 “走肖爲王”(주초위왕)이었다. “走肖”(주초)는 “趙”(조)의 파자(走+肖= 趙)에 해당하고 따라서 주초위왕은 “趙爲王”(조위왕) 즉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에 오른다’는 숨어 있는 의도가 들어 있는 문구이라는 것이다. 나뭇잎에 단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적은 뒤, 이 부분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어 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동산 냇물에 흘려 내리면 왕이 그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곧 해당자들을 처벌하게 될 것을 기도한 권력 투쟁 음모론이다. 남곤은 조광조 등에게 앙심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일 음모를 기도하였다. 이에 나뭇잎의 단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모와서 나뭇잎에 쓴 “走肖爲王”(주초위왕) 글자 부분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무제의 무고지화 난리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기도하였다. 선조실록에 실린 이 기묘사화 권력투쟁 음모론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은 국편위 번역을 여기에 카피해 온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109021_002
《선조실록》 선조 1년(1568) 9월 21일(양력 10월 11일) 정묘 2번째 기사
當初袞求交於趙光祖等 光祖等不許 袞積憾 欲殺光祖等 求得木葉上食甘之蟲 以蜜多書走肖爲王四字於木葉上 放蟲而使之食 如漢 公孫病已之事 有若天成者然 袞家在白岳山下景福宮後 自其家泛水 而流送於闕內御溝 使中廟見而大驚 因告變以成其禍 中廟實錄或爲遺漏 故於此略爲載錄 |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 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
*주: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 병이는 무제(武帝)의 증손인 선제(宣帝)의 어릴 때 이름. 그가 태어난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무고사건(巫蠱事件)이 일어나 그의 조부 여태자(戾太子) 이하 전 가족이 화를 당하고, 병이는 강보에 쌓여 군저옥(郡邸獄)에 수감되었다. 운기(運氣)를 점치는 술사(術士)가 장안(長安) 옥중에 천자기(天子氣)가 있다고 말하니, 무제가 사자(使者)를 보내 무고 사건에 연루된 장안의 모든 죄수를 조사하여 가차없이 다 죽였다. 이 때 병이는 정위감(廷尉監) 병길(邴吉)의 보호를 받아 살아났고 뒤에 곽광(霍光)의 주선으로 소제(昭帝)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한서(漢書)》 권8 선제기(宣帝紀). |
한무제 때의 무고지화(巫蠱之禍)
BC 92년 12월 무고 사건이 발생했다. BC 128년 위자부가 위태자를 낳고 황후에 올랐고, BC 122년 나이 7세의 려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황태자에 올랐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육세양육세한이고 육대를 넘어 칠대가 최전성기에 해당한다. 한무제는 한나라 칠대황제였다. 천하의 한무제도 집권 햇수가 50년을 넘어가고 나이가 들어가니 국정 장악력에 틈이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벌였던 수많은 전쟁에 대한 후유증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쟁이 심화되고 무고한 옥사, 익명 투서, 저주와 무고의 주술 등의 궁중 암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태부의 직위에 있던 승상 공손하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은 군대 보급품을 가로챈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때 위청을 잡았던 경사대협 주안세(朱安世)에 대한 추포 명령이 떨어졌다. 공손하는 주안세를 체포해 속죄하려고 했다. 체포된 주안세는 공손경성과 위황후의 딸인 양석공주가 사통해 무제를 저주하는 무고를 저질렀다고 까발렸다. 이에 한무제가 대노해 춘정월 공손하(公孫賀) 부자를 옥사시켰고, 위황후가 낳은 공주와 조카들까지 연루돼 이들 모두 91년 윤4월 주살됐다. 무고(巫蠱)지화의 난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1] 한편 BC 91년은 사마천의 사기가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무고지화는 조선 중종 때 기묘사회에서 잘 나타나듯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권력투쟁의 한 단면이다. BC 122년 황태자에 오른 여태자이었지만 BC 117년 곽거병이 25세로 급사하였고, BC 106년 위청이 병으로 죽은 이후, BC 97년 유박이 창읍왕(昌邑王)에 봉해지는 등 누가 한무제의 자리를 물려받을지 알 수 없는 혼돈의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궁중에 저주의 굿판과 무고의 독기(蠱氣)가 서려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한무제는 엄격한 충성파 측근들인 수형도위 강충(江充), 안도후(按道侯) 한열(韓說), 태감 소문, 어사 장공(章贛) 등을 시켜 엄격한 수사를 지시했다. 강충은 권력 높은 귀척들을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엄격하게 법을 받드는 봉법불아(奉法不阿)의 강직한 신하였다. 한열(韓說)은 韓王信(한왕신)의 증손이고, 조부는 궁고후 한퇴당(韓頹當)이었다.
무고의 증거물들인 파묻어둔 저주의 인형들이 속속 드러나자 려태자는 소부 석덕의 계책을 따라 먼저 선수를 쳐서 강충과 한열 등을 죽여버렸다. 려(戾글자는 포악暴惡하고 죄罪行를 지었다는 뜻이다)태자 이름은 유거(劉據)인데 이름의 글자가 증거(證據)물의 거(據)자이다. 바람 핀 남녀의 상열지사가 불심 검문에 걸려 빼도박지도 못한 증거가 나오면 죄를 지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거나 무고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때처럼 자기의 죄가 들어날 것이 두려워 무고한 상대방을 참소하는 것을 무고죄라고 부른다. 려태자가 애초에 반란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그들을 죽였다는 점이 들어나 사후 복권되긴 하였지만 태자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는 직감(정화2년 한무제가 마음 속으로는 총애하는 구익부인 조첩여가 낳은 어린 막내 아들 여덟살의 유불릉을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했다)이 들어서 반란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2]
여태자가 강충을 다그친 말은 이것이었다: “趙亡虜 亂趙國父子未足邪 今乃亂吾父子” “조나라의 도망자여! 조나라의 국왕과 부자 사이를 이간시키고 난리치더니 그것도 모자라 우리 부자(한무제와 여태자) 사이마저 어지럽히느냐?” 한무제는 여태자가 애초에 반란을 일으킬 이심은 가지지 않았다고 하여 태자가 죽은 곳에 사자궁(思子宫)을 짓고 사후 복권시키기는 했지만, ‘권력이란 부자사이에도 서로 함께 나눌 수 없다’는 말처럼,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대의멸친”(大義滅親)의 법으로써 사형을 당했다. 여태자는 증거가 드러나자 수형도위 강충과 안도후 한열을 죽이고, 황제 조서를 위조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칠월 임오일(양력 9월 1일) 난리를 일으켰다. 무고의 증거가 여태자궁에서 발견되자 궁지에 몰린 위태자는 소부 석덕이 진시황제의 장자 부소가 이사와 조고의 계책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고사를 떠올리며 강충 등을 먼저 칠 것을 권했다. 강충과 한렬은 여태자에 의해서 참수당했지만 환관 소문과 어사 장공은 장안을 탈출하여 한무제가 머루고 있는 감천궁으로 도망쳐서 위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긴급사태를 한무제에게 알렸다. 이에 감천궁에서 피서를 즐기던 한무제는 승상 유굴리에게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유굴리는 삼월 정사일(양력 BC 91년 4월 9일) 탁군(涿郡)태수에서 승상으로 임명되고 팽성후(彭城侯)에 봉해졌다.
태자 반란군은 수도 장안성 내에서 정부군과 시가전을 벌려 5일 동안 장안대전이 벌어지고 쌍방간에 수만명의 살상자가 발생했다. 칠월 십칠일(양력 9월 9일) 반란군이 패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의 빈객 모두와 과거 태자궁을 출입한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했다. 위황후 등은 자살하였고 위청 세력은 제거되었다. 위태자 일행은 호현까지 도망쳤지만 팔월 팔일(양력 9월 30일) 지방군에 포위되자 자결했다. 태자의 핏줄이라고는 강보에 싸인 사황증손 유병이(劉病已)만이 병길(丙吉)의 도움을 받아 민가에 숨겨져 살아남게 되는데, 후에 한선제로 등극하게 된다. 여태자가 호현 신발장사꾼 집으로 도피했는바 이는 위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신발을 바꿔 신다의 속담처럼 신발을 벗어 던지는 것은 배신의 행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위태자 반란이 일어나 양측간에 5일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간에 수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결과를 볼 때 무고지화의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컸음이 능히 짐작된다.
사마천의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 편지의 당사자로 유명한 임안은 태자의 부절을 받았지만 북문을 걸어 잠그고 전세를 관망하였다. 이런 임안의 모습에서 반란의 이심이 있었다고 의심을 받아 임소경은 그해 12월 사형을 당했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투후의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했다. 대홍려 상구성은 마차와 배 수송병사들을 반란군 진압에 투입하였다. 상구성은 반란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세력의 주동자인 장광을 붙잡았다. 상구성은 반란이 완전 진압된 구월(양력 10월)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하였다. 시랑 망통은 장안으로 들어가 반란주동자 여후를 추격하여 체포하고 같은 흉노족 사람들에게 ‘반란세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는 표지는 거짓이니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외쳤다. 망통이 여후의 목을 베고 난 후 기마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입성하여 대홍려 상구성에게 알려서 마차와 배 수송병사들을 반란군 진압에 투입하게 하였다.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마통을 따라서 여후를 함께 체포하고 반란세력의 주요인물인 태자소부 석덕을 체포한 공로로 덕후에 봉해졌다.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하고, 소문은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하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하고, 망통, 망하라, 경건 등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한무제 사후, 권력은 곽광 김일제 상홍양 상관걸의 탁고대신 사인방[3]이 차지하고 득세하게 되었다.
[1] 《漢書》 《武帝紀》, “秋七月 桉道侯韓說 使者江充等掘蠱太子宮 壬午 太子與皇后謀斬充 以節發兵與丞相劉屈氂大戰長安 死者數萬人 庚寅 太子亡 皇后自殺 初置城門屯兵 更節加黃旄 御史大夫暴勝之 司直田仁坐失縱 勝之自殺 仁要斬 八月辛亥 太子自殺于湖.”
[2] 려태자는 진시황 사후 태자 부소가 밀려난 사건을 상기하고 있었다. 한서《武五子傳》 時上疾,辟暑甘泉宮,獨皇后、太子在。太子召問少傅石德,德懼為師傅并誅,因謂太子曰:「前丞相父子、兩公主及衛氏皆坐此,今巫與使者掘地得徵驗,不知巫置之邪,將實有也,無以自明,可矯以節收捕充等繫獄,窮治其姦詐. 且上疾在甘泉,皇后及家吏請問皆不報,上存亡未可知,而姦臣如此,太子將不念秦扶蘇事耶?」太子急,然德言.
[3] 한서, 곽광전, “光為大司馬大將軍,日磾為車騎將軍,及太仆上官桀為左將軍,搜粟都尉桑弘羊為御史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