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영조 13년 김일제 거론과 탕평책
영조실록 45권, 영조 13년 윤9월 3일 무오 2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주강과 석강을 행하다. 인재 등용을 위해 임금이 자성할 것을 다짐하다
영조실록 45권, 영조 13년 윤9월 3일 | 국편위 번역 |
行晝講 又行夕講 上曰: |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今世取人 專以門閥科甲 如是而得人才乎 朝著之間 亦必有可用之材 而予旣無恭默思道之誠 不能得築巖之良弼 又乏則哲之明 不能如漢帝知金日磾 是宜自反 而以人事君 專在廟堂 其勉之 | "지금 세상에서는 사람 뽑는 것을 오로지 문벌(門閥)과 과거(科擧)로 하는데, 이렇게 하여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조정 사이에 또한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나, 내가 이미 공묵(恭默)하게 도(道)를 생각하는 정성이 없어 축암(築巖)의 어진 보필[1]을 얻지 못했고, 또 명철한 지감(知鑑)이 부족하여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김일제(金日磾)[2]를 알아보는 것에 미치지 못했으니, 스스로 반성함이 마땅하다.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은 오로지 묘당에 달려 있으니, 힘쓰도록 하라."하였다. |
[1] 축암(築巖)의 어진 보필: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 어진 재상인 부열(傅說)을 말함. 고종이 꿈에 성인(聖人)을 보고는 온 나라에서 찾도록 했는데 부암(傅巖)에서 담장을 쌓고 있는 그를 찾아냈다 함.
[2] 김일제(金日磾): 한대(漢代) 사람. 본래 흉노(凶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휴도왕은 항복하지 않아서 살해되고 김일제는 잡혀서 한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그의 예절이 바르고 용모가 엄숙한 것을 보고 무제(武帝)가 벼슬을 주어 시중 부마 도위(侍中駙馬都尉)가 되었음. 그 후 구경(九卿)의 지위를 지내고 죽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조금도 과오가 없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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