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투후 상구성 전기
투후 상구성(商丘成)은 누구인가?
투후 상구성 전기
상구성(商丘成)은 성은 상구(商丘) 이름은 성(成)이다. “열선전”에 상구자서(商丘子胥)라는 선인이 소개되어 있고, 상구는 복성이다. 상나라의 수도가 상구였다. 투성이 위치한 성무현이 이 근처이고 오늘날 산동성 하택(荷澤)시 부근이다.
상구성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대홍려와 어사대부를 지낸 관직 경력과 무고의 난 때 한고조 묘지기를 지낸 전천추(?-BC 77)의 기록을 통해서 대략 추측해 보면 BC 2세기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한서 기록에 따르면 한문제(BC 202-BC 157) 묘지기 첨사로 재직 중 설화를 입어 BC 88년 황제에 대한 불경죄의 판결이 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구성은 “大鴻臚”(대홍려)의 관직을 지내고 있을 때인 BC 91년 무고지화의 태자 반란이 일어나 어사대부 폭승지가 투옥된 후 자결하자 폭승지의 후임으로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상구성은 어사대부를 상홍양이 물려받을 때까지 BC 91년부터 BC 88년까지 지냈다.
BC 91년 음력 7월 역사상 유명한 무고지화(巫蠱之祸) 황태자 유거(劉據)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구성은 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투후(秺侯)의 작위를 받았다.
秺侯商丘成: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 투후 상구성: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다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한서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상구성이 투후에 봉해진 기사는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나타난다.
시호성명 | 제후 후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 | 봉읍지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한다.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찌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겠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제음현 |
號諡姓名 | 功狀戶數 | 始封 | 子 | 孫 | 曾孫 | 玄孫 |
秺侯商丘成 |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二千一百二十戶 | 延和二年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為詹事侍祠孝文廟 醉歌堂下曰 出居 安能鬱鬱 大不敬 自殺 | 濟陰 |
여태자의 무고지화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은 상구성과 마통 그리고 경건이었다.
상구성은 위태자 반란이 진압된 후 9월 이 때 폭승지(暴勝之)의 후임으로 한나라 제32대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상구성은 삼년여 동안 어사대부를 지냈다. 상구성의 후임 어사대부는 한무제의 네명의 고명대신에 속했던 상홍양(桑弘羊)이었다. 상홍양은 한무제의 탁고지신뿐만 아니라 국가주도 경제부흥론자로 염철론 이론 투쟁 가운데 국가주도파의 대부에 속한 인물로, 농업주도파 유교사림학파와 이론적인 대립 투쟁을 전개하다가 어사대부를 지낸 지 약 구년만인 BC 80년 곽광에 의해서 피살된 인물이다.
상구성이 어사대부를 지낼 시기인 BC 90년 정화3년 음력 1월 북쪽의 흉노족이 오원, 주천에 침입해서 이 두 곳의 도위들을 사살했다. 음력 3월 이광리 장군에게 군사 7만을 이끌고 오원을 출정하게 하였고, 어사대부 상구성에게는 2만(한서 흉노전에는 3만명의 군사로 기술되어 있다) 군사를 이끌고 서하에서 출정하게 하였으며, 중합후 마통에게는 4만 군사를 이끌고 주천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상구성이 준계산에 이르러 적과 접전을 벌여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다. 마통은 천산에 이르러 적이 물러가고 거사국이 항복해 옴에 따라서 이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한편 이광리 장군은 적군에 패해서 흉노에 투항하였다.
려태자가 반란의 이심은 애초에 없었다는 차천추의 상소를 받아들여 죽은 위태자를 사후복권 시키고 사자궁을 지어 죽은 영혼을 위로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지화 반란 진압 공신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BC 89년 6월 정사일에 대홍려 차천추를 승상에 임명하고 한무제가 무고지화 반란 사태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전천추는 한고조의 종묘 묘지기 첨사 낭중을 지내고 있었는데 천추는 꿈에서 본 이야기로 상소를 올렸다. 한무제는 위태자가 놀라고 두려웠을 뿐이고 다른 딴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마침 한고조 묘지기 전천추가 특별 상소를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자식이 아버지의 병기를 가지고 희롱하면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합니다. 황제의 아들이 과실착오로 사람을 죽이면 무슨 죄에 해당하겠습니까? 신이 꿈속에서 한 백발노인을 만났는데, 신으로 하여금 이것을 황제께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무제가 마침내 크게 느끼고 반성하고 깨달아 전천추를 불러 이르기를: “부자간의 일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공(公)이 홀로 그렇지 않음을 명백히 밝혔으니, 이는 한고조의 신령이 공으로 하여금 나에게 가르쳐주게 한 것이다. 공은 마땅히 마침내 나를 가까이서 보좌하기 바란다.” 한무제는 즉석에서 전천추를 대홍려에 임명했다. 정화3년 12월 강충의 삼족이 멸족당했고 소문은 위수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했다.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했다. 상구성은 첨사로 좌천당했고, 그후 한문제 사당에서 술에 취해 "出居安能郁郁”(출거안능욱욱)이라고 말한 것이 황제에 대한 저주라고 모함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대불경(大不敬)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BC 88년 음력 6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延和二年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為詹事侍祠孝文廟 醉歌堂下曰 出居 安能鬱鬱 大不敬 自殺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옮겨 떨어져 있으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구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망통, 망하라, 경건 등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시중복야 망하라와 그 동생 망통은 모반을 기도했다가 시중부마도위 김일제, 봉거도위 곽광, 기도위 상관걸에게 진압당한 것이다. 한무제의 탁고대신 4인방(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은 무고지화 위태자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을 물리치고 한무제 사후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 해석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 이 말이 황제에 대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상구성은 자결했다.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이라는 말에서 “出居”(출거)는 ‘거처를 옮기다’의 뜻 즉 遷居(천거)나 移居(이거)와 같은 말이다. 또 出居(출거)는 ‘부모와 떨어져 산다는 別居(별거) 分居(분거)의 뜻이 있는 말이다. 鬱鬱(울울)은 숲이 울창하다는 뜻이 있는 단어이다. 또 鬱鬱(울울)은 숲이 꽉꽉 막혀 있는 것처럼 마음이 꽉 막혀 있어 무척 ‘울적하다’, ‘우울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이다. 이런 ‘울울’의 뜻과 같은 말로는 “郁郁”(욱욱)이 있다. 여기서 욱(郁)은 우리말의 평소 마음이 답답한 상태에서 ‘욱하다’, ‘울컥하다’는 말과 같은 어원이다. 풀이 빽빽하게 무성하게 자라나면, 헝클어진 머리칼이 무성해지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울적해지지 않는가? 상심하고 번민한 그 모습 말이다. 安能(안능)은 참아내다의 뜻 즉 寧(영)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은 ‘(어사대부에서 첨사로 좌천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찌 울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의 뜻으로 해석된다.
또 한신처럼 천하 쟁취를 다투는 國士無雙(국사무쌍) 걸출한 영웅호걸이 좌천되어 답답한 변방 구석에 갇혀 있는 신세라고 여기면, 한고조 유방이 말한“安能鬱鬱久居此乎”(안능울울구거차호: 어찌 답답하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 수 있겠소)라는 의문부사의 쓰임새에 따라서, ‘변방 외지로 거처를 옮기니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한편으론 후한서 하창(何敞)전에 나오는 “其出居者 皆歸養其父母”의 구절 이에 대한 이현의 주해 “出居謂與父母別居者”의 뜻으로 出居(출거)의 의미를 새겨서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영 울적하구나!” 이와 같은 뜻으로 새길 수 있다.
史記, 淮陰侯韓信列傳 | |
王曰:「若所追者誰?」何曰:「韓信也。」王復罵曰:「諸將亡者以十數,公無所追;追信,詐也!」何曰:「諸將易得耳;至如信者,國士無雙。王必欲長王漢中,無所事信;必欲爭天下,非信無可與計事者。顧王策安所決耳!」 | 국왕: “그대가 뒤쫓은 자는 누구인가?” 소하: “한신입니다.” 국왕이 꾸짖듯이 재차 말했다. “장수들 중에 달아난 자가 십여 명인데 공은 이들을 쫓은 적이 없었소. 그러니 한신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소하: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한신과 같은 사람은 그에게 견줄만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국사무쌍(國士無雙) 최고의 무사입니다. 왕께서 기어이 한중(漢中)의 땅을 차지하고 이 곳의 왕이 되려고 하신다면 한신을 쓸만한 일은 없겠지만, 기필코 천하를 다투어 쟁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그 일을 계획하고 이루어낼 만한 사람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오로지 왕께서 어떤 책략을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王曰:「吾亦欲東耳,安能鬱鬱久居此乎!」何曰:「計必欲東,能用信,信卽留;不能用信,終亡耳。」王曰:「吾為公以為將。」何曰:「雖為將,信不留。」王曰:「以為大將。」 何曰:「幸甚!」 | 국왕: “나 또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오. 어찌 답답하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소?” 소하: “왕께서 끝내 동쪽으로 상승해 가려 하신다면 한신을 능히 중용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한신은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하지만 한신을 중용하지 못한다면 한신은 마침내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국왕: “그대의 뜻을 따라 한신을 장군으로 삼겠소.” 소하: “비록 장군으로 삼는다고 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왕: “그렇다면 대장군으로 삼겠소.” 소하: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
於是王欲召信拜之。何曰:「王素慢無禮;今拜大將,如呼小兒,此乃信所以去也。王必欲拜之,擇良日,齋戒,設壇場,具禮,乃可耳。」王許之。諸將皆喜,人人各自以為得大將。至拜大將,乃韓信也,一軍皆驚。 | 이에 국왕은 한신을 불러 대장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소하: “왕께서는 평소 오만하고 무례하셔서 지금 대장을 임명하시기를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 같으시니, 이것이 바로 한신이 떠난 이유입니다. 왕께서 반드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시려면 길일을 택해서 목욕재계하고, 제단을 설치하고 예를 다해 갖추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왕이 이러한 일을 허락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서로 자신들이 대장으로 임명될 것처럼 모두가 기뻐했다. 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한신이어서 온 군대가 모두 놀랐다. |
史記, 韓王成韓信 盧綰 | 한신노관열전 |
沛公立為漢王,韓信從入漢中,乃說漢王曰:項王王諸將近地,而王獨遠居此,此左遷也。士卒皆山東人,跂而望歸,及其鋒東鄉,可以爭天下 | 패공이 한왕(漢王)으로 봉해지자, 한신은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가서 한왕을 설득하였다. “항우는 여러 장수들을 가까운 땅의 왕으로 봉했는데 왕께서만 홀로 멀리 이곳에 있으니, 이는 좌천입니다. 병사와 사졸들은 모두 산동 출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발을 들어 바라고 있으니, 칼날을 동쪽으로 겨눈다면 천하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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