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4
사람이란 유례없이 무모할 정도의 불합리한 방식으로 협박을 당하게 되면, 그가 지닌 가장 명백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말하자면, 그 모든 정의와 그 모든 이성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 상대방 편을 들고 있다는 의심을 어렴풋이나마 해나간다는 것이다.[1] 따라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잡을 요량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2]
“터키,” 내가 말했다. “넌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옳지 않아?”
“존경하는, 변호사님” 터키가 아주 맥없는 어조로 말했다. “전 변호사님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니퍼즈,” 내가 말했다. “너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같으면 그를 사무실 밖으로 내쫓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센스가 뛰어난 독자라면, 때는 오전이기 때문에, 터키의 대답은 공손하고 차분한 형태로 표현된 반면, 니퍼즈는 성깔 있는 형태로 대답하고 있음을 인식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독자를 위하여, 앞의 문장을 반복하여 말하면, 니퍼즈의 험악한 마음 상태가 지금 켜져 있고, 터키는 그것이 꺼진 상태였다.)
“진저넛,”“너는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리 작은 지지표[3]라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내가 물었다.
“변호사님, 제 생각에 그는 약간 미친[4] 사람 같아요.”[5] 진저넛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지,” 칸막이 쪽을 향해 내가 말했다. “즉시 나와서 네 의무를 수행하라.”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매우 난처해져서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처리해야 될 업무로 인해서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이번에도 이 딜레마에 대한 처리를 나중에 한가한 시간이 날 때까지 미루기로 결정했다. 약간 힘이 부치기도 했지만, 우리는 바틀비없이 문서 검토 작업을 해냈다. 터키가 한 두장 넘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해나가는 것은 통상적인 관례에 크게 벗어난다는 의견을 정중하게 내비치기도 하였고, 니퍼즈는 신경과민성 소화불량으로 인해서, 의자에서 몸을 홱 비틀어대고 이따금씩 이를 갈면서 칸막이 뒤의 고집불통의 바보멍청이에게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이건 여담인데 그(니퍼즈)로서는, 수고비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해주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는 중에 바틀비는 자신의 은둔처에 틀어 박혀 앉아, 자신에게 떨어지는 특이한 업무를 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는 눈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필경사가 또 하나의 장문의 문서 작업에 몰두한 지 며칠이 지나갔다. 지난 번의 놀랄만한 행동 때문에 나는 그의 행동거지를 면밀히 주시하게 되었다. 내가 살펴보니 그는 식사하러 밖을 나가지도 않았다. 아예 외출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로는 그가 내 사무실을 벗어난 모습을 결코 본 적이 정말로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구석에서 지키고 있는 영원한 보초였다. 그렇지만 오전, 열한시경에, 내 자리에 앉아서는 보이지 않는 동작으로 그쪽으로 조용하게 신호를 보내면 진저넛이 바틀비의 칸막이 입구 쪽으로 다가 간다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그런 다음 이 소년은 몇 펜스를 쨍그랑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가, 생강 케이크를 한 웅큼 갖고 다시 들어와 바틀비의 은신처에 전달하고 수고비조로 빵두 조각을 받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생강빵만 먹고 사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제대로 된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채식주의자임에 틀림없을텐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채소조차도 전혀 먹지 않고, 오로지 생강빵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러자 내 머리 속은 오로지 생강빵만 먹고 사는 사람의 체질에 변화를 주는 확실한 효과에 관련된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생강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생강빵의 특이한 몸체를 이루는 구성요소 중 하나로써 생강이 들어가고 또한 향긋한 맛을 그윽하게 풍기는 성분으로써 생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6] 그러면 여기에서 생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얼큰하고 상큼한 것. 바틀비가 얼큰하고 상큼한가?[7]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생강은 바틀비에게 어떤 효과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생강이 얼큰하지도 상큼하지도 않는 것을 골랐을 것 같다.[8]
수동적 저항만큼 성실한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없다. 만약 그런 저항의 대상자가 몰인정하지 않은 성격이고, 또 저항하는 사람의 수동성이 완전 무해할 경우, 저항의 대상자가 기분이 좋을 때에는, 그의 결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명되는 것에 대해 그의 마음속으로는 동정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확히 그런 식으로, 나는 바틀비와 그의 행동거지를 이해했다. 불쌍한 친구!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9] 그가 오만방자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기행들이 그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그의 태도를 통해서 충분히 입증된다. 그는 내게 쓸모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와 좋게 지낼 수 있다. 만일 내가 그를 내쫓는다면 아마도 그는 좀 너그럽지 못한 고용주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비참하게 쫓겨나 굶어 죽게 될지도 모른다. 확실해. 여기서 나는 별로 어렵지 않게 달콤한 자기확신에 빠져들 수 있다. 바틀비와 사이좋게 지내고, 그의 특이한 반항심을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것은 내게 무슨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닌데다, 다른 한편으론 궁극적으로 내 양심[10]의 한 조각을 내 영혼에 비축하는 것이다.[11] 그러나 이런 기분이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바틀비의 수동성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나는 새로운 적대관계로 그에 맞섬으로써 그에게서 내 자신속에 불같이 일고 있는 불만에 상응하는 무언가 성난 불만을 촉발시키고 싶은 묘한 충동감을 느꼈다. 그러나 사실은 차라리 윈저 비누[12] 조각을 손마디로 쳐서 불을 지피려고 하는 편이 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나는 사악한 충동감에[13] 사로 잡혔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바틀비,” 내가 말했다. “그 문서 필사 일이 모두 끝나면, 내가 너와 함께 비교 검토할 테다.”
“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라고? 설마 그런 고집불통의 변덕을 마냥 부리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가까운 접문을 밀어 제치고 터키와 니퍼즈를 돌아보며 흥분된 모습으로 고함치듯 외쳤다.
“그가 두 번째나 자기 문서를 검토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터키, 너는 이걸 어떻게 생각해?”
이 시간 때는 오후였다는 것을 상기해야 된다. 터키는 벗겨진 머리엔 땀이 흠뻑 솟고, 양손은 낚시줄 던지듯 서류더미에 파묻고, 몸은 놋쇠 보일러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채 앉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터키가 으르렁댔다. “내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의 칸막이 너머로 쳐들어가, 두 눈이 멍들도록 두들겨 패줄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선, 터키는 벌떡 일어나 양팔을 휘두르며 권투 시합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막 뛰어 갈려는 찰나, 오후 시간에 터키의 호전성을 경솔하게 잘못 자극한 결과라는 것을 급히 깨닫고서, 내가 그를 붙들었다.
“터키, 자리에 앉아.” 내가 말했다. “앉고 나서 니퍼즈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봐. 니퍼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바틀비를 즉시 해고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죄송하지만, 그건 변호사님이 결정할 일입니다, 변호사님. 나는 그의 행동이 꽤 유별나며, 또 터키와 나랑 비교해 보면, 정말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지나가는 일시적인 변덕일 수도 있고요.”
“아하,” 하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이상하게도 네 생각이 변했구만. 이제는 그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모두 맥주 탓이겠죠.” 터키가 소리를 높였다. “유순함은 맥주의 영향이지요. 오늘 니퍼즈와 함께 식사를 했거든요. 변호사님도 내가 얼마나 점잖은지 알 수 있겠죠. 내가 가서 그의 두 눈이 멍들도록 두들겨 패줄까요?”
“너 지금 바틀비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건 안돼. 터키, 오늘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다음과 같이 재차 확인했다: “정식으로 요청하니[14], 주먹을 거두어라.”
나는 문을 닫고, 다시 바틀비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내 자신의 운명을 재촉하고 싶은 유혹을 한층 더 느꼈다. 내가 다시 반항의 대상이 되기를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바틀비가 사무실을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바틀비,” 내가 말했다. “전저넛이 지금 밖에 나가고 없다. 네가 대신 잠깐 우체국에 갔다 와, 그렇게 할 수 있지? (우체국은 걸어서 3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거기 가서 나한테 온 우편물이 와있는지 확인해 주기 바란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난 안하고 싶어요.”[15]
나는 비틀거리며 내 책상으로 돌아왔고, 책상에 앉아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내게 숨어 있던 완강함이 되살아났다.
이 말라빠지고 땡전 한푼 없는 꼬맹이[16] 같은 내 종업원에게 주인인 내가 굴욕스럽게 퇴짜를 맞는 또다른 방법은 없을까?[17] 완전히 합리적인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더 추가해야 그가 틀림없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까?[18] [19]
“바틀비!”
대답이 없었다.
“바틀비,” 더욱 큰 소리로 불렀다.
묵묵부답이었다.
[1]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법원은 항상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려고 하고 또 그런 이미지를 가꾸고 지켜 간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법을 더 이상 지키는 것이 무모하다고 어느 순간 여기게 되면 (프랑스 혁명 때처럼) 혁명적으로 들고 일어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2]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의 개념은 자본주의 경제학의 시조 아담 스미스에게 매우 중요한 기초 개념이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은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데 이런 공정성을 유지하는 본성을 양심 conscience이라고 부른다. 교통사고에서 주위의 “목격자를 찾는” 노력을 흔히 볼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보강증거 Corroboration를 찾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신의 주장에 제3자가 호의적으로 (엄정한 제3자의 입장에서 공공 이익을 위하여 변론을 행하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이끌어짐) 나서서 정식으로 변론을 맡는 독립적 변호인 역할을 “amici curiae” (“법원의 친구”라는 뜻인 라틴어이고 그 발음은 아미커스 쿠리에)이라고 말한다. 당사자소송 원칙이 지배하는 보통법 법원과는 달리 형평법 법원에서는 법적 진실을 찾는 목적으로 제3자적 독립적인 위치에서 법원을 위해서 변론을 펼치는 “amici curiae” 변호사 역할을 하는 허용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amici curiae” 변론 제도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무료 변론을 펼치는 “프로 보노 pro bono” 변호사 역할과는 다른 점을 유의하라.
[3] 당시에도 선거에서 부정적인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 선거에 참여하고 투표할 수 있는 투표권(Suffrage)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비록 미국에서 여성참정권(Women's suffrage) 부여는 뉴질랜드나 호주 같은 나라에 비해서 훨씬 뒤늦은 1920년에야 이뤄졌지만 1850년대 당시 뉴욕에서는 이미 여성 참정권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Lucy Stone이 1850년 여성참정권 운동단체를 조직하였고 1852년에는 뉴욕에서 집회가 열렸다.
[4] 뉴욕에서 1834년 구빈법 Poor Law이 새로이 개정된 후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 부랑자 등을 강제로 구금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5] 루니(Loony, luny)는 ‘미쳤다’는 의미로써 크게 실성한 사람을 지칭한다. 한편 산업혁명을 이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모임 단체 “버밍햄 보름달 모임(The Lunar Society of Birmingham)”이 있었는데 당시 지배기득권계층이었던 국교와 카톨릭은 이들을 미친 사람들(미치광이를 영어로 “Lunatic”이라고 불렀다)로 규정하였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III부 1장 프리스틀리는 누구인가를 참조하라.
[6] “생강 빵”과 비슷한 의미로 한국에서는 “마늘 빵”이 있다. 한국인에게 마늘 garlic은 거의 필수적인 양념으로 쓰이는 반면 서양인은 마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서양인의 음식 문화에서 생강 ginger은 매우 유용하게 필수적으로 쓰이는 양념 소재이다.
[7] 고추 맛 hot, peppery은 “톡 쏘는” 매콤하다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말로 얼큰하다는 말에 가깝다. spicy는 좋은 향기smell, odor, aroma가 김이 피어 오르듯 묻어 나오는 “향긋한” 상태를 나타낸다. 상큼하다는 우리말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Spicy의 단어 뜻에는 (영국의 유명한 걸밴드 그룹 “Spicy Girl” 이름이 암시하듯) “섹시하다”, “감칠 맛 나다”는 성적인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8] 요즈음 TV에서 “요리 맛” 코너 (요리사 chef가 요리솜씨를 보여주는 프로그램 등) 인터넷 SNS상에서 인기 있는 테마는 “먹방”(고급음식점, 맛있는 요리, 좋은 음식을 먹는 사진이나 이야기를 주로 올리는 경향)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는 음식”은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편으론 “욕망과 탐욕(desire and avarice)”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분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9] 해악(mischief). 화자는 여기서 강제력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써 “타인에 대한 해악”의 기준을 들고 있다. “타인에 대한 해악”에 대한 설명을 JS Mill의 “자유론”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원칙]은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느 한 개인의 행동의 자유에 대해 정당하게 간섭을 할 때 요구되는 유일한 명분은 자기 보호라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어느 한 구성원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정당하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악을 방지하는 것이다. That principle is, that the sole end for which mankind are warranted, individually or collectively, in interfering with the liberty of action of any of their number, is self-protection. That the only purpose for which power can be rightfully exercised over any member of a civilized community, against his will, is to prevent harm to others.”
[10] 형평법 법원을 “양심의 법정”이라 부른다. 양심의, 양심에 의한, 양심을 위한 법정이 형평법 법원의 기조일 것이다. 형평법 법원에서의 최고 기준은 양심 conscience이다. 법과 정의는 재판관의 양심이 살아 있을 때 지탱된다. 양심은 법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다. 형평법 법원의 판사 출신으로서 화자인 변호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가 양심일 것이다. 형평법의 알파요 오메가가 양심이다. 아담 스미스(대륙법 법체계를 유지한 스코틀란드 출신으로써 형평법 체계에 익숙하였다)는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양심은 우리 행위의 위대한 재판관이자 공정한 관찰자 impartial spectator, 가슴속의 거주자 the inhabitant of the breast, 이성, 원칙 등의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우리 속담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형평법의 양심이 바로 그와 같은 개념이다.
[11]켈트족의 전설에 따르면,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의 한 조각이 다른 사물 속에 숨어 있다가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다시 발견된다고 한다. 즉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숨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잃어버린 영혼이 되돌려지는 것으로 이것은 비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12] 윈저 비누 Windsor soap는 거품이 풍부하고 향기가 그윽한 명품 비누로 알려져 있다. 영국 왕실의 별장인 윈저 성이 있는 윈저 숲 Woods of Windsor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비누라고 한다. 비누는 마루바닥을 닦아내는 것처럼 더러움을 추방하는 기능을 한다.
[13] “사악한 충동감(evil impulse)”. 창세기 8:21의 구절의“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원죄 개념이 상기된다.
[14] 원문의 “pray”는 소송장 등에 쓰이는 법률용어로써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정식으로 진실로 요구한다는 강한 뜻을 가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하다(pray)”는 어느 정도 사적인 뉘앙스가 있는(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절실한 말 “please”이런 말 등을 쓰면 오히려 말하는 상대방을 무시하려는 힘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것 같은데, 사실 “pray”는 이렇게 “어필 appeal 하다”, “plead” 단어와 같이 “정식의” “진실로” 라는 공적 (말의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측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강한 뜻이다. (기도도 개인의 마음속에 머무르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상대방(=하나님)에게 말한다는 측면에서 공적인 의미를 가진다.)
[15] 선호하다 prefer는 자신이 어떤 것 중에서 선택을 한다면 “~~을 하고 싶다”는 선택적 판단을 뜻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즉 명령과 강요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내리는 자발적 선택의 결과이다. 하지만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는 제한적이라고 본다.
[16] “꼬맹이”는 원문의 “wight”-이 wight는 싸움 잘 하는 용맹한 소년을 이른다. 법관이 법정에서 쓰는 가발을 “wig”라고 부른다. Wig의 어원은 “싸움 battle”의 의미를 가졌다. 결투할 때 모자를 쓰는 것과 같은 의미로써 즉 법정싸움은 어느 한 쪽이 이기면 상대방은 죽는 사생결단의 장이므로 정식 재판정에서 판사 변호사가 가발을 쓰는 전통은 결투의 상징성이 들어 있다.
[17] 산업사회의 발전으로 자유방임주의가 팽배했던 당시의 “고용 계약의 자유(the employment at will rule)”, “해고 자유의 원칙(presumption of terminability at will)”을 암시한다.
[18] 주인과 하인의 관계(master and servant relation)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employer-employee)”의 고용 계약 관계를 말한다. 하인 worker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조건은 “정직이고 정당한(honest and lawful)” 명령일 경우에 한해서다. 주인과 하인 사이라고 해도 정당하지 못한 명령이라면 하인이 거부할 수 있었다. 합리성은 인식(recognition)의 문제이고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 한편 1847년에는 유명한 노예폐지론자인 다글라스 Frederick Douglass가 잡지 “The North Star”을 창간하는 등 당시에 노예폐지론은 시대정신으로 높아가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1861-1865년 일어났다.)
[19] 동의 Consent는 합리성에 기반을 둔다. 사람은 자기가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이 자신에게 분배되지 않을 때나 모욕감을 느낄 때 반발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무인정권 시기에서 하극상이 흔히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