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릉비 연구-제2권-비문 뒷면 해석

추사 김정희는 어떻게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는가

문무대왕 2025. 4. 3. 10:56

김정희는 어떻게 기존의 황당무계한 설을 물리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는가?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신라 진흥대왕순수비)는 추사 김정희가 밝혀내기 이전까지는 무학대사 왕심비(枉尋碑)[1], 고려시대의 도선국사비[2], 또는 몰자비(沒字碑)[3] 등으로 알려졌다. 추사는 1816 7월에 북한산 비봉을 답사하고 나서 그때까지 무학대사비문으로 알려져왔던 비문이 실제로는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내고 금석학의 기여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부했다.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밝혀져 격파)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4]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김정희의 회고를 보다 자세히 인용하면 각주와 같다.[5]

 

 



[1] 김정희,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2] 조인영의 雲石遺稿중 僧伽寺訪碑記, “北漢之南 有僧伽寺 其上峯曰碑峯 自京師雲從街迤北 見峯顚一柱 兀然如人立 俗傳麗僧道詵碑 今沒字云 歲丙子秋 秋史金元春語余曰 吾上吾上碑峯 碑有殘字 實新羅眞興王碑也”.

[3] 당고종 건릉의 述聖記碑 술성기 비문이 훼손되었고, 무측천 武則天(624-705)의 비문은 아예 모두 지워져버린 속칭 무측천의 無字碑무자비 상황을 참조하라.

[4]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

[5] 국편위 번역,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compare.do?treeId=010604&levelId=hm_111_0070.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 ……(전략)……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 순조 16) 가을 내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을 끊어버리고 삐침획[]을 마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 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1행 진흥(眞興)의 진() 자는 약간 마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 해인 정축년(1817, 순조17) 여름에 또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隷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완당집』권1, , 진흥이비고.


 
……(前略)……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嘉慶丙子秋, 余與金君敬淵游僧伽寺, 仍觀此碑. 碑面苔厚, 若無字然, 以手捫之, 似有字形, 不止漫缺之痕也. 且其時日簿苔面, 映而視之, 苔隨字入, 折波漫, 得之, 試以紙拓出也. 體與黃草碑酷相似, 第一行眞興之眞字稍漫, 而婁拓視之, 其爲眞字無疑也. 遂定爲眞興古碑,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其翌年丁丑夏, 又與趙君寅永同上, 審定六十八字而歸, 其後又得二字, 合爲七十字. 碑之左側, 刻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又以隷字刻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阮堂集』卷1, , 眞興二碑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