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릉비 비문 연구-비문 뒷면』
책 주요 내용 요약
1.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문무왕릉비 비문 번역 해석에 대해 통렬하게 정면 비판하고 새롭고 올바른 해석을 제시한다. 문무왕릉비는 682년에 건립되었는데, 1796년 경주에서 문무왕릉비 비문 파편이 발견되기 전까지 역사상 실종된 상태였다. 문무왕릉비 파편이 발견된지 약 220년 후 그리고 문무왕릉비가 건립된지 1338년이 지난 후인 2020년 오늘에서야 저자의 문무대왕릉비 비문 연구 책을 통해서 문무대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해석과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지금까지 잘못된 번역과 해석이 게재된 국사 교과서의 내용 서술에 대해서 그것들이 즉시 수정되기를 담대하게 요구한다. 저자는 문무왕릉비 비문의 내용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해석하고 그리하여 국사편찬위원회가 잘못 번역하고 잘못 해석한 관련 내용을 자세하게 지적하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2. 삼국사기의 역사 조작을 밝혀내다
저자는 역사 사료에 근거하여 문무왕릉비 비문 원문을 새롭고 정확하게 해석해냄으로써 왜 그리고 어떻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역사를 조작해냈는지 그 조작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문무대왕의 유언 내용은 당태종의 유언을 표절하고 도용한 역사조작임을 입증해낸 저자의 책을 참고하라: 『역사 혁명: 문무대왕 유언 비밀 해제』
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재된 역사에 대한 정면 도전
김정희는 어떻게 무학대사 왕심비라든가 도선국사비 등으로 알려진 기존의 황당무계한 설을 물리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는가? 추사는 말했다: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1천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 밝혀져 격파)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된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저자의 연구물은 1816년 김정희가 자부한 내용을 능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정희 당시는 국사 교과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때는 기존의 벽을 격파하기가 요즘만큼 힘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모든 학교와 모든 대학에서 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대로 가르치고 배우며 또 학생의 학교 진학과 공무원 임용 시험 과목을 통해서 비록 잘못된 기존의 학설과 견해일지라도 그것이 강요되고 수용되고 있는 형편이므로 기존의 학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려면 이중삼중의 벽으로 둘러처진 큰 어려움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가 시중의 낭설에 대항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왜냐면 황당무계한 낭설이란 학계의 통설적인 연구의 위치하고는 분명히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라, 880여년 740여년전 기재되어 그토록 오랫동안 국사의 위치로 점해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면 반박하고, 또 발견된지 220여년 동안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축적한 기존의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해서 정면 반박하고, 또 1340여년전의 오래된 고문자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그동안 국가와 학계가 정해놓은 기존의 국사 지식을 정면으로 격파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만큼 어려운 일에 속할지 모른다.
한문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해낸다고 해도 그것이 기존의 학계의 다수설의 견해에 정면 배치되고 또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축적된 기존의 지식체계가 붕괴될 정도의 충격적인 내용이라면, 기존의 교과서적 지식체계와 그것에 안주하고 혜택을 누려온 기득계층의 억압을 뚫어 낼만한 담대한 용기와 진실 추구의 완결성을 먼저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제아무리 수주화씨벽의 보배라고 해도 지금까지 그것이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던 인간 사회의 약한 고리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또 생각의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실현하기 힘든 헤게모니 지배 계급 사회에서 수백년 아니 수천년 묵은 역사속의 진실을 캐내고 거짓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개인적 믿음과 국가와 사회의 진실 추구 체제에 대한 회의감 사이의 괴리가 크다면, 더구나 요즈음 일부 국가에서 우려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반지성주의적 행태가 활개를 친다면, 공유된 지성과 문화가 꽃피우지 못할 위험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진실의 추구와 복원 작업은 극히 어려운 작업에 해당한다.
한편 새로운 지식체계를 수립하는 일이 만약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면 어쩌면 더 쉬울지도 모른다. 또 기존의 잘못된 편견과 오도된 지식과 낡은 생각의 벽을 깨는 작업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지난하고 고단한 일에 해당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의 문무왕릉비 비문 연구 결과는 갈릴레오와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이룩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역사 혁명에 해당할 것으로 자부한다.
4.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과 해석에 대한 정면 반박
저자는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제20행의 구절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번역 해석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과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貴道賤身 欽味釋(軀/縛) 葬以積薪 (薪盡火傳)(/穀神不死) (靈光)不滅 粉骨鯨津 嗣王允恭 因心孝友 岡(高金剛 永保)鴻名
도를 중하게 여기고 그 가르침을 높게 받들어 자기 몸은 천히 여기셨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며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운구를 나뭇단 위에 올려두고 불을 태워 화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네 (땔나무가 타고나면 형체는 사라지지만 불씨는 되살아나 영원히 이어가듯 씨앗이 되살아나 꽃이 피어나듯 비록 사람의 몸은 사라져도 빛나는 정신은 꺼지지 않고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진다) (고귀한 정신이 스며있는 문화와 예술의 금자탑은 찬란히 빛난다) 국가를 위해 분골쇄신하고 헌신한 경진씨 태종무열왕을 이어받은 문무왕은 정말 믿음의 화신이고 공경스럽다. 그는 인자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도다. 하늘높이 우뚝 솟은 바위처럼 영원히 닳지않고 춘추만대까지 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히 빛나리!
5.“粉骨鯨津”(분골경진)의 의미에 대한 경천동지 같은 새롭고 정확한 해석
저자는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제20행의 “粉骨鯨津 嗣王允恭” 구절을 “국가를 위해 분골쇄신하고 헌신한 경진씨 태종무열왕을 이어받은 문무왕은 정말 믿음의 화신이고 공경스럽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여기의 “鯨津”(경진)은 비문 앞면제 3행에서 나오는 “鯨津氏”(경진씨)라는 호칭을 의미하며, 비문 뒷면제20행에서의 “鯨津”은 비문 명부분의 4글자 제한성 때문에 “경진씨”에서 “씨”글자를 생략하고 “경진”이라고 쓴 것이다.
문무왕의 선왕인 태종무열왕의 묘호 대신에 경진씨라는 경칭을 비문 앞면에서 썼는데, 한 예로 “故孔氏之訓可資釋氏”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공자 석가를 공씨 석씨로 쓰기도 했다. 비문뒷면 제 20행의 “鯨津”은 비문앞면 제3행의 “鯨津氏”를 지칭하는 인명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粉骨鯨津”(분골경진)은 ‘분골쇄신한 경진씨’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분골쇄신이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몸바쳐 헌신하고 진심전력으로 충성을 다하는 헌신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두고서 말하는 사자성어 표현이다. 粉骨(분골)은 “粉身碎骨”의 준말 즉 ‘목숨도 아끼지 않고 가벼이 여길만큼 목숨 바쳐 헌신하다’는 뜻이다. 여기의 “분골”의 의미는 국편위의 해석처럼 ‘뼛가루를 날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粉(분)은 밀가루가 되듯이 분쇄(粉碎)하다의 뜻이고, 粉身碎骨(분신쇄골) 분골쇄신(粉骨碎身)은 뼈가 깨어지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노력하다는 의미이고 그와같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다는 獻身(헌신)의 뜻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문무왕 671년 7월26일 기사 가운데,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 구절이 나오는데, 분신쇄골 망진구치지용 간뇌도원 앙보만분지일 이 구절의 의미는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다”.
“鯨津”(경진)은 문무왕의 선왕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지칭하는 인명에 해당하고, 따라서 “粉骨鯨津”(분골경진)은 ‘분골쇄신한 경진씨’ 즉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헌신을 다한 경진씨=태종무열왕=김춘추’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粉骨鯨津”을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셨네”-으로써 번역한 국편위의 해석은 크게 잘못된 번역임이 확인된다.
“粉骨鯨津 嗣王允恭”, 분골경진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嗣王允恭”인데 사왕윤공은 분골쇄신의 선왕 경진씨(태종무열왕)를 ‘이어받은 왕으로서 문무왕은 참으로 믿음직스럽고 공경스럽다’의 뜻이다. 이렇게 올바로 해석하면 앞뒤의 문맥상 의미가 정확하게 연결된다. “嗣王允恭”을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으로써 번역한 국편위의 해석은 앞뒤 문장의 의미를 살리는데 부족하다.
6. 靈光不滅(영광불멸)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곡신불사’의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영원불멸의 정신이 있다는 믿음과 그런 신비스런 생명력을 이어가는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역사와 현실적 통찰력을 가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靈光不滅”(영광불멸)의 개념에 대해서 즉시 이해하는 수준도 아닐 것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靈光”(영광)의 의미를 찾을 경우 더욱 그러할지 모른다. 영광전(靈光殿)은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에 세워진 사당인데, 한경제의 비 정희가 낳은 자식인 노공왕 유여(?-BC 128)가 이곳의 제후로 있던 시절에 중건했다. 한나라 왕연수가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에서 다른 궁전들은 전란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는데 오로지 영광전만이 살아 남은 이유를 서술했는데 거기에 “靈光巋然獨存”(영광규연독존) 표현이 나온다.
靈光(영광)은 영광전의 이름 이외에 다른 뜻이 있는데, 신비한 광채, 왕이나 성현의 덕택, 인간의 선한 본성, 碩果僅存(석과근존) 즉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큰 열매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로써 오래 남아 전하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 있다. 靈光(영광)의 靈은 靈氣(영기) 즉 살아 있는 정기(精氣)를 내뿜는 것의 의미와 통한다. 왜 영광전만이 홀로 살아 남았겠는가? 그 명당에서 오묘한 광채의 빛이 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민족은 영광전처럼 숱한 전란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살아남았으니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발전할 것이다. 永不朽兮(영불후혜) 영원무궁토록!
위진남북조 시대의 유신은 불후의 작품 “애강남부”에서 “靈光巍然”(영광외연)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왕연수의 巋然(규연)이나 유신의 巍然(외연)이나 ‘저 높이’라는 高大(고대)의 뜻으로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유신은 비록 자신의 후손들이 세상 부귀 영화와 절연되고 또다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다해도 영광(靈光) 즉 위대한 인물 또는 위대한 것은 계속 전해지리라는 인류 최고의 믿음을 적어 놓았다. 여기서 영광(靈光)은 큰 업적을 나타낸 큰 인물이라는 뜻 이외에 우리 인류의 마음 속에 면면히 살아 전해져온 고귀한 정신까지를 포함한다. 영광 그 영원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끝까지 계속 살아 남을 것이라는 역사관과 민족과 인류의 존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칭한다. 사마천이 비록 몸은 망가졌지만 끝내 살아남아 유언을 완수해 내고 불후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그 위대한 정신의 힘과 같다. 영광(靈光) 고귀한 정신은 별빛처럼 영원히 빛나고, 인간의 선한 본성과 지식의 힘은 영원불멸하다. 사람의 몸은 죽어도 사람의 마음과 가슴과 정신과 혼백과 영혼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인간세상이 끊임없이 변해 왔지만 소크라테스 노자 석가 공맹 예수 같은 성인철현은 영원히 전하고 있지 않는가?
이같은 역사인식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저자는 애강남부에서의 “靈光巍然”(영광외연) 구절을,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제20행의 “葬以積薪 ▨▨▨▨ ▨▨▨滅”의 결자 부분을 메꾸어 주는 표현으로 도입하였다. 문무대왕은 화소장으로 장례를 치뤄 비록 자신의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통일의 역사와 희생정신은 영원히 살아 빛나고 무궁토록 전해지리라.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등대불처럼,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Eternal Flame)이 되어, 별빛처럼 진실로 아름다운 성화(聖火)로 타오르리라.
7. 欽味釋(軀) 葬以積薪(흠미석구) (장이적신)/ 貴道賤身 欽味釋(奠)(귀도천신 흠미석전)/ 欽味釋(縛) 葬以積薪(흠미석박 장이적신)
欽味釋軀/欽味釋縛/欽味釋奠
위에서 설명한대로, 釋滯(석체), 釋之(석지), 釋文(석문), 釋縛(석박), 釋奠(석전), 薪盡火傳(신진화전), 葬以積薪(장이적신), 神不滅論(신불멸론)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貴道賤身 欽味釋奠 葬以積薪”에서의 결자 부분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欽味釋奠(흠미석전) 또는 欽味釋軀(흠미석구)의 표현이 도출된다. 장례식을 치를 때 영구를 극히 존중하고 마지막 예를 다해 표하는 그 모습을 상상하라. 천천히 운구를 옮기면서 최고의 예를 표하지 않는가? 그 때 존경하는 고인이 평소 행동과 남긴 말씀을 되새겨지지 않는가? 欽味(흠미)한다는 뜻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고인의 몸이 담긴 운구를 석방해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지펴 화장식을 치뤘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표현으로써 釋軀(석구)가 어울린다. 釋軀(석구)는 ‘몸을 버리다’는 뜻이 되므로 釋軀(석구)와 같은 뜻의 단어로 捐軀(연구)가 있다. 捐軀(연구)는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생명까지를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 즉 舍棄身軀(사기신구), 爲國捐軀(위국연구)를 뜻한다. 그러므로 앞서의 문장에 나오는 귀도천신과 비슷한 뜻이다. 欽味釋軀 葬以積薪(흠미석구 장이적신)은 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쌓은 나무 위에 관을 옮기고 화소장을 치루는 그 구체적인 장면 그리고 그에 대한 비유적인 의미를 말해준다.
欽味釋軀(흠미석구)는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문무왕의 희생 정신과 그의 유지를 받들고 그 깊은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면서’의 뜻이 된다.
정림사 평백제비에서의 “捐軀殉國之志” (연구순국지지)의 구절이 바로 欽味釋軀(흠미석구)의 뜻을 모방한 표현이 된다.
국편위는 “欽味釋▨葬以積薪”을 “釋典”이라는 글자로 메꾸워서 “欽味釋典”(흠미석전),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로 해석하였다.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해석한 최초의 사람이 일제시대 식민사학을 개창한 경정제대 교수 금서룡이었다. 금서룡의 육필원고를 보면 欽味釋▨ 결자부분을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창작하고 끼워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欽味釋典(흠미석전) 즉 “불경을 흠미해서 나뭇단을 쌓아올리고 화장을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貴道賤身 欽味釋奠(귀도천신 흠미석전) 즉 귀도천신의 공자를 흠미해서 장이적신했다는 의미가 문무대왕의 죽음에 맞는 내용이 된다. 문무대왕의 종교는 불교가 아니라 도교이다. 당태종의 비문에서와 같이 석가모니부처가 아니라, 釋奠(석전)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할 것이다. 흠미석전(欽味釋奠)은 춘추좌전의 역사서 기록-昭公四年: “成王克許 許僖公如是 王親釋其縛 受其璧 焚其櫬-을 토대로 해석된다.
문무대왕은 삼국을 통일한 선구자이고 전쟁포로의 속박된 삶을 풀어준 성현이었다. “釋縛焚櫬”(석박분친)은 중국어 성어 사전 등 거의 모든 사전에 적혀있는 한자성어이다. 중국의 역사서에 그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 성어이다. “欽味釋▨葬以積薪”의 흠결 글자를 국편위가 “釋典”이라는 글자로 메꾸워서 임의적으로 “欽味釋典”(흠미석전)이라고 판독하고 이를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런 국편위의 해석은 단어와 어구와 구절과 문장과 전체 비문 내용과의 의미 연결상 전혀 맞지 않고 크게 잘못되었다. 국편위는 비문 해석을 시도함에 있어서 마멸된 글자 한 글자를 메꾸더라도 그 글이 나타내는 단어와 구절과 문장과 전체 비문 내용과 연결지어서 부분과 전체적 의미가 서로 온전하게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할 문언해석의 기본 원칙을 따르지 못했다.
8. 射熊莫返 (사웅막반)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제13행의 “射熊莫返” 구절에 대해서 국사편찬위원회는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되었다. “射熊莫返” 사웅막반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문무대왕이시여 안타깝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떴지만) 하늘에 올라 북극성처럼 빛나시라! 북극성처럼 영원히 빛나소서!”의 뜻이다. 莫返(막반)은 忘返(망반), 忘歸(망귀)와 같은 뜻으로써 죽음을 뜻하는 완사 즉 유퍼미즘으로 쓰였다. 射熊(사웅)은 “着其高處”(착기고처)의 뜻으로, ‘높은 곳에 솟아올라’의 뜻 즉 문맥상 조금 가다듬으면 “하늘에 높이 올라 북극성처럼 영원히 빛나라”의 뜻이다. 따라서 “射熊莫返”(사웅막반)은 ‘하늘에 올라 북극성처럼 높은 곳에서 영원히 빛나시라’.
9. 太子雞(犬昇天) (태자계견승천)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제13행의 “太子雞▨▨▨” 구절에 대해서 국편위는 “태자계(雞) …”라고만 번역해 놓고 있어 이에 대한 비문 문맥상 의미를 파악해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 저자는 “太子雞(犬昇天)”(태자계견승천)의 의미로써 결자부분을 제시하며, ‘승선태자가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처럼 문무왕께서 신선승천하신다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다함께 승천할 것입니다’라는 “一人善射 百夫決拾”(일인선사백부결습)의 의미로써 해석하여, 문무왕의 죽음은 국가사회 지도층의 희생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적인 케이스임을 제시한다.
10. 문무왕릉비 비문 판독의 어려움
1796년(정조 20년) 경주에서 문무왕릉비 비문 파편이 발견되었다. 문무왕릉비는 682년에 건립되었는데 그 이후 최근의 바미안 석굴의 폭파 사건이나 역사속에 묻히어 아직 밝혀내지 못한 무측천 몰자비처럼 비문이 테러당하고 파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다 문무왕릉비 건립 이후 약 1천1백년이 지난 시점인 1796년 그 파편 일부분이 기적과도 같이 발견되었고 이어 탁본되었다. 이후 사라진 비문 파편이 1961년과 2009년 각각 비문 파편 일부분이 재발견되면서 역사 앞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었다. 1796년 홍양호에 의해서 문무왕릉비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추사 김정희가 1817년에 경주를 직접 답사하고 그 때 천왕사에서 문무왕릉 비문 하단 부분을 직접 수습했다고 밝혔다. 그 후 김정희가 비문의 탁본을 청나라에 전해 유희해(劉喜海 1794-1852)가 수집 보관하다 1832년 편찬하였고, 이 탁본 판독문이 1873년 발간된 포강의 “海東金石苑”, 1881년 발간된 동무유씨의 “海東金石苑”, 1888년 발간된 육심원(陸心源)의 “唐文拾遺”, 1922년 발간된 유승간의 “해동금석원” 책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저자는 한국에 공개된 적이 없는 1881년 東武劉氏著錄 “海東金石苑”과 1888년 “唐文拾遺”(당문습유)의 비문 판독문 문헌자료에 의거하여 문무왕릉비 비문을 번역하고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국편위가 번역하고 해석한 문무왕릉비의 내용을 정면으로 통박하고 이 책의 내용으로써 문무왕릉비의 보다 정확한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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