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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57

『역사 혁명: 문무대왕 유언 비밀 해제』 『역사 혁명: 문무대왕 유언 비밀 해제』 책 주요 내용 요약 이 책에서 밝혀내는 역사적 진실은 고려시대 김부식 일당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역사 조작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로 쓰여진다. 문무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이해를 통하여 삼국사기가 기술하고 있는 부분과의 차이점을 들추어내고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였다는 조작과 표절의 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그것은 삼국사기의 역사 조작의 범죄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증거 스모킹건(smoking gun)이 된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기사에서 문무대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유조문 전문의 전체 글자수는 350자이다. ① 이 중에서 238여 글자의 내용이 거의 전부 당태종 유조문을 그.. 2025. 4. 16.
『문무왕릉비 연구-비문 뒷면』 주요 내용 『문무왕릉비 비문 연구-비문 뒷면』 책 주요 내용 요약 1.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문무왕릉비 비문 번역 해석에 대해 통렬하게 정면 비판하고 새롭고 올바른 해석을 제시한다. 문무왕릉비는 682년에 건립되었는데, 1796년 경주에서 문무왕릉비 비문 파편이 발견되기 전까지 역사상 실종된 상태였다. 문무왕릉비 파편이 발견된지 약 220년 후 그리고 문무왕릉비가 건립된지 1338년이 지난 후인 2020년 오늘에서야 저자의 문무대왕릉비 비문 연구 책을 통해서 문무대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해석과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지금까지 잘못된 번역과 해석이 게재된 국사 교과서의 내용 서술에 대해서 그것들이 즉시 수정되기를 담대하게 요구한다. 저자는 문무왕릉비 비문의 내용을 역사적 사료에 근.. 2025. 4. 16.
『문무왕릉비 연구-비문 앞면』 주요 내용 요약 『위대한 한국 문무왕릉비 연구-비문 앞면』 책 주요 내용 요약 ①문무대왕릉비 비문앞면3행의 “鯨津氏”(경진씨)는 문무왕의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지칭한다. “鯨津氏”(경진씨)가 신라 제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반만년 한국사의 최대의 미스터리가 풀리게 되었다. ②비문뒷면20행에 나오는 “粉骨鯨津”(분골경진)은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한 경진씨”라는 뜻이다. 粉骨鯨津(분골경진)은 국편위의 해석대로의 “경진에 뼛가루를 날리셨네”라는 뜻이 아니다. “鯨津”(경진)은 지금까지 다수가 해석하는대로의, ‘어느 바닷가 포구’를 말하는 지명이 아니다. “鯨津”(경진)은 문무대왕릉비 비문앞면3행의 “鯨津氏”(경진씨)를 지칭한다. “嗣王允恭”(사왕윤공)의 의미대로 문무대왕이 태종.. 2025. 4. 16.
English abstract English abstract Koreans are descents of “Toohoo”(秺侯) as it is written in the inscription on the tomb of King Moonmoo. Who were the ancestors of the Korean people? The purpose this book is to seek a historical answer to this bold question about the Beginnings of Korea's History. This book draws the historical conclusion that “Toohoo”(秺侯) is “Sanggu Sung”(商丘成), not “Kim Ilje”(金日磾). This book tran.. 2025. 4. 16.
마무리 18. 마무리 한국인은 문무대왕릉비문 속에 적혀 있는대로 “秺侯祭天之胤”(투후제천지윤)이다. 한국인의 선조 “투후”(秺侯)는 누구인가? 이 담대한 의문에 대한 역사적인 해답을 추구한 것이 이 책의 발간 의도이고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은 “秺侯”(투후)는 金日磾(김일제)가 아니라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이라는 역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 이를 입증하는 역사적 기록들을 한글로 번역해석하고 논했다. 투후 상구성임을 가장 결정적으로 증거하는 반악의 서정부에 나타난 “秺侯之忠孝淳深”(투후 지충효순심) 단락을 번역 해석하고 논했다. 당나라 이선의 문선 주해에서는 투후를 ‘김일제’로 해석했지만 추홍희는 투후는 ‘상구성’을 지칭한다고 주장하며 이선의 주해를 자세하게 반박하였다. 또 당나라 이선은 “被髮左袵奮迅泥滓”(피.. 2025. 4. 16.
일본의 한반도 침략 일본의 한반도 침략 역사의 배경 역사상 일본은 한반도를 대략 4번 침입했는데, 그 첫 번째가 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 도래, 두 번째가 백제 멸망직후 백제의 재건을 노린 오늘날 장항 군산 지역인 백천강 전투, 3번째가 풍신수길의 임진왜란이었고, 4번째가 한일합방으로써 조선을 식민지 지배에 성공하게 된 역사적 과정이 있다. 한일합방은 일본의 침략 입장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둔 일이었는데 그것은 실패했던 임진왜란을 교훈삼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군사적 공격의 필요 없이 상대방의 실수와 물밑 작업을 통하고 점진적인 방법으로써 목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 한반도 남부 접근로 확보를 목적으로 했던 신공황후 때의 출병은 목적 달성에 반반의 성공을 한 것으로 간주되고, 두 번째의 출병은 당나.. 2025. 4. 16.
47인 아코 무사 할복 사건 “충신장” 제1막 내용 “충신장” 제1막 무대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무로마치 막부 말기 스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1막의 무대 배경은 학이 소나무 언덕을 노닐고 있는 병풍 그림이 있는 “鶴岡八幡宮”(스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벌어진다. “충신장” 제1막의 내용을 짧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역사적으로, 1338년 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토벌하고 교토에 거처를 마련한다.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스루가오카 하치만궁을 짓고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파견 진주시켰다. 이 궁을 지키고 있는 책임자는 고노 모로나오, 모모이 와카사노스케, 엔야 한간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실제 인물들이고, 충신장의 이야기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기록한 “태평기”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1701-.. 2025. 4. 16.
충신장 서두에 인용된 육가의 신어 17 충신장 서두에 인용된 육가의 신어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맛을 알 수가 없다- 雖有嘉肴 弗食不知其旨也“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맛을 알 수가 없고, 쓸모없이 버려지고 만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도 이와 같으리라. 비록 평화의 시기라기는 해도 무사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담대한 용기가 알려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늘의 별은 낮에는 해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온 하늘에 흩어져 총총히 빛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1] “雖有嘉肴,弗食,不知其旨也;雖有至道,弗學,不知其善也。是故,學然後知不足,教然後知困。知不足,然後能自反也;知困,然後能自強也。故曰:教學相長也。《兌命》曰:「學學半」其此之謂乎?”, 《禮記·學記》, 禮記卷十八. 이 “예기.. 2025. 4. 16.
문무왕릉비 비문 원문 16. 문무왕릉비 비문 원문 비문 앞면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及飱國學少卿臣金□□奉□敎撰□□□□□□□□□□□□通三後兵殊□□□匡□配天統物畫野經圻積德□□匡時濟難應神□□□□□靈命□□□□□□□□□□□□□□□派鯨津氏映三山之闕東拒開梧之境南鄰□桂之□□接黃龍駕朱蒙□□□□承白武仰□□□□□□□□□□□□□□閒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超三□□巍蕩蕩不可得而稱者□□□□我新□□□□□□□□□□□□□君靈源自敻継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枝載生英異秺侯祭天之胤傅七葉以□□□□□□□□□□□焉□□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地□□□方卷蹟停烽罷候萬里澄氛克勤開□□□□□□□□□□□□□□□當簡□之德內平外成光大之風邇安遠肅□功盛□□□於將來.. 2025. 4. 15.
문무왕릉비문 "秺侯 祭天之胤" 투후 제천지윤 해석 15 문무왕비문 비문앞면 제5행 秺侯 祭天之胤 투후 제천지윤 □□□□□□□□□□□□□□君靈源自敻継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枝載生英異秺侯祭天之胤傅七葉以□ 국편위 번역: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추홍희 해석: (우리 신라 사람들은 삼황오제의 후손들이다). 까마득한 옛날까지 올라가서 조상의 뿌리를 찾으면, 창성한 왕업을 화관지후에게 이어받게 하고, (불의 임금님-화후는 요임금인데, 제곡 고신씨는) 요임금님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방정하고 드높은 구조물들을 건설하며 사방으로 반듯하게 뻗어 나갔다.. 2025. 4. 15.
유득공의 "투후 제천지윤" 해석 1. 유득공의 투후 제천지윤 해석 유득공(柳得恭)은 그의 古芸堂筆記(고운당필기)권6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𥞒侯 祭天之胤 傳七葉 云云 依倚考其上下文義 似敍其世次也 然則以鷄林之金爲金日磾之金歟” (투후 제천지윤 전칠엽 운운 의의고기상하문의 사서기세차야 연즉이계림지금 위김일제지금여)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𥞒侯 祭天之胤 傳七葉”(투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구절을 적고 있는데 이 문장의 앞 뒤 선후 관계를 따라 문장의 뜻을 살펴보면 아마도 조상의 세대를 적고 있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金日磾의 金이 계림(鷄林)의 김(金)이지 않을까?” 유득공(1748-1807)의 견해는 1760년 영조(재위 1725-1776) 36년 경주부윤이 된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가 탁본한.. 2025. 4. 15.
투후는 𥞒侯(투후)인가 14. 투후는 𥞒侯 (투후)인가? 1. 𥞒侯 (투후/타후) 金日磾(김일제)북송(宋) 때 977-984년 사이에 편찬된 사서 太平御覽(태평어람)의 관직(職官部) 시중(侍中) 편에서 金日磾(김일제)를 𥞒侯(투후)로 봉했다는 삼보고사의 기사를 인용해 놓았다: 《三輔故事》曰 金日磾字翁叔 封𥞒侯 有忠勤之節 七葉侍中 (삼보고사 왈 김일제 자 옹숙 봉 투후 유 충근지절 칠엽시중).金日磾字翁叔 封𥞒侯 有忠勤之節 七葉侍中김일제의 본명 이외의 흔히 부른 이름 자는 옹숙이었고 𥞒侯(투후)의 봉작을 받았다. 그는 충성심이 깊고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근무한 예의를 갖춘 사람이었고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피는 궁정내시라는 높은 관직을 지냈다. 시중(侍中)시중(侍中)은 진(秦)나라 때부터 설치한 관직이름으로 왕의 .. 2025. 4. 15.
영조 실록 김일제 거론과 탕평책 11. 영조 13년 김일제 거론과 탕평책영조실록 45권, 영조 13년 윤9월 3일 무오 2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주강과 석강을 행하다. 인재 등용을 위해 임금이 자성할 것을 다짐하다 영조실록 45권, 영조 13년 윤9월 3일국편위 번역行晝講 又行夕講 上曰: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今世取人 專以門閥科甲 如是而得人才乎 朝著之間 亦必有可用之材 而予旣無恭默思道之誠 不能得築巖之良弼 又乏則哲之明 不能如漢帝知金日磾 是宜自反 而以人事君 專在廟堂 其勉之"지금 세상에서는 사람 뽑는 것을 오로지 문벌(門閥)과 과거(科擧)로 하는데, 이렇게 하여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조정 사이에 또한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나, 내가 이미 공묵(恭默)하게 도(道)를 생각.. 2025. 4. 15.
김일제 충효순심 한조막급(金日磾忠孝淳深 漢朝莫及) 해석 10. 宋書와 南史의 두기(杜驥)전에 기록된 김일제 충효순심 한조막급(金日磾忠孝淳深 漢朝莫及) 해석 유유(劉裕, 363-422): 송무제(宋武帝) 405년 환현(桓玄)을 격파하고 420년 송(420-479년)나라를 건국하고, 권문세가를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책을 추구했다. 전란으로 시대가 혼미하고 인구이동이 잦았던 남북조 시대에 막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주해온 두기 형제는 권문세족으로서 유명한 서진의 진남장군 두예(杜預, 222-285)의 후손이었고 군벌 유유(劉裕)의 정벌에 참여하였지만 전전하며 막차를 탄 바람에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지 못함을 탄식했다. 어느날 유송의 3대 황제 유의륭(宋文帝劉義隆, 407-453)과 김일제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다음과 같다. 《宋書》 沈約(441-513, 蕭梁),《.. 2025. 4. 15.
우희제 “石碏論” 9. 우희제(牛希濟, 872년─?), “石碏論” 衛莊公寵州吁也,且又縱之。石碏諫曰:「臣聞愛子,教以義方,弗納於邪。驕奢淫佚,所自邪也。四者之來,寵祿過也。君若與之即將定,若猶未也後將悔。」公不聽,州吁竟殺其君而自立。石碏之子厚與籲遊,禁之不可。春秋之世,有弒君之子,或朝於王,預諸侯之盟,不複加討。是以厚問定君於石子,曰:「王覲為可。」曰:「何以得覲?」曰:「陳桓公方寵於王,若朝陳使請,必可得也。」厚從州吁如陳。石碏使告於陳曰:「衛國褊小,老夫耄矣。此二人者,實弒寡君,敢即圖之。」陳人執州吁於濮。石碏使其宰獳羊肩蒞殺石厚於陳。君子曰:「石碏純臣也。愛其君而厚與焉,大義滅親。」其是之謂乎?父子之道,天性也;君臣之道,人義也。石子諫莊公也以義方,教子厚之為也,無義方之訓哉。且厚非弒君之謀,為亂之首,州吁既立,仍從之遊,州吁之為君也,命石子遊。必將從之,況於厚乎?己為大臣,國有亂賊,而.. 2025. 4. 15.
宋書 傅隆전 “秺侯何得流名百代”(투후하득유명백대) 8. 송서(宋書) 부융(傅隆)전 “秺侯何得流名百代”(투후하득유명백대) 의미 해석 대의멸친의 봉건법 질서를 석작과 김일제를 예로 들고 설명하고 있는 송서 부융전 기록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宋書·傅隆傳》“秺侯何得流名百代” 구절번역 해설 傅隆(부융)(369-451년): 남조 송(宋)나라 때 문신. 남조 송나라는 군벌세력인 송무제 유유(363- 422년)가 동진을 쓰러뜨리고 세운 나라로 420- 479년간 존속했다. 將父子孫祖 互相殘戮 懼非先王明罰 咎繇立法之本旨也 向使石厚之子 日磾之孫 砥鋒挺鍔 不與二祖同戴天日 則石碏 秺侯何得流名百代 以為美談者哉부자지간에 할아버지와 손자지간에 서로 죽여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고도씨가 법을 만든 근본적인 취지였다. 예컨대.. 2025. 4. 15.
한서 김일제전 번역 6. 한서 김일제전 번역 김일제는 어떻게 투후가 되었는가?BC 121년 여름. 곽거병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련산 일대를 공략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3만 이상을 사살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노획했다. 흉노의 선우가 패배에 대한 책임을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묻자 이들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작정하였다. 투항하기 전에 휴도왕이 마음을 바꿔 동조하지 않자 혼야왕이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군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磾)와 그의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잡혀왔다. 이들은 교외 밖에서 궁정용 말을 키우는 노예의 천한 일을 맡았다. 그러던 중 무제가 연회를 베풀며 달리는 말을 사열하는 과정에서 꼿꼿한 자세를 견지한 일제를 발견하고 그를 궁.. 2025. 4. 15.
사기 년표 투후 김일제 秺侯 金日磾 13. 투후 김일제 1. 사기 년표 《史記•年表》 투후 김일제 秺侯 金日磾 사기 년표에 다음과 같은 김일제를 투후로 봉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後元元年 二月己巳,光祿大夫霍光為大將軍 博陸侯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秺侯 太僕安陽侯上官桀為大將軍 후원원년 이월 기사일 광록대부 곽광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박륙후에 봉하고, 도위 김일제를 거기장군에 임명하고 투후에 봉하며, 태복 안양후 상관걸을 대장군에 임명함. 2. 한서 서전하(敘傳下) “秺侯狄孥”(투후적노) 해석 한서 서전하(敘傳下)에 “秺侯狄孥 虔恭忠信 奕世載德 貤于子孫” (투후적노 건공충신 혁세재덕 이우자손): 투후는 적(敵)의 자식으로, 성실하고 정성을 다해 충성을 바치고 믿음을 지켰고. 누대에 걸쳐 대대로 덕을 쌓고 자손 대대로 이어졌.. 2025. 4. 15.
무고지화 자치통감 기록 무고지화 자치통감 기록 資治通鑑, 한무제 정화3년자치통감(辛卯)三年,春正月,匈奴寇五原、酒泉。三月,遣李廣利等將兵擊之。한(漢)나라 한무제 정화 3년, 봄 정월에 흉노가 오원과 주천을 침입했다 삼월에 이광리(李廣利)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물리치게 하였다.夏,赦여름에 사면(赦免)을 단행했다.發西域兵擊車師,盡得其王、民卸。서역(西域)의 군대를 징발하여 거사국을 공격하게 해서 그 왕과 백성의 무리를 모두 사로잡아 돌아왔다.六月,丞相屈氂棄市。李廣利妻子下吏。廣利降匈奴,詔族其家。6월에 승상 유굴리(劉屈氂)가 기시(棄市)형을 당하고 이광리의 처자식은 옥리에 회부되었다. 이광리가 흉노에 항복하자 황제의 명령으로 그의 종족을 멸하였다.初,貳師之出也,丞相劉屈氂為祖道,送至渭橋。廣利曰:「願君侯早請昌邑王為太子;如立為帝,君侯長何.. 2025. 4. 15.
한서 유굴리전에 기재된 투후 상구성 기록 한서 공신표에 기록된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여태자의 무고의 반란을 진압 타도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은 상구성과 마통 그리고 경건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봉작 사실을 적고 있는 한서의 기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무제소제선제원제성제 공신표》 시호성명제후 후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봉읍지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대홍려 직위에 있던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하고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했다.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 2025. 4. 15.
무고지화(巫蠱之禍) 12. 무고지화 무고(巫蠱)의 뜻무고(巫蠱)는 무술사(巫師)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저주와 해를 입히는 행위를 말한다. 蠱(고)의 한자 고어체는 인데 글자모양처럼 벌레 먹은 것 즉 고독무술(蠱毒巫術, poisonous magic)을 의미한다. 증거를 날조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헐뜯는 무고(巫蠱)는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서의 “吊 戾園 于 湖邑 諒遭世之巫蠱”(조려원어호읍 량조세지무고) 구절 표현처럼 BC 91년에 일어난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 사건을 가르키기도 하다. 반악의 서정부 무고지화 구절 반악 서정부 구절문선 이선 주弔戾園於湖邑 諒遭世之巫蠱 探隱伏於難明 委讒賊之趙虜 加顯戮於儲貳 絕肌膚而不顧 作歸來之悲臺 徒望思其何補〈漢書曰:戾太子據與江充有隙。會巫蠱事起,充遂至太子宮,掘得桐木人.. 2025. 4. 15.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기(韓暨) 번역 11.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기(韓暨)(150년대-238년)번역 韓暨字公至,南陽堵陽人也。楚國先賢傳曰:暨,韓王信之後。祖術,河東太守。父純,南郡太守。同縣豪右陳茂,譖暨父兄,畿至大辟。暨陽不以為言,庸賃積資,陰結死士,遂追呼尋禽茂,以首祭父墓,由是顯名。舉孝廉,司空辟,皆不就。 한기(韓暨)는 자가 공지(公至)이고 남양군(南陽郡) 도양현 사람이다. 초국선현전에 이르길 한기는 한왕신(韓王信)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한술(韓術)은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었고, 아버지 한순(韓純)은 남군태수가 되었다. 같은 현의 큰 호족세력 진무(陳茂)가 한기의 부친과 형을 헐뜯고 중상 모함하여 이들은 사형을 당했다. 한기는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금을 주고 고용하여 자금을 축적하여 죽음을 각오한 자객들을 남몰래 모아서, 마.. 2025. 4. 15.
한왕신(韓王) 한신(韓信) 10 한왕신(韓王) 한신(韓信) 太史公曰:韓信、盧綰非素積德累善之世,徼一時權變,以詐力成功,遭漢初定,故得列地,南面稱孤。內見疑彊大,外倚蠻貊以為援,是以日疏自危,事窮智困,卒赴匈奴,豈不哀哉! 陳豨,梁人,其少時數稱慕魏公子;及將軍守邊,招致賓客而下士,名聲過實。周昌疑之,疵瑕頗起,懼禍及身,邪人進說,遂陷無道。於戲悲夫!夫計之生孰成敗於人也深矣!【索隱述贊】韓襄遺孽,始從漢中。剖符南面,徙邑北通。穨當歸國,龍雒有功。盧綰親愛,群臣莫同。舊燕是王,東胡計窮。태사공 사마천 저자의 의견:“한왕(韓王) 한신(韓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은 본래 조상 대대로 공덕을 쌓고 베푼 집안이 아니며, 한때의 임기응변식 요행과 사술로 공을 이루고, 한(漢)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그 시기를 타서 개국공신이 되어 봉지를 받고 제후국의 왕조를 열었다. .. 2025. 4. 15.
투후 상구성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유 투후 김일제는 잘 알려진 반면 투후 상구성은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한 사람이다. 상구성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측이었으므로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서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무고지화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하고, 소문은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하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하고, 망통, 망하라, 경건 등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한무제가 죽은 뒤, 조정권력은 곽광 김일제 상홍양 상관걸의 탁고대신 사인방이 차지하고 득세하게 되었다. 투후 상구성은 사서에 단독적 전기가 실려 있지 않고, 반란죄로 삼족이 멸한 유굴리 전기 속에 몇 개 사실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투후 김일제의 전기는 곽광과 함께 한서.. 2025. 4. 15.
투후 상구성(商丘成)은 누구인가 9. 투후 상구성 전기 투후 상구성(商丘成)은 누구인가? 투후 상구성 전기 상구성(商丘成)은 성은 상구(商丘) 이름은 성(成)이다. “열선전”에 상구자서(商丘子胥)라는 선인이 소개되어 있고, 상구는 복성이다. 상나라의 수도가 상구였다. 투성이 위치한 성무현이 이 근처이고 오늘날 산동성 하택(荷澤)시 부근이다. 상구성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대홍려와 어사대부를 지낸 관직 경력과 무고의 난 때 한고조 묘지기를 지낸 전천추(?-BC 77)의 기록을 통해서 대략 추측해 보면 BC 2세기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한서 기록에 따르면 한문제(BC 202-BC 157) 묘지기 첨사로 재직 중 설화를 입어 BC 88년 황제에 대한 불경죄의 판결이 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구성은 “大鴻臚”(.. 2025. 4. 15.
서정부에서 열거한 인물 리스트 1.    서정부 단락에서 열거한 인물 리스트 역사를 회고해 보면 소하조참 위상병길이런 명재상들과 蕭何(소하)蕭何(소하, ?-BC 193) 강소성 출신으로 유방이 한나라를 개국한 후 소후(蕭侯)에 봉해지고 승상에 올랐다. 나라의 기틀을 정한 여러 법률을 제정한 법률가이었다.  曹參(조참)曹參(조참, ?-BC 190) 강소성 출신 재판 담당 관리로 출발하였는데 유방 밑에서 군사전공을 세웠다. 개국공신으로 평양후에 봉해졌다. 소하의 승상 자리를 이어받고 그의 국정철학을 그대로 펼쳤다. 魏相(위상)魏相(위상, ?-BC 59)은 BC 66년 한선제 때 승상에 발탁되었고 고평후에 봉해졌다. 易經(역경)에 밝았다. 한서 반고가 위상과 병길을 “유방의 한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으뜸 공신은 소하와 조참이었고, 한선제.. 2025. 4. 14.
국문초록 1.    국문초록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속의 “秺侯”(투후)는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金日磾)가 아니라 동이족 출신의 “商丘成”(상구성)을 가르킨다. 지금까지는 투후를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순한 김일제라고 해석한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필자는 한서 유굴리전과 한서공신표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투후는 “商丘成”(상구성)임을 최초로 제시하고 해설하였다. 또 반악의 “西征賦”(서정부) 속의 “秺侯之忠孝淳深”(투후지충효순심)의 투후는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임을 문언해석적으로 입증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흉노족의 후예”라는 가설을 역사학적으로 통박하고, 신라는 상나라 동이족의 후예라는 역사적 사실을 문언해석적으로 입증하였다. “투후 상구성”은 한서와 자치통감에도 실려 있.. 2025. 4. 14.
영문초록 1.    영문초록 “秺侯” (Toohoo) in the tombstone of King Moonmoo of 682 year is not Kim Il-je, but “Sanggu Sung”.In this essay, it is proposed that “秺侯” (Toohoo) in the tombstone of King Moonmoo is “商丘成” (Sanggu Sung) from the Dongyi tribe, not Kim Il-je (金日磾) from the Xiongnu tribe. Up until now, many argue that the Toohoo was interpreted as Kim Il-je, who was born as the prince of the Xiongnu tribe a.. 2025. 4. 14.
장건과 소무를 같이 한 묶음으로써 거명한 이유 1.    장건과 소무를 같이 한 묶음으로써 거명한 이유 銜使則蘇屬國,震遠則張博望;教敷而彝倫敘,兵舉而皇威暢 서정부에서 震遠(진원)이라고 표현한 배경은 먼 서역국가들에 파견되어 힘을 바탕으로 한 외교술을 펼친 장건의 경력을 두고서 한 말이고, 이런 장건을 소무와 함께 한 구절로 포함시킨 배경에는 소무가 19년 동안 흉노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는데 먼 북방 호수에서 격리 구금되었어도 전향하지 않고 끝내 돌아와 한나라를 위해서 봉사한 사실과 같이 장건 또한 11년 동안 흉노에 억류되었어도 굴복하지 않고 되돌아와 외교술을 펼친 사실이 있다. 적국이 쳐들어오는 상황이나 적국으로 깊숙이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의 큰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사람이 소무와 장건이었다. 이들은 적국에 인질로 붙잡.. 2025. 4. 14.
투후와 육가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1.    투후와 육가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臨危而智勇奮,投命而高節亮。暨乎秺侯之忠孝淳深,陸賈之優游宴喜 위기를 맞이하여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절개를 드높인 충신에는 충효지심이 돈독하고 깊었던 투후가 있고, 은퇴하여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즐긴 육가가 있다,  육가(陸賈, BC 240-BC 170)는 초나라 출신으로 정치외교가이었다. 한나라 건국 공신으로 잘 알려진 장량이 군사상 책략가라면 육가는 외교술의 대가에 속했다. 육가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망한 주요 원인과 한나라의 건국의 배경을 이론적으로 심층 분석하여 한나라의 통치술을 ‘문무 병행’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신어”의 저자이다. 육가는 유가적 문치주의에 경도되기 보다는 “行仁義 法先聖”(행인의법선성)의 .. 2025.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