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 2025. 4. 17. 12:26

 

I.            들어가기

 

1.    이 책의 주요 요약

 

삼국사기가 기술한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한 역사 조작의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역사 혁명”-이 책은 현재까지 초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 그리고 대학과 연구학계가 지금까지 쌓아온 한국사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한국사의 진실된 내용을 설명한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사기 전체 분량의 대략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또 그만큼 한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문무대왕은 실로 백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현명하고 영명한 군주이고, 실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년의 민족 지도자이다. 사람들을 보듬고 크게 베풀고 아끼고 사랑하는 자혜애민(慈惠愛民)을 뜻하고 는 재앙과 환란을 극복해내는 克定禍亂(극정화란)을 뜻하는 말이니[1], 文武(문무)왕은 시호법 의미 그대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다. 역사 혁명책은 삼국사기가 기술한 역사와 문무왕릉비 비문 원문 내용이 서로 다른 사실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설명하여, 삼국사기가 기술한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하였다는 역사 조작의 실체를 결정적인 사료적 증거 제시와 해석을 통해서 밝혀낸다. 이러한 결론은 반만년 역사 가운데 여지껏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매우 난해한 영역 중에 하나였던, 한국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무대왕의 유언 속에 묻혀진 반만년 한국사의 비밀을 밝혀낸 획기적인 대사건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는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인 관련국인 중국과 일본의 역사까지를 새로이 쓰고, 인류 문화의 새역사를 창조하여, 나라의 발전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고자 사마천의 혼으로 이 책을 상재한다. 

 

삼국사기가 망작이고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결정적인 증거 하나는 문무대왕에 관련된 기록 부분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문무왕릉의 비문의 파편이 살아 남아 있고 그 탁본이 전해오고 있어서 문무왕릉 비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상호 비교 대조해 보고 정확하게 해석해내면 그 진실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망작과 역사 조작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삼국사기가 기록해 놓은 문무왕 유조문이 놀랍게도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하였다는 사실이다. 문무왕릉의 비문과 당태종 유조문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유조문의 문장 구성 형태와 그 의미는 일구일구 일문일문 구구절절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한다. 한문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도용과 표절 행위에 대한 판단여부를 확인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삼국사기에서 기술하고 있는 문무왕 유조문의 내용은 문무왕릉 비문의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왜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문무왕릉 비문의 내용과 서로 맞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설명해 주는 이유 하나는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한 표절의 범죄행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 문무왕릉 비문은 당시대의 역사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증인-eyewitness이 직접 썼다. 따라서 문무왕릉비는 진시황제 순수비와 같이 제1차적 소스이지만, 삼국사기는 史記”(사기)와 같이 제2차적 소스에 해당한다.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다시피, 제일차적 소스가 제이차적인 사료에 우선한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어떤 사람들은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1차적 소스로 여기는 오류에 빠질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되었다. 진흥왕 순수비나 문무왕릉의 비문은 제1차적 소스에 해당한다. 1차적 자료들을 취합 선택해서 정리한 사서가 삼국사기와 고려사 같은 역사서인데, 1차적 소스의 기록 내용과 제2차적 자료인 역사서 내용 사이에 서로 배치되는 내용이 나온다면, 1차적 소스가 제2차적 소스에 우선한다. 따라서 문무왕릉의 비문을 정확하게 해석해내고 또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하였다는 사실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삼국사기가 망작과 도작이고 조작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결론을 이끄는데 있어서 입증의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이 책에서 밝혀내는 위 두 가지에 대한 진실은 고려시대 김부식 일당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역사 조작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로 쓰여지게 된다. 문무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이해를 통하여 삼국사기가 기술하고 있는 부분과의 차이를 들추어내고 그 진실을 밝히는 것 그리고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였다는 조작과 표절의 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그것은 삼국사기의 역사 조작의 범죄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스모킹건 smoking gun)가 된다.

 

마멸되어 사라진 문무대왕릉비 비문과 당태종 유조문 사이에 얼마나 연관성이 큰 지를 가늠할 수 없지만 (문무왕릉비 많은 부분이 마멸되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와 당태종 유조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 보면 그렇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기사에서 문무대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유조문 전문의 전체 글자수는 350자이다. 
① 이 중에서 238여 글자의 내용이 거의 전부 당태종 유조문을 그대로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이 책의 설명을 통해서 맨처음으로 밝혀낸다. 

 

② 또 삼국사기가 기술한 유조문 가운데 만가 애도시 부분인 吳王北山之墳 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55자의 구절은 장재의 七哀詩(칠애시)에서 차용하였다는 점을 맨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근거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 둘 사이에 其上狐兎穴其구절만이 문무왕릉 비문과 일치하는 문장 내용 부분이다. 이 초목가기상호토혈기방의 구절에서 삼국사기는 樵牧歌其上狐穴其旁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의 는 문무왕릉비의 , “은 문무왕릉비의 의 글자를 각각 바꾸어 쓴 것이다. 물론 , 서로 의미가 같고 글자의 쓰임새가 서로 통하는 같은 뜻의 글자이기에 서로 바꾸어 써도 전혀 의미의 변화는 없지만 삼국사기의 글자는 문무왕릉의 비문 원문의 글자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준다. 

 

③또 삼국사기가 기술한 유조문 가운데 경계문 구절인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32 글자의 내용은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 책으로 완성하여 태자에게 남겼던 帝範”(제범)의 유훈 속에 들어 있는 내용임을 저자는 새롭게 밝혀낸다.

 

④또 유조문의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 12 글자의 문장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구절을 도용한 표절임을 밝혀낸다.  삼국사기의율령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는 의미의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12 글자 부분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律令格式 或有不便於事者 宜依前敕修改 務當政要 구절을 도용한 표현임을 밝혀낸다.

 

이와 같은 사실과 분석에 따라, 삼국사기 문무왕의 유조문 중 문무왕의 장례식 관련 부분인 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구절의 13 글자 부분, 그리고 만가 애도시 부분인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구절의 55글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은 당태종 유조문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밝혀낸다.  

 

위의 짤막한 요약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의 전체 350개 글자수 가운데 305여 글자가 문무왕릉비 비문원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쓰여 있다는 것, 또 그것은 다른 글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한 표절의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이에 저자는 삼국사기의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한 역사 조작의 경악할만한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당태종 유조문을 번역 설명함과 동시에 국사편찬위원회 (이하 국편위로 표기)의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 해석에 있어서 잘못된 번역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해석을 제시하여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자 한다.

 

2.    심각하고 중대한 도용과 표절의 범죄행위가 미치는 크고 광대한 영향과 범위

 

삼국사기가 기술한 문무왕의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한 표절이고 도작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114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거의 900년 전의 과거에 이루어졌던 이미 지나간 과거사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현재적인 엄격한 도용과 표절행위의 금지의 법적 잣대 또는 연구진실성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영역이라고 대충 넘길 수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황우석 사태[2] 같은 연구 부정 행위[3]가 나타났고 그 같은 열악한 교육 환경으로 전락했는가? 그같은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교육과 연구 환경이 황폐해지고 학문적 진실성의 추구와 도덕과 양심의 수준이 흔들리게 되었는가?[4] 삼황오제 요순시대나 공자의 춘추시대 사마천의 사기시대 적어도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중흥시대 때까지는 현재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과 양심이 통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서삼경의 글자 하나 한글자라도 틀리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용납하지 않았던 고대까지를 거슬려 올라가 보면 가히 짐작이 간다. 도용과 표절행위의 금지의 정도 그리고 일반적 법적 도덕적 양심적 수준은 현재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추론은 별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남의 글을 훔치고 자신의 것으로 도둑질하여 진실인 것처럼 거짓 포장하는 표절 행위는 구진과 진리탐구를 가로막는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처사일 뿐만아니라 인류의 지식의 축적과 발전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심각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이것은 실정법인 저작권법이 규율된 지금이나 예전이나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 공통적인 지적 유산의 전승과 인류 문명 발전의 근간이자 인간 본연의 양심과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가 당태종의 유조를 도용하였다는 표절 행위가 밝혀지면 삼국사기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는 그동안의 한국의 역사와 그것을 기술하고 있는 학교의 역사 교과서와 대학 교재 그리고 연구서들은 즉시 폐기되거나 수정 처분을 받아야 마땅하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 기록은 문무왕릉 비문의 일부분이 현존하기 때문에 그 직접적 사료이자 증거인 문무왕릉 비문과 대조 비교하여 삼국사기의 망작과 역사 조작의 직접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역사 과목은 초중고등 학교의 정식 교과과정은 물론 대학에서의 교과목 그리고 국가 공무원 채용이나 승진 시험 과목 등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역사 과목은 국가 형성과 유지의 근본이자 골간의 역할을 담당한다. 또 우리나라는 헌법상 “Kulturstaat”(문화 국가) 원칙을 채택하고 있고, 따라서 문화국가론에 따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의무가 있으므로, 정부는 잘못된 역사를 즉시 바로잡을 책무를 지고 있다.

 

3.             왜 여지껏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의 도용과 표절이 밝혀지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여지껏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그대로 도용하고 표절했다는 경악할만한 역사 조작의 범죄행위가 밝혀지지 못했을까? 삼국사기의 전체 내용을 대략 보면 삼국의 개국 시조 기사와 최후 멸망의 기사 그리고 삼국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의 기사가 삼국사기의 분량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대업적을 이룬 문무왕과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합친 문무왕 관련 역사 부분이 삼국사기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문무왕의 역사가 조작되었다면 그것은 한국 역사의 전체가 조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문무왕의 역사와 그 문무왕의 유조의 진실 여부가 여지껏 전혀 밝혀지지 못했을까?[5] Why?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1145년경에 편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왜 지금까지 그토록 870년이 넘는 오랜 시기 동안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그대로 도용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질 수 없었을까? 왜 지금까지 그러한 오류 가능성 등은 언급되지도 않았고 온전히 무시 배제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맹신하고 신격화하며 마치 진실인양 가르치고 배워 왔을까? 

 

사실 삼국사기가 망작(妄作)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망작의 죄를 저지른 결과라는 것을 말해주는 서문 하나가 삼국사기가 아닌 1478년에 발간된 동문선”(東文選, 表箋, 進三國史記表)에 실려 있기는 하다. 여기서 표현하기를 김부식은 妄作之罪를 사면해 달라고 빌고 있다. 망작은 없는 사실을 있는 양 거짓으로 호도하고 꾸며낸 고의적인 조작을 뜻하는 말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가 妄作之罪(망작지죄)임을 스스로 자백했다는 것일까? 그리하여 赦妄作之罪”(사망작지죄)라고 빌었는데, 천벌받을 망작지죄를 지은 자신의 업보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일까?

 

삼국사기가 1145년경에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여지껏 870년이 넘는 장장 유구한 세월 동안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였다는 그 경악할 만한 사실이 전혀 밝혀지지 못했고, 또 오늘날까지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한 오류 가능성마저 언급되지도 않고 온전히 배제되며, 국정 교과서[6]에 전재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식민지사관과 유불선(儒佛仙)간의 종교갈등에서 야기된 한국사의 근본적인 문제점[7]과 그 해결능력을 찾지 못하게 만든 삼국사기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마치 삼국사기 전체가 한국역사의 진실인양 경전의 가치로 맹신되고 급기야 자유토론마저 배제된 채 무조건 주입식 교육으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맹목적으로 배워 왔다는 사실은 심히 유감이다. 과연 이렇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다만 두 세 가지로 짧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파벌 계보 등 한국의 학계 연구계가 빠지기 쉬운 한국의 연구 풍토병이나 혹은 그러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고 또 언어능력 외부적 시각 균형감각 자유토론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독립적 탐구 조사 능력을 배양하고 노력한 나의 배경이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1] “經緯天地曰文 道德博聞曰文 學勤好問曰文 慈惠愛民曰文 愍民惠禮曰文 錫民爵位曰文 剛强理直曰武 威强德曰武 克定亂曰武 刑民克服曰武 夸志多窮曰武”, 《逸周書》諡法.

[2]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은 한 연구자의 올바르지 못한 연구태도와 과욕에 의해 실험 자료와 논문을 조작한 것”, 이로인해 그 결과 국내 과학계와 국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서울대 발표, “황우석 교수 연구의혹 관련 조사 결과 보고서http://www.snu.ac.kr/ICSFiles/afieldfile/2006/01/10/report.pdf.

[3] 날조 Fabrication,변조 Falsification, 표절Plagiarism 등 연구 부정 행위, 개념 참조 the Office of Research Integrity, http://www.ori.dhhs.gov/.

[4] 아무리 제약하는 둑이 두껍고 높다 한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 듯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은 결국 뚫린다.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만인평등 인권 이런 가치들은 자명한 원칙이지만 그저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투쟁하여 얻어지는 소중한 가치이기에 항상 새롭게 하여 스스로 지켜나가지 않으면 빼앗기고 만다. 진실의 가치 발견 또한 이와 같다.

[5] 아무리 제약하는 둑이 두껍고 높다 한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 듯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은 결국 뚫린다.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만인평등 인권 이런 가치들은 자명한 원칙이지만 그저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투쟁하여 얻어지는 소중한 가치이기에 항상 새롭게 하여 스스로 지켜나가지 않으면 빼앗기고 만다.  진실의 가치 발견 또한 이와 같다.

[6] 현재 역사 교육의 문제점 하나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양 이념적인 진영으로 나뉘어진 당파적인 이익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다, “public education was a bipartisan”.

[7] Making predictions encourages students to explore historical empathy. How did different individuals perceive the historical event? Why?

[8] 삼국사기가 왜 삼국의 개국관련기사를 조작하고, 신라와 고구려의 왕계를 바꾸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국왕 이름들이 고고학적 발굴 유물과 사실과 다른지, 대당전쟁사의 진실 등 삼국사기의 조작된 역사를 정확한 사료 추적과 분석에 의거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이 요구된다.

[9] 毒樹毒果 독수독과 원칙, The Fruit of the Poisonous Tree.

[10] 자주 독립에 대해서 다음 인용의 글을 참조하고 잠시 생각해 보자. “여러분을 한 국민으로 구성케 하는 통일된 정부는 지금 여러분에게 소중합니다. 그것은 그럴 만한 바, 그것은 여러분의 진정한 독립의 전당에서 여러분의 국내 안온과 대외 화친과 여러분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여러분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를 떠받치는 하나의 큰 기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진실에 대한 여러분의 확신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운동과 여러 진영에서 많이 애쓸 것이고, 많은 책략을 동원할 것이 쉽게 예견될 뿐 아니라, 그것은 국내외 적들의 공격이 끊임없이 또 적극적으로(때로는 은밀하고도 교활하게) 그 포문을 집중시킬, 여러분의 정치적 보루의 급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국민의 집단 및 개인적 행복에 대한 국민총화의 무한히 큰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해야 하고, 또 그 가치에 대해 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부동한 애착심을 품으면서, 그것을 여러분의 정치적 안정과 번영의 수호자로 늘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기르고, 경각심을 갖고 그것을 유지하도록 감시하고, 그것이 어떻든 파기될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보여주는 모든 것에 반대하고, 또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을 여타 지역들과 소원케 하거나 혹은 현재 여러 지역을 하나로 연결하는 신성한 결속을 약화시키려는 기도에 대해 바로 그 시초에 분연히 반대의 뜻을 표시해야 하는 것이 무한히 중요합니다.”, George Washington: Farewell Address (1796) / 9. 조지 워싱턴: 고별연설, “살아있는 미국 역사와 민주주의 문서”, 55.

[11] These hierarchically ordered conceptions are (1) history as a nation’s memory, (2) history as a story of mankind, (3) history as an enactment in one’s mind of the past, (4) history as a study of change and struggle over time, and (5) history as an interpretation of the past. Explanations of each category together with the quotations from teachers’ responses fo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