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앞면 12행 해석-이목지신-2
어떻게 부강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송나라 왕안석의 상앙의 시를 보면 국가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기를 치지 않는 것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이미 아담 스미스가 밝혀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법집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상앙이었다. 진시황제가 태어나기 약 1백년 전에 상앙은 “개간령”[1] 법률을 제정하여 전답을 개척하고 국부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새로운 법의 효과에 대해서 국민들은 의구심이 컸다. 황금을 캐려고 하면 실제로 황금이 발견되어야 한다.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만 나면 사람들은 누가 가지 말라고 해도 서로 가려고 난리가 난다. 사람의 동기는 누가 어떻게 부여하는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그것은 오로지 국민에게 달려 있다. 전쟁의 승리도 전쟁계획과 전략은 장수가 책임지고 마련하지만 실제 전투장에서의 승리는 그 명령에 따르는 사졸들에게 달려 있다. 캘리포니아 1849년 금광 발견의 소문을 듣고 일확천금을 노린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미국의 발전은 하루 아침에 도약했다.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고서 무상노동으로 국부를 창조할 수 있는가? 범죄자들을 한데 몰아서 천리장성을 쌓아본들 무슨 소용인가?
왕안석과 상앙
自古驅民在信誠 一言爲重百金輕 今人未可非商鞅 商鞅能令政必行 (자고구민재신성 일언위중백금경 금인미가비상앙 상앙능령정필행) |
옛부터 국민을 움직이는 근본은 진실로 믿음을 지켜내는데 있었다. 말 한마디는 천금의 가치보다 더 크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상앙을 비난할 수 있을텐가? 상앙은 법률과 정책을 새로 제정하면 엄정하게 집행하였으니. (왕안석, “상앙”) |
땅을 백날 파보니 동전 하나 나오지 않는데 그저 농민들에게 땅을 일구라고 명령을 내려본들 그것이 먹힐 리가 없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땅을 개척할 수 있을까?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을 지급하지 않으면 아무도 쳐다보질 않을 것이다. 맨 처음 맨 땅을 일굴 때 어떻게 사기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할 수 있을까? 곽언과 상앙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고 새로운 정책을 펼 때 고민하던 지점이 이것이었다. 금광개발도 마찬가지이다. 금광 발견은 소수의 탐험가 모험가 자본투자가들이 리스크-테이킹을 하고 투자를 감행하지 않는 성공할 수 없는 산업이다. 무역도 마찬가지이고, 새로운 부의 창출에는 먼저 투자가 필요하고, 투자는 신용에 달려 있다. 정주영회장이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지을 때 한국은행 종이 화폐 속의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그림으로 공장 설립 자금 대출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일화가 말해주듯이 상업도 농업도 광업도 축산업도 어업도 그 성공의 기초는 신용, 믿음에 달려 있다. “疑行無成 疑事無功” (상앙). No Risk No Return. 유명한 히브리서의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 어찌 믿음없이 새로운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겠는가?[2] 不言之信(불언지신).
사람은 누구나 황금사과를 따먹을 황금의 기회 (golden opportunity)를 갖는다.[3]
상군서, 국정 개혁의 요체-어떻게 성공할 것인가?[4]
국정 최고 책임자의 성공 조건
臣聞之 疑行無成 疑事無功 君亟定變法之慮 殆無顧天下之議之也 |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거사에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사람은 어떠한 공훈도 얻지 못한다. 새로운 법을 신속하게 제정하는 결단을 내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판 여론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
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負於世 有獨知之慮者 必見訾於民 |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할 수 있고, 독자적인 지식체계로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
語曰 愚者闇於成事 知者見於未萌民不可與慮始 而可與樂成 | 우둔한 사람은 일을 끝내놓고도 그것에 대한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싹이 트기도 전에 그 사유를 먼저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세상 사람들과 의논을 나누기 보다 일을 먼저 성취해 놓고 그 기쁨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보다 낫다. |
郭偃之法曰 論至德者 不和於俗 成大功者 不謀於衆[5] | 경제개혁정책에 성공한 곽언은 말했다: 최고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대단한 사람은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
法者 所以愛民也禮者 所以便事也 | 법은 국민을 어여삐 여기고 아끼기 때문에 나온 것이며,[6] 관행이란 매사를 잘 돌아가기 위한 도구와 수단이다. |
是以聖人苟可以強國 不法其故 苟可以利民 不循其禮 | 따라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기존의 법규에 속박될 필요가 없고, 국민을 이롭게 하려면 기존의 관행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
移木之信
“令既具 未布 恐民之不信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民怪之 莫敢徙 復曰 能徙者予五十金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以明不欺 卒下令.” (사마천, 사기, 商君列傳).
국민들이 불신할까 봐서[7] 토지개간법의 시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10 미터[8] 높이의 긴 나무를 수도 서울의 남대문 세우고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 나무를 북대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황금 열냥을 주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여기고 아무도 시도하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시 외쳤다.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황금 오십냥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9] 옮겨 놓을 때마다 즉시 황금 오십냥을 지급했다. 이렇게 하여 국가가 사기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리하여 상앙의 신법 토지개간령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이식(transplant)의 문제
법과 제도와 문화는 마치 살아 있는 나무와도 같이 자라나는 생물에 비유된다. 곽언과 상앙은 과감한 경제개혁과 법률개정 그리고 인재등용 원칙을 혁파에서 국가를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공자의 무신불립과 같이 상앙의 이목지신은 어떻게 국정 개혁을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자문자답을 보여준다. 법(제도)과 문화의 문제에 대한 생각은 순환론법에 빠지기 쉬운 영역인데 이에 대한 생각을 안자춘추의 귤과 탱자의 나무심기 고사성어에 대한 글로써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제도와 문화, 나무 옮겨 심기, 나무 탓인가? 토양 탓인가? 사람 탓인가? 환경 탓인가?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 “남쪽의 귤이 북쪽에서는 탱자가 된다. 사람도 환경에 따라 성품이 변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환경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된다.” 이는 귤화위지의 국어 사전의 설명인데, 이 4자 고사성어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안자춘추”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晏子至 楚王賜晏子酒 酒酣 吏二縛一人詣王 王曰 縛者曷為者也 對曰 齊人也 坐盜 王視晏子曰 齊人固善盜乎 晏子避席對曰 嬰聞之 橘生淮南則為橘 生于淮北則為枳 葉徒相似 其實味不同 所以然者何 水土異也 今民生長於齊不盜 入楚則盜 得無楚之水土使民善盜耶 王笑曰 聖人非所與熙也 寡人反取病焉[10] |
초나라 왕과 제나라 출신 고문이 술잔을 나누고 있는데 그 때 마침 초나라 관리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결박하여 끌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왕: “포박된 그 사람은 무슨 연유에서 잡혀왔는가?” 관리: “(외국인) 제나라 출신인데, 절도죄를 저질렀습니다.” 왕이 제나라 고문 안자에게 질문했다. 왕: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합니까?" 안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답변했다. 안자: "제가 들은 바를 말씀 드리면, 귤나무가 강남에서 자라면 그대로 귤이 열매 맺는데, 같은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열린답니다. 나무 잎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열매 과일의 맛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과 토양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제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나라로 들어오면 도둑질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도둑질에 물든 것은 초나라의 수질과 토양 때문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까? 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왕: "성인군자는 함부로 웃음을 파는 것이 아니랍니다. 웃자고 한 마디 했는데 오히려 제가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11] |
이식(transplant)
제도와 문화를 무엇이고 또 그 관계는 서로 어떻게 이어지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제도와 문화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가져온 역사성을 갖는다. 거의 모든 나라의 법과 제도는 사막에서 홀로 자라는 선인장이 아니고, 회수를 건너온 탱자나무처럼, 다른 나라 다른 곳에서 자라난 나무를 새로운 곳으로 이식해서 심은 나무와 같다. 사람이 태어나 사회에 편입된 순간, 제도와 문화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본다면, 제도와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과가 아니라 현재 이전에 생겨난 산물이다. 한편 과거의 산물인 제도와 문화는 항상 변화하고 발전해 온 사실에서 또한 미래의 개념이기도 하다. 마치 살아 있는 나무와도 같이 자라나는 생물이다.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그 차이
문화적 차이와 문화적 동질성
“절대라는 말을 절대 다시 하지 말라 (Never say, never again)”는 007 영화 제목이 생각나는데, 그와 같이 영미국의 문화는 “NEVER”라는 말은 가급적 피한다. 사람의 일이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하는데 누가 미래의 일을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다고,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결단코 없다”, “결코 하지 않겠다”등의 말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인간사 사람의 일에서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고, 따라서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It's not over till it's over.)”라는 영어 속담이 말해주는 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를 갖는 것이 요구된다. “결코”라는 말은 두 번 다시 결코 꺼내지 말라”는 충고는 틀리지 않다.
객관식 시험 답안 고르는 요령 중에 하나 들어가는 사실을 예로 들어보자. 4지선다형 답안지에 들어있는 문항 중에 “결코”라는 문장이 들어 있는 문항은 정답이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에 소위 “겐또 찍기”를 할 때는 그 문항을 제외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선생님에게 배운 기억이 있다. 인간생활에서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표준분산 확률적으로 판단하면 경우의 수가 적을 것으로므로 자기가 정답을 모를 경우에 틀린 답을 생각되는 문항을 우선 제외시키고 나면 정답을 고를 확률이 높아진다.
영미국인의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결코(never)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확신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그런 다짐이 본인의 의지대로 끝까지 지켜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또 사람의 일이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어느 누군들 미래의 일을 확실하게 앞서 장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절대로” “결코” 등 이런 극단적이고 단정적인 낱말은 피하는 것이 보다 좋은 방향이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결단코 없다” 라는 표현으로 단정을 하기 보다는, 만약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신이 모르는 일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본성상 보다 바람직하다. 이런 측면에서 영미인들은 이런 단정적인 어휘인 “결코(never)” 등의 말을 쓰면 그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그 말을 한 사람의 신뢰성이 떨어지게 된다고 인식한다.
한편 프랑스 같은 대륙법국가들에서는 거꾸로 “항상(always)”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장려한다. 소년 소녀의 첫사랑의 영역에서나 결혼 맹세에서나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나 우리들의 사고는 거의 “항상”, “언제까지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이런 단어들을 즐겨 쓰면서 사랑과 충성을 끝없이 맹세하기를 바라는 문화이다. 사랑과 권력의 세계에서는 설령 “거짓 맹세”일지라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충성한다는 다짐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인간 경험칙상 사랑과 충성의 맹세는 상황이 변함에 따라 배신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서 수긍된다. 입증 논거를 별도로 제시할 필요 없이 사람들 스스로의 인생 경험에 기대어 본다면 자명한 사실이지 않는가?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항상 충성한다고 맹세하기를 좋아하지만 권력과 사랑의 세계에서는 배신과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것으로 밝혀지지 않던가?
우리나라와 프랑스 같은 대륙법국가의 문화는 “언제까지나”, “결코”같은 극단적인 단어와 사고방식을 좋아하는 (호기심에서 발자크의 이 “The Lily of Valley”소설에서 “never’, “always”등의 단어를 검색해 보니 나의 이러한 가정은 사실로 밝혀진다- “never” 단어 사용이 약 197번, “always”는 약 80번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영미법 국가의 문화는 “항상”이나 “절대”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되도록이면 피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쪽이 인간 본성에 보다 가깝고,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올까?
“하늘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인간 세상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을 말해준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하거늘, 세상과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태도보다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진솔하게 대처하는 태도가 보다 나은 태도이다. 변한다는 것이 상수인 인간세상에서 자기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은 오히려 자신이 먼저 “변한다”는 것을 예견해 주는 것 같아서 그다지 신뢰성이 높게 보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비유는 “키케로 추종자”의 대한 인식과 평가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나 프랑스 같은 대륙법 국가에서 키케로는 “완벽한 인간(perfect man)”으로 추앙 받고 사회 지도층 인사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렇지만 키케로 같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인간”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은 화려할지 몰라도 실상은 다른 경우가 다반사로 나타난다. 인간의 한계가 크기 때문에 애초부터 “완벽한 인간”이란 실현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는 완벽한 인간이 존재한다고 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모델은 현실성이 낮다. 영미인들은 그런 완벽한 인간의 모델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완벽한 인간”을 추종하지 않을 것이다.
관점의 차이에 대해 흔히 드는 사례를 보자. 컵 속의 물이 반쯤 차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안찼다 (컵의 반은 비어있다 (half empty)”고 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물이 반까지 찼다 (half full)” 라고 말하며 서로 반대되는 반응을 보인다. 똑 같은 사건을 두고서 보는 시각이 다르면 반응도 달라질 것이다. 반응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물이 반쯤 비어있는 여기는 사람은 컵 속에 물을 더 채울 것이며 반면 물이 반쯤 찼다고 여기는 사람은 컵 속의 물을 비우려고 할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볼 때 사람의 보는 시각 차이는 결과에서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행동의 동기와 그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1] “墾草令”(간초령), 진(秦)나라 효공(秦孝公) BC 356년 상앙(商鞅)을 재상에 임명하고 토지개간령을 시행함.
[2] "No one is ready for a thing until he believes he can acquire it."
[3] "Opportunity often comes disguised in the form of misfortune or temporary defeat."
"Every adversity, every failure, every heartbreak, carries with it the seed of an equal or greater benefit."
[4] 商鞅, “商君書”, 更法편.
[5] 영어 번역은 J.J.L. Duyvendak, "The Book of Lord Shang" (1928), 'He who is concerned about the highest virtue is not in harmony with popular ideas; he who accomplishes a great work, does not take counsel with the multitude.'
[6] “法者 所以愛民也”, 법은 국민을 사랑하는 것에 그 존재 이유가 있다는 의미에 대해서 W H오든, “Law, Like Love”(법은 사랑처럼) 영시를 참조하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또는 무관심한 상태로 벗어나려는
모두가 바라는 희망을 억누르네.
나는 적어도 여러분과 나의 허영심을
제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유사성을
소심하게나마 말한다면,
우리들은 그래도 나와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네
법은 사랑 같은 것이라고.
법은 사랑처럼 우리들이 어디에 있는지, 왜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법은 사랑처럼 강요하거나 벗어날 수도 없는 것,
법은 사랑처럼 우리가 흔히 눈물 흘리는 것,
법은 사랑처럼 우리가 거의 지키기 어려운 것.”
W H오든, “Law, Like Love”(법은 사랑처럼) 영시 중에서 마지막 두 연 인용. 오든이 이 시를 쓴 시기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1939년 9월쯤이었다. Auden, "Collected Poems", Edited by Edward Mendelson. Vintage. 1st ed. Feb 1991 pages 262-264.
[7] 왕안석의 상앙에 대한 평가의 싯구절 “一言爲重百金輕”, ‘말 한마디는 천금의 가치보다 더 크다’. "Think twice before you speak, because your words and influence will plant the seed of either success or failure in the mind of another." (Napoleon Hill).
[8] 三丈(삼장)의 길이를 미터로 환산하면 10미터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공포심을 가장 크게 느끼는 높이가 십미터 정도이고, 이로 인해서 군대 유격 훈련장에서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코스 나무 높이가 약 10미터에 해당한다. 당연히 어린이 놀이터의 미끄럼틀 높이는 5미터도 안될 것이다.
[9] "No one is ready for a thing until he believes he can acquire it." (Napoleon Hill)
[10] Ibid.
[11] “晏子春秋” (BC 475-BC 221), “晏子春秋內篇雜下”, http://ctext.org/yanzi-chun-qiu/za-xia/z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