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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死生契闊(사생계활)

by 문무대왕 2025. 4. 14.

死生契闊(사생계활)

 

가을은 복받은 최고의 계절이다. Why? 보라, 추수감사절이 언제 어디에 있는가를? 춘생 하장 추수 동장(春生 夏長 秋收 冬藏)이라는 옛말이 있다. 이 황제내경에 나오는 말이 자연질서의 법칙 하늘의 이치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가을의 본령 그 뜻을 가장 잘 표현한 최고의 시인은 반악이다. 반악의추흥부를 읽고 감상해 보면 누구도 단정에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산길은 도로 주행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굽이굽이 돌고 돌아 가는 길 기복이 많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등산을 일본어로爬山”(하우)라고 말하는데, 여기의 파산-‘글자가 기어오르다, 파충류자이다.

 

대개 사람들이 힘들 때 슬픔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힘든 노동에 지칠 때 노동요를 부르듯이 말이다. 이런 대개의 사정을 잘 표술해 낸 유신의 구절窮者欲達其言 勞者須歌其事”(궁자욕달기언노자수가기사) 생각난다. 

 

사마천은 임소경에게 부치는 편지에서人情莫不貪生惡死 念父母顧妻子 至激於義理者不然 乃有所不得已也이라는 말을 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부모를 생각하고 하고 처자를 돌보고자 하며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하지 기꺼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인지상정을 먼저 꺼내 말해 놓고 다만 인간적인 정을 뛰어넘어 의리에 죽고 사는직업적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 취해야 하는 과감한 행동을 담대히 밝혀 놓은 것이다. 이런 직업적 의무론의 구체적 사례는 소방관에서 나타난다. 화마의 현장에 갇힌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 불길 속으로 뛰어 드는 소방관의 행동은 오로지 직업적 의무만으로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사마천의 삶의 자세는 사관으로서의 역사와 진실 전달의 충실한 사명을 지켜내는 것에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호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게 만들지 산자와 죽을자를 순간적으로 결정하는 최후의 선택을 결단해야 하는 선장의 행동은 오로지 선장으로서 요구되는 그의 직업적 의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사람은 타고난 각자의 몫에 따라서 요구되는 삶이 결정되는데,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각자 가진 직업의 몫에 따라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이순신처럼사즉생의 선택을 할 것인가는 인간적인 정리에 죽음의 회피 심리에 따른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보다 큰 국가와 사회 차원의 순간적이고 의무적인 선택인 것이다. 허리춤에 찬 지갑을 훔친 좀도둑은 사형당하지만 나라를 훔친 큰 도둑은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장자의 절구절국(竊鉤竊國) 비유가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 통하는 우리 인간 사회의 고무줄 잣대의 비판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마천이 말한不得已”(부득이)한 사정이 인정되는 것이 바로 긴급피난, 정당방위, Necessity 이론이다. 

 

최근에 2011년판 프랭클의 책 서문을 다시 읽어봤는데, 그는 삶의 의미를 직업적 소명에서뿐만 아니라 사랑 그리고 어려움에 직면해서 갖게 되는 용기에서도 찾아진다고 진단했다. 특수한 사람의 소명이든 일반 평범인에게서든 하나님께서 비범한 영웅적 삶을 드러낼 때는 누구든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조건은 히포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가 잘 논증해 놓았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의 생각 먹은 대로 일이 굴러가거나 성공되지 않을 때나 그런 한계에 부딪힐 때엔 애상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먼 여행을 한 번 가보라. 영국의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의 책에서 미국의 알팔라치 산맥의 160킬로 산림 종주 여행 이야기를 관심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 나는 이 번 100킬로 산속 여행길을 4박으로 다녀왔다. 사방 100마일 이내에 주막이나 인가나 사람이나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문명 세계와는 전연 격리된 황야의 윌더니스 속을 걸었다. 그렇게 인간사회와는 멀리 떨어진 자연 속으로 머나먼 여행길을 가보라. 

 

이 드넓은 자연 속에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면서 비장미를 느낄 것이다. 마치 하늘 끝 별을 딸 것 같은 높고 가파른 산을 올라 보라. 공자는 등태산의 심정을 감개무량으로 표현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방법론을 제시했지만 우리 보통사람들은 좌절감과 두려움과 애상감이 먼저 느껴지지 않던가?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면 신선처럼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는 착각을 느끼며 합일의 감정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저 높은 폭포수를 오를 수 없는 비애감이 함께 솟아 나기도 한다.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큰 강을 만날 때 그 때 강을 나무 그네를 타고서라도 넘을 수 없는 큰 강 앞에 직면했을 때 이룰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을 때 실패의 애수를 느낄 것이다.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의 그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을 어떻게 달랠 수가 있던가? 먼 여행길, 큰 산을 오른 것, 건널 수 없는 강을 직면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이런 경우에 찾아드는 슬픔과 애상 우수와 서운한 마음은 가누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애절한 분위기를 느낀다. 대중가요 가을엔 떠나지 말라는 노래가 그것을 잘 표현한 것 같은데.  사람의 슬픈 감정은 초사가 원초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와같이 반악은추흥부에서 초사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草木搖落而變衰 慄兮若在遠行 登山臨水送將歸

 

슬프구나, 가을의 분위기는! 쓸쓸한 소슬바람이 불고, 그것에 나뭇잎이 흩어져 날리고 떨어짐을 보노라면, 우리들 또한 변하고 시들어감을 느낀다네. 이 외롭고 처량한 감정은 먼 여행길, 큰 산을 오를 때, 건널 수 없는 강을 직면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그런 비장하고 애잔하고 서운한 마음과 같이 가누기 힘들 것 같으니.

 

나를 키운 시작은 위고이었고 중년은 셰익스피어이었으며 내 장년은 멜빌이었다. 그간 날 단련시키고 완성시킨 것은 반악과 유신의 글이었다. 사마천의 말대로, 사람은 대개 힘들면 부모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없다. 공양전대로, 대저 사람들은 배고프면 밥달라고 타령하고, 노동할 때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유신의 窮者欲達其言(궁자욕달기언) 구절대로, 실패한 사람은 그것을 말로써 설명하고자 원한다. 인생의 극단적인 끝까지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밖으로 표현해 내고 싶은 일반적인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를 세상에 드러내어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들은 성인이라고 부른다. 실패에서 느낀 비분강개함을 역사적 기록으로 풀어낸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 손자 등의 성인 공식을 사마천은 열거하고 설명해 놓았다. 

 

뉴튼, 아인슈타인, 빅뱅이론으로도 밝혀지지 않았는가? “물급필반인데, 삶의 마지막 극단적인 끝지점까지 가보지 못하고서야 어찌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수 것인가? 이런 조건은 노자 도덕경에 이미 단언되어 있다. 최신의 이론으로 치자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 남은 빅토르 프랭클의 삶의 의미론일 것이다. 누구든지 죽음에 처해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황이 된다. 마태복음 19장 예수님의 말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이 선언을 성 어거스틴의고백록에서 다시 확인해 읽었다. 담대한 고백 어거스틴의 이 조건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다시 확인했다. 로마에서 아씨시의 교회를 찾아갈 때의 그 뜨거운 여름날을 난 아직도 열정적으로 감격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처럼 선명하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자기 가진 모든 재산을 다 나눠주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탈리아의 르네쌍스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성인들처럼 내 스스로의 결단으로써 내가 하이데거의 개념인 끔찍한 내팽개쳐짐 내던져짐(Geworfenheit)의 상황에 처이고 그 순간 진실을 발견했다고는 말하기 힘들 지 모르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던져지고 동아줄마저 벗어 놓고 하나님의 손안으로 떨어질 때 그동안 찾았고 구했던 보배가 손에 쥐어짐이 느껴졌다. 따라서 이것은 나의 운명이고 필연이고 역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찌 곤궁할 때 저술한 공자의 춘추에 비견할 수가 있겠으며, 죽음을 시사여귀로 여기고 목숨을 버린 굴원 같은 충신의 이소부에 가깝겠으며, 눈이 어두워진 후에야 국어를 편찬한 좌구명을 따를 수가 있겠고, 다리가 잘린 후에야 쓴 손자병법만큼 체계적일 수 있겠고, 한비자나 삼경만큼 인구에 회자될 수 있겠는가? 다만 사마천과 양온이 남긴 두 통의 편지를 끝내 흠모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고자 할 따름이다.

         

하늘은 영원한 침묵을 이어간다. 영원한 우리 삶에서 죽고 사는 것은 영원한 바다에 끝없이 밀려왔다 쓸려가는 밀물과 썰물 같은 것, 유신이 시경의 구절을 인용한 바대로, “生死契闊”(생사계활) 즉 삶과 죽음은 서로 떨어져 분리된 관계가 아니라 어디가 앞뒤인지 알 수 없는 혼돈된 카오스 상태이므로,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인지 살다가 죽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관계이다. 파도는 맞물려 돌아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우리는 분명히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들의 부모는 또 어디에서 왔다는 말인가? 삶과 죽음의 관계는 이렇게 불가분 맞물려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하늘은 영원히 침묵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순례자처럼 끝없는 우주 여행을 할 뿐! 

 

굴원이하늘에 묻는다가 아니라천문이라고 표현한 것 같이死生契闊不可問天”(사생계활불가문천)이기에, 내가 앞서간 조상들에게 감히 여쭈어 볼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제 아무리 생사의 간격이 큰 현재의 나와 과거의 선조들간의 시간적 틈이라고 해도 과거는 현재와 끊임없는 대화로 지금 함께 같이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닌가? ‘화복이 함께 숨어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인생관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이란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면 미래의 내 후손에게 나의 삶을 답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누구에게 물어야 할 의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내려야 할 실존적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앞에 선 단독자로서 내 스스로 내려야 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적 고뇌 즉자적 자세에 해당한다. 뱃사람 김춘추가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항해의 두려움을 떨쳤듯이 윤동주와 오스카 와일드의 밤하늘의 별이 그렇듯이 말이다. 고갱의 물음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싶다면 말이다. 역사란역사가와 사실 팩트간의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 즉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라고 말한 카아, 스미스, 흄의 역사의 개념에 따라 봐도 그렇지 않는가? 

 

사과 그림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할 거라는 세잔느의 장담이나 제임스 성경 번역의 학자들이 몰고 온 숨겨진 세계 변혁이나 비밀에 닫혀진 코페르니쿠스의 일화 같은 것은 차치하고서,

꽃은 해마다 피고지고 같은 모습인데, 사람은 해마다 다른 모습일세”.[1]

 

만약 자설과 문무왕이 보면 만시지탄, 간적과 선덕왕 이세민과 무측천이 보면 염화미소 대견해할 것이며, 막스 베버 토인비 헤겔, 장형과 갈릴레오, 사마천과 양운, 반악과 유신, 유백온과 장백단, 안평대군과 이율곡과 정지상과 추사와 조동탁이 내 미천한 글을 읽고 박수쳐 주면 그저 감사할 뿐이고 아니 비웃고말면 그건 못난 비재 나의 전적인 책임일 것이다.



[1]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연년세세 화상사 세세년년 인부동) 이 구절의 의미는꽃은 해마다 피고지고 같은 모습인데, 사람은 해마다 (늙거나 죽어서) 다른 모습일세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봄 비 그친 강 언덕 위에는 초록 새싹이 활짝 피어나는 정지상의 시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