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자도 진시황제도 한반도로 이민을 오고자 했을까?
삼국사기는 보장왕조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음이 없고, 부인이 지조가 굳고 믿음이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과 달라서 공자(孔子)가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려고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원문은 다음의 문장이다. “論曰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위 국편위 번역에서 “변두”는 대나무 죽기를 말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요사이 스시 초밥 먹듯이 대나무로 만든 깨끗한 죽기 밥그릇을 이용해서 깨끗하게 음식을 차려 먹는다는 뜻인데, 상징적인 의미로는 깨끗한 제삿상을 차려 먹는다 즉 조상들에게 제사를 반듯하게 드리며 선조를 공경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갖고 있다는 뜻을 갖는다. 三方(3방)은 삼면 서쪽 남쪽 북쪽의 지방을 지칭한다. 한반도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는 군자의 나라이기에 남서북쪽의 오랑캐족속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반도가 얼마나 무릉도원이었는지는 진시황제도 인정했고 그에 앞서 성인군자의 대명사 공자도 인정했다는 사실로써 입증된다. 한반도는 공자도 진시황제도 이민을 오고 싶어했던 신선이 사는 지상낙원 금수강산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이런 말을 처음으로 지어냈을까? 그게 아니었다. 똑같은 한문 문장이 북송 977-984년에 편찬한 “太平御覽”(태평어람) 조선전에 기재되어 있다. 또 1071-1086년에 편찬된 “資治通鑑”(자치통감) 원봉3년(BC 108) 12월 기사에도 전재되어 있다.
또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도 똑 같은 원문이 적혀 있다. 따라서 김부식은 한서 지리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논(論)했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왜냐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문장은 한서에서 그대로 훔쳐온 표절이고 조작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기의 생각을 적은 글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었다. 자기의 탐구된 견해가 아니라 한서 지리지의 문장 그대로 훔쳐온 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와 삼국사기 원문 비교
한서는 BC 206년 한나라가 수립된 해부터 전한이 망한 왕망의 신조 AD 23년까지 230년간의 전한의 역사를 반고가 편찬한 공식적 역사서이다. 다음과 같은 漢書 地理志 해당 문장을 보자.
“玄菟 樂浪 武帝時置 皆朝鮮 濊貉 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為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為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飲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樂浪海中有倭人 分為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삼국사기나 한서는 한문으로 쓰여진 사서이다. 보라, 김부식의 사론은 한서 지리지를 그대로 표절하고 조작했음이 즉시 확인되지 않는가?
삼국사기 vs 한서 지리지
삼국사기 | 한서 지리지 |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 玄菟 樂浪 ... 皆朝鮮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 犯禁八條 …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飲食以籩豆 … 吏見民無閉臧 …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태평어람 | 자치통감 |
《漢書·地理志》曰 玄菟 樂浪 武帝時初置 皆朝鮮 獩貊 勾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 織作 樂浪 朝鮮 民犯禁八條 如淳曰 有其四 其四不見 相殺以當時償殺 相傷者以谷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仇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不淫辟 其田民飲食以邊豆 都邑頗放效 吏及內郡賈人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藏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相犯禁浸多 致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之不行 乘桴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 | 班固曰 玄菟 樂浪 本箕子所封 昔箕子居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為民設禁八條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售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野飲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桴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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