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서정부에서 투후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문무대왕 2025. 4. 14. 12:29

1.    서정부에서 투후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당나라 이선이 투후를 김일제로 주해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피발좌임 분신니재(被髮左奮迅泥滓)”은 이민족이 다스리는 오랑캐 땅에 잡혀 들어가 치욕을 받고 그것을 딛고 일어선 소무와 장건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나라 이선은 피발좌임 분신니재이민족 출신으로 해석하여 서북쪽 오랑캐 땅을 지배하는 흉노족 이민족 북방민족 출신으로서 한나라에 귀순한 김일제로 인식하고 그와같이 주해를 달았다. 하지만 한족이 이민족 땅으로 들어가 구금되고 다시 금의환향한 사람과 원래 이민족 출신이 한나라로 귀순해 온 것은 그 출신 배경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둘다 이민족 땅에서 들어온 것은 동일한 점이지만 동쪽의 동이족 출신인가 아니면 서북쪽의 흉노족 출신인가는 서로 반대쪽에 위치한다는 다른 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동이족은 상나라를 건설하고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정통 민족이다. 동이족은 변방 소수 민족이 아니라 주나라에 앞선 거대한 상나라 용산문화를 건설한 주역이다. 주나라가 동천하여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 천자국을 건설했는데, 중국의 중심 민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경우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출한 두가지 경유의 길로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가 거기서 잡혀 온갖 치욕을 받았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 금의환향한 사람을 반악의 서정부에서 투후로 지칭한 것이다. 반악은 ()나라 고지에서 현령을 지냈고 그리하여 누구보다도 상나라와 한나라의 역사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반면 김일제는 이민족이 다스리는 오랑캐 땅 출신으로 어릴 때 귀순하여 교외 목장에서 말을 키우는 천한 직업에서 일약 황제의 곁을 지키는 고관대작 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인 서정부 작가 반악은 서정부에서 투후를 동이족으로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가 외롭게 쓰러져간 이릉 또는 이광리 장군같은 사람을 가르키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투후 상구성을 가르킨다. 서정부의 피발좌임 분신니재(被髮左奮迅泥滓)”의 표현은 오랑캐 땅에서 잡혀 포로 생활의 치욕과 갖은 고초를 겪다가 끝내 살아 돌아와 출세한 소무와 장건을 가르키는 표현인 것이다.

 

서정부 구절에서투후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으므로 투후 상구성과 투후 김일제 가운데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칭하는지 그에 대한 판단은 문장 전체 내용과 이 구절에 나타난 구체적 인물들의 전체적 문맥과 문장 내용상 상관성을 모두 함께 따져서 종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사항이다.

당나라 때 이선의 주해에는 투후를 김일제라고 주석하고 그에 대한 근거로서 한서의 김일제전의 구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놓았다. 한편 투후 상구성에 대한 전기는 한서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반란죄로 사형당하고 멸문지화를 입었던 유굴리의 전기 속에서 투후 상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이 등장하고 있고 또 한서 공신표에 투후 상구성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반악의 서정부에서의투후 충효순심구절에서의 투후가 투후 상구성인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당나라 이선의 주해는 김일제는 생전에 제후의 봉작을 받지 않았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였고 또 투후 상구성에 대한 기록은 주석을 달아 놓지 않았는데, 강희자전에서 투후 상구성과 투후 김일제 이 두 사람을 동시에 투후로 기록해 놓고 있음을 참조한다면 이선의 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서정부 작자인 반악은 산동성 그리고 낙양 즉 하남성 지방의 인재들 중 역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열거하고 그들을 닮아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기도록 조언을 하고 있다. 동남쪽은 인재가 많기로 소문나 있지 않는가? 항우에 대한 칭송가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구절 다음에 나타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의 동남쪽 산동성과 예주와 동해안 지방은 인재가 많기로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맹자 공자 노자 순자 묵자 도주공 노반 등 모두 열거하기엔 종이가 모자랄 정도가 아닌가?

반악은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다만 팔왕의 난리통에 삼족이 멸족당한 역사의 아픔 속에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말았지만 투후와는 달리 다행히도 반악의 글들이 살아 남아 지금껏 전해 내려온다.

 

西征(서정)부는 서쪽 정벌이라는 뜻 그대로 서쪽 흉노족을 정벌한 사람들을 거론하고 있는 문장이다. BC 770년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것은 서쪽 견융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주천도와는 반대로, 서정부는 동이족인 동남방 사람들이 서쪽 즉 서안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서북쪽의 흉노족을 정벌한 장군들과 그에 관련된 역사를 거론하고 있는 거대 서사시이다. 투후 상구성은 흉노족 정벌 전쟁에 참가해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군이었다. 반면 투후 김일제는 흉노족에서 귀순투항한 사람이었으므로 서정부에서 거론한 인물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서정부 구절과 유사한 표현이 들어 있는 한서에서는김일제라는 이름이 거명되어 있는 반면 반악의 서정부에는 김일제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는 이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반악의 이 구절은 유신과 당태종과 무측천과 문무대왕 비문에서 서로 똑같이 발견된다. 반악과 유신 그리고 당태종과 무측천으로 이어지는 혈연 관계가 같은 정서적 동일성을 핏줄 깊숙이 간직해 온 것이다. 반악은 서정부에서 환관내시들을 경멸하고 있는데 따라서 김일제 같은 한무제 때 궁정내시를 칭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김일제는 대의멸친이라는 명분하에 죄를 지은 재롱둥이 자기 자식마저 죽이고서 권력에 아부했던 궁정내시였지 않았는가? 김일제는 곽광의 부하로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그를 충신효자라고 말하는데 충신효자라면 어찌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식마저 죽이는 그런 몰인정하고 비정한 사람이겠는가?

 

일인투명 족구천부

투후 상구성같이 대역 불경죄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더라도 후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기 희생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충신효자로 칭송받지 않는가? 투후 김일제는 흉노족 이방인 출신의 궁정무사로서 동남방 동이족 사림 문사 출신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투후 상구성은 황실 종친이 맡는 선대 황제의 왕릉을 지킨 첨사로 종친이었기에투후제천지윤이라는 표현에 논리적으로 어울리는 인물이지만 투후 김일제는 천자의 후손이 아닌 이민족 이방인 출신으로서 귀순투항한 사람이었기에 제천지윤이라는 표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투후 김일제는 고명대신으로 늙어 병사했기에 목숨을 버리면서 굳은 절개를 지킨 충신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투명이고절양(投命而高節亮)의 의미는황제를 모독했다는 불경죄 판결을 받자 자결을 택해 절개를 드러난 인물인 투후 상구성에 어울린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 “一夫當逕足懼千夫(일부당경족구천부) 표현 또한 그와 같은 의미이다.  일부당경족구천부는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병졸들이 두려워한다”는 즉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이런 뜻에서 더욱 발전하여, 오자병법의 설명대로 “一人投命足懼千夫 일인투명 족구천부 즉 “한 사람이 결사항전 죽음으로써 일당천의 값어치를 해낸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必死則生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