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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

by 문무대왕 2025. 4. 14.

삶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다-삶의 의미

 

위대한 성인들은 그들의 삶의 목적은 분명했고 그 자신들의 뜻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겠는가?[1]

 

 뛰어난 의사는 병든 사람이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를 바로 알 수 있고, 훌륭한 지도자는 계획한 일의 성공과 실패를 미리 알아낸다, "良醫知病人之死生 聖主明於成敗之事"(양의지병인지사생 성주명어성패지사),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三).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는데, 실패냐 성공이냐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타율적 입장의 유가의 시각과, ‘나는 해낼 수 있다’ 캔--정신(can-do-spirit)과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는 개척 정신, 긍정적 입장인 도가의 시각과는 실제적으로 그 차이가 존재한다.

 

사마천 이후 2천년의 역사가 흐른 뒤, 외람되게도 저자는 옛부터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총망라하여 그 중 간략하게 고증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 정리하여 사람의 성공과 실패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법칙을 고찰했다.[2] 우주만물의 법칙과 국가와 사람의 운명의 관계를 연구하고 동서고금중외 변화의 역사를 살펴서 최고의 권위가 있는 책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문무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로 요청된다. 문무왕릉비에는 오천년 한국 역사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역사적 진실이 무궁하게 담겨져 있다.

 

이 책은 사라진 성배를 찾아서 생빽쥐빼리의 어린왕자가 갈릴레오의 죽대롱으로 밤마다 화목토금 부열성을 여행하면서 단기필마로 가화 구루마를 타고 추노성지 목석진을 나서 유유히 흐르는 장강[3] 적벽과 삼협의 물살을 타고 진백촉한의 자취를 돌아 백이의 양산과 사마천의 한성과 유자산의 금릉을 배회하고 두백국 회남에 해당화 핀 청와의 토총과 조조 서문표의 눈물방울을 낙랑해로 쏟아내며 모인이 백경을 타고 소요유의 모험에서 얻은 하늘나라 엄부자모로부터의 선물이다.

 

진실을 왜곡하고 가짜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낸 "화랑세기" 등 조작된 책들이 현재 시중에 버젓이 떠돌아 다니면서 거짓과 혼란을 부추기는 말세의 혼탁을 일거에 쓸어 버리고자, 이순신 장군의 맹서문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삼척장검을 들고 하늘 앞에 맹세하니 강산도 감동하여 색깔을 바꾸는도다"의 결기를 담았다.

 

천지만엽은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큰 나무는 여러 가지와 여러 나뭇잎을 달고 있다. 수많은 가지지만 모두 한 줄기에서 나온다. 무릇 도()란 계획관리 경영이고 순서와 계통이 있다. 하나를 깨우치면 온 세상을 얻게 되고 그런 득도는 수천 가지와 수만 나뭇잎을 무성하게 낳는 큰 나무와 같다. 이 말은 회남자의 숙진훈에 나온다.  夫道有經紀條貫 得一之道 連千枝萬葉”. 이 구절을 조금 더 인용하면, “夫道有經紀條貫 得一之道 連千枝萬葉 是故貴有以行令 賤有以忘卑 貧有以樂業 困有以處危 夫大寒至 霜雪降 然後知松柏之茂也”.

條貫(조관)條理(조리), 系統(계통), 질서를 뜻하고, 經紀(경기)는 계획, 관리, 경영하다의 뜻, 行令(행령)은 명령하다의 뜻이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당시에 알았더라면!”: "If only I knew then what I know now, I'd have done things differently."

우리들은 이런 한탄과 후회를 얼마나 자주 했던가? 우리는 단지 뒤돌아 지나서야만이 진실을 알게 되는후회적 존재가 아닐까? 과거를 통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열어가는 인간사의 처절함에 무지가 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장백단-죄없는 타인을 무고하면 안된다

 

불로장생의 단약을 만들어 승천했다는 선인 중에 잘 알려진 장백단이 있다. 장백단은 고기를 매우 즐겨 먹었는데, 어느 날 동료와 대화를 나누다가 구미가 당기면 그가 즐겨먹는 고기를 감춰두었던 옥상 위에 올라가서 가지고 내려올 정도였다. 어느 날 그가 밥을 먹는데 평소 먹던 고기가 보이지 않자 자기집 하인이 훔쳐 먹었다는 생각이 냉큼 들어 그 하인을 불러다 욕을 하고 때리고 말았는데, 그만 그녀는 얼굴색이 창백해지면서 높은 나무에 올라가 비단줄로 목을 매어 자살해 버렸단다. 하지만 그 후에 장백단이 옥상 나무기둥 위로 직접 올라가 보니 썩은 고기가 거기에 있질 않는가! ! 그만 비명을 지를 정도로 충격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착각하고 자기 아랫 사람을 오해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그 하인은 억울하게 목숨까지 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그는 한없는 후회와 한스러움이 걷잡을 없이 교차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이 순간에 홀연히 어떤 깨달음이 들게 되는데, 이 속세의 모든 인연을 정말로 끊어버리고, 목숨을 다해 수양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그는 이 때 그가 다짐한 생각을 담은 시 한편을 남겼는데 그건 다음과 같다.

 

소송 판결문을 쓰는 일을 해온 지
어언 40년 되었네.
그간의 내 직업을 통해서 느낀 점은
이 세상엔 시시비비 건이 수만가지라,
한 집이 배부르고 등 따시면,
다른 천 집이 원망하고,
50
년을 쌓아 올린 명성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허물은 그 두 배로 넘나든다네.
그래서 나는 자주빛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훈장도 버리고,
단지 짚신과 나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마음 가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네.
이런 내게 누가 불로장생하고
영원한 행복이 있는 그 곳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구름은 청산 위에 떠 있고,
달은 하늘 위에 떠 있도다!

 

刀筆隨身四十年 是非非是萬千千

一家溫飽千家怨 半世功名百世衍

紫綬金章今已矣 芒鞋竹杖經悠然

有人問我蓬萊路 雲在山月在天

 

장백단은 그가 터득한 도를 80수 글로 집약할 능력을 가졌고 그래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수련수도는 세상살이 속에서 온갖 고통과 난관을 통해 겪어야 하고, 어려운 세상을 구제할 만큼 높은 덕을 쌓아야 비로소 보통사람의 생각을 죽일 수 있고, 또 그리하여 하늘의 도를 터득할 수 있으며, 그렇게 수신제가를 완성한 후에, 세상의 귀한 초인을 만나 가르침을 전수받고, 영원불멸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초절정 알맹이 하나를 후세에게 남길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제 아무리 수련한들, 이 세상을 구할 진리 하나를 찾기가 쉽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손가?

 

 

우리는 언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최악과 최선이 공존한다. 인간은 상황이 닥치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이다. 명제에 대해서 BC 430년 디오니소스 축제 때 처음 공연된,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외디푸스 왕”으로 한 번 알아보자.

 

“외디푸스”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발이 부르튼 사람”을 뜻한다. 외디푸스 왕은 왜 발이 부르텄을까?  Why? 외디푸스 왕은 원래 이민자이었다.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닌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위험에 처해있는 조국을 건져낸 그는 조국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왕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외디푸스 왕은 조국이 직면한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스핑크스가 질문한 문제를 풀어 내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한편 외디푸스 왕는 결점 또한 많은 인간이었다. 외디푸스 왕은 충동적이고 화를 바로 내는 단점이 있었다. 동구 밖 길을 가로막고 비껴주지 않는 노인을 보고 화가 나서 바로 죽여버릴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인간이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느끼게 되는 점 하나는 알면 다친다는 것 즉 역으로 말하면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 외디푸스 왕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인 조카스타는 그들의 과거사를 아는 순간 자살을 하게 된다. (우리 인간에게 기억이 없으면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술 마시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처벌을 할 수 없지 않는가?) 외디푸스 왕은 목을 매고 죽은 저카스타의 옷에 달린 브로우치로 자기 눈을 찔러 버린다. 

 

자기 운명을 알지 못했다는 후회에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근친상간이라는 점을 깨닫고 벗어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고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외디푸스왕은 두 눈이 먼 심봉사가 어린 딸 심청이를 키운 것처럼, 부모에게 닥친 재앙을 모르는 두 딸 이스메네와 안티고네를 함께 데리고 먼 이국 땅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외디푸스왕처럼, 이민을 가는 목적은 기억에서 해방하고자 함이다. 인간에게 새로움의 삶이란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기약되지 않는 제약조건이 있다. 구구절절하게 사랑했던 소년 소녀가 사귀다 애절히 헤어지면 그동안 간직했던 사진과 편지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지 않았던가? 그것을 생각해 보라.

 

공맹의 말인가? 인간에게는 수오지심이 있다. 스티븐 핑거의 주장인가? 말이 있기 이전에 기억이 있었다. 승리의 기쁨도 수치심도 기억에서 나온다.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서 42.195km의 마라톤 들판을 달려온 연유도, 햄릿의 고뇌도 모두가 기억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작은 잘못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 콘트롤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은 자신의 영역 밖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은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것을 한 순간에 잃어 버릴 수도 있다. 인간은 잘못으로 가득한 죄인이다. 갈대만큼 약한 존재다. 인간은 약점으로 가득차 있고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예언자 지혜로운 사람은 눈이 멀었고 바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전하는 대로 한무제가 고용한 심령의 치유자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인간의 삶 자체가 비극인지도 모른다.

 

“외디푸스 왕”의 마지막 부분 합창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내 동포들이여, 외디푸스왕을 보아라.

그는 뛰어난 머리로 그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내었고

왕의 자리에 올라 세상 최고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의 위대함을 바라보며 어느 누군들 선망을 품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제 칠흑의 밤바다 같은 공포가 그를 삼켜버렸다.

이제 우리가 지켜보며 마지막 날을 기다릴 뿐이니.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죽어서 마침내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외디푸스 왕에서 말하고 하는 것은 무슨 내용일까? 나는 이렇게 보고 싶다. “식자우환”이라는 말처럼 인간은 알면 알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 인간에게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 (It's better not to know.)”

 

“검증되지 않은 삶은 의미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가지는 사람은 동시에 괴로움도 간직한다. 대의(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은 몹시 괴롭고 힘들다는 것을 상기하라.

 

외디푸스왕이 자신이 입양아라는 "과거의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에게 그렇게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기억(memory)의 문제이다. 우리 삶은 기억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삶은 기억이기 때문에 때로는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건너 비로소 행복함을 찾을 수 있다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스핑크스의 퀴즈

 

아침에는 4발로 걷고, 점심때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3발로 걷는 짐승은 누구일까? 그 답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쉬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그 쉬운 답을 어느 누구도 풀지 못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다시피,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성찰은 거의 불가능하고 어쩌면 모순적인 성격에 해당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 분석이 가능하다면 객관적이라는 말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로지 그 수수께끼를 풀어낸 사람은 외디푸스뿐이었다. 외디푸스는 매우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수수께끼에서 “걷는다”는 말이 들어 있다. “외디푸스”라는 말 자체에도 걷는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외디푸스라는 말의 그리스 어원을 보면 외디푸스(Oedipus)’는 “부르튼 발”이라는 뜻이다. 외디푸스는 인간은 많이 걷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foot)은 그리스 라틴어 불어 영어로 모두가 걷다 walk, travel’의 뜻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인생은 걷는 것, 길 위의 방랑자인 것이다. ‘김삿갓이 방랑자인 것처럼, 외디푸스는 그런 방랑의 뜻이 들어 있다.

 

베에토벤처럼 "산책을 많이 하는 사람이 지혜롭다"는 말을 이해하겠는가? 인간은 걷는 존재다.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야 산다. 기억이 쇠진할 때까지. 인간은 “발품”을 팔아가는 존재라는 것. 호머의 오딧세이에서도 주인공은 걷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고행을 마다하고 다시 먼 길을 돌아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영웅은 꼭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명제가 사실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타국을 떠도는 이민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태초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삶은 목적이 아니라 (길 위를 걷는) 과정인 것이다. 제프리 초서의 "순례자"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우리는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다시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한다. 인간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존재다.  어쨋든 "다람쥐 쳇바퀴(treadmill)를 도는 존재". 만보계를 차고서 돌고 도는 인생을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세일즈의 죽음을 달리는 다람쥐 쳇바퀴 인생, 걷고 또 걷는 타박네의 인생이 바로 우리 삶이다.

 

아무리 지혜가 큰 사람이라도 해도, 살아 있는 동안,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바로 그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진실을 찾는 사람에게는 고독하고 그러한 신독의 삶은 바로 고통의 삶을 수반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외디푸스 왕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통에서 해방되기 어렵다"라는 명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통은 실존의 법칙이 되고, 우리 살아 있음의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외디푸스 왕=발품발이=진실된 삶. 진실을 찾는 사람은 헤매인다=방황하는 존재=계속 걸어라=슬퍼할 겨를이 없다=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의 삶을 부딪혀라=카르페 디엠(Carpe Diem)=맨발의 이사도라=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인간은 알아도 문제요, 몰라도 고통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결혼해도 고통이요, 안해도 고통이다, 그렇다면 하는 것이 낫다)으로 말한다면, 알고 나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 보다 낫다. 인간은 선악이 공존하는 존재로서 결자해지를 할 수 있는 존재다. 프로이드가 말한 외부충격적으로 진실을 깨닫는 존재일까? 엘리어트가 제시하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우리의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Fare forward.
앞으로 나아가야만 축복을 받게 된다.
進興.

“진실은 거기에 있다”(The truth is out there.)

 

 


[1] 사기, 자객열전(刺客列傳), 然其立意較然 不欺其志 名垂後世 豈妄也哉 (연기입의교연 불기기지 명수후세 개망야재).

[2] 사마천, 보임소경서, 近自託於無能之辭 網羅天下放失舊聞 略考其行事 綜其終始 稽其成敗興壞之紀.

[3] "滾滾長江東逝水 浪花淘盡英雄" (곤곤장강동서수 랑화도진영웅), 청산은 의구하고 거대한 양자강의 강물은 구비구비 동쪽으로 유유히 흐르는데 부딪쳐 부서지는 큰 강물결에 씻겨 갔는지 옛 영웅들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네, 楊愼 "臨江仙 滚滚長江東逝水 (임강선 곤곤장강동서수).

[4]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연년세세 화상사 세세년년 인부동) 이 구절의 의미는꽃은 해마다 피고지고 같은 모습인데, 사람은 해마다 (늙거나 죽어서) 다른 모습일세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봄 비 그친 강 언덕 위에는 초록 새싹이 활짝 피어나는 정지상의 시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