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무대왕릉비 연구-제2권-비문 뒷면 해석

비문뒷면 12행 해석-동해지빈

by 문무대왕 2025. 4. 2.

비문뒷면 제12행 영가성이

 

□□□□□□□□□之聆嘉聲而霧集爲是朝多□□

 

국편위 번역: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드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之

공성신퇴-동해지빈

()()과 동일한 의미의 글자로써, 손님 빈객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생사관은 공성신퇴(功成身退)의 개념이다. 功成靜息 是天之道.  공성신퇴의 개념은 노자도덕경 제9장에서도 제시된다.  功遂身退 是天之道. 공을 이루고 나면 몸은 그만 물러나는 것이다.  이게 하늘의 법칙이다. 불 같은 해도 지기 마련이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니, 사람이 공을 이루면 쉬는 것이 당연한 거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굴원의 초사 구절처럼 其生若浮兮 其死若休”-뜬 구름과 같은 삶이여, 죽음은 휴식처이로다. 죽음은 영원한 격리가 아니라 휴식의 개념이기에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다.  잠자는 수면과 같은 것이라면?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빈객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망자가 되면 빈소를 차리는 것이고, 이와 같은 빈()의 개념이 문무왕릉의 비문에서 서술되고 있다. 

방랑객 김삿갓을 식객으로 묵게 했던 화순 동복의 정씨가문처럼 예전엔 부유한 유지들은 뛰어난 예능자들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며 빈객으로 예우하였다.  결자 부분을 메꾸어 보려면, 나라 안의 모든 신하를 빈객으로 모셔온다는 뜻의 솔토지빈 率土之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망자 특정인 한 사람임을 감안하면 유신이 애강남부에 나오는東海之濱”(동해지빈)이 지형적 여건으로 볼 때 더 잘 어울릴 표현같다. 경주는 지리적으로 동해안 해안가에 직접 닿아 위치하고 있다. 아니면 좀더 문학적인 표현에 치우쳐至如纓紱之士 草之賓”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수 있다.[1]  

()은 갓끈 系帽 , ()은 인수 인끈 실크리본 훈장을 뜻하는 낱말이다. 纓紱(영불)은 冠(관대)와 印(인수)를 뜻하는 말이니, 재직시에는 나랏일에 얽매여 있다는 속박을 의미하는 허리띠를 차고 은퇴후엔 참전용사 재향군인이 가슴에 훈장을 달고 다니듯이 은퇴후엔 훈장을 다는 사람 즉 관리 관직 官位(관위)에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처럼 纓紱(영불)지사는 관대와 허리띠를 차고 있는 사람 즉 현직 관리의 신분을 가진 사람, 초래()는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일반 평민, 布衣(포의)를 지칭하는 말로 관리에서 평민까지 모든 사람들을 빈객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유신의 애강남부가 문무왕릉 비문 내용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큰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동해지빈의 표현이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 뜻은동해안 해변가의 빈객으로 모시겠습니다”.

 

봉제사 접빈객 奉祭祀 接賓客

 

奉祭祀接賓客”(봉제사접빈객)의 유교 제례 문화가 엄격하게 지켜졌던 조선시대와 근대화 최근까지의 우리나라에서 물고기는 햇과일과 함께 제사상에 갖추어져야 할 필수품에 속했다. 연어 또한 어포를 만들어 가을 제사를 지낼 때 제수용으로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산과 고개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교통이 불편했던 예전에 산간 내륙 지방에서는 신선한 생선을 구경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산간 내륙 지방 안동에는 간고등어 요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간고등어는 소금으로 절여 간을 들여 맞춘 장기 보관용 식품이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안동의 경우 가장 가까운 바닷가인 영덕까지는 80km나 떨어져 있고 또 높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에서는 시간적으로 싱싱한 바다 생선을 즐길 수가 없었고, 가을 제사 때 어포가 쓰인 이유는 물고기는 과일처럼 바로 잡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선을 잡아 말린 어포를 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냉동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연어 생선회가 어포보다 더 유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안동 간고등어 얘기에 나온 김에 생각나는 박목월의 시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가난이 원수였던 그때그시절 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보릿고개의 하수상한 세월을 견디어냈던 과거적 현실은 이제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보릿고개 시절에 부모 제사가 돌아오면 제사상에 올릴 제물이 없어 가난한 자손은 축문을 지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한탄이 구구절절이 느껴지는 시이다. 간고등어는 연어처럼 비싼 생선고기가 아닐텐데 그런 간고등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 그때 보릿고개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 시에서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자식이어서인지 언문을 쓰고 있는데 반해 죽은 아버지는 어려운 한자를 쓰고 있어 세대 차이가 느껴진다. 이 시에서 시인은 만술애비의 말을 직접화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고 하거늘 만술애비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직접 말을 할 수 있을까?  문학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등잔불도 없던, 소금에 밥 말아먹던 그때그시절에 같은 인간으로서 베푼 인정을 보면 굵은 밤이슬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늘날 그때그시절이 오히려 그리운 까닭은 그때그시절은 다같이 가난했던 평등의 시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한 번 다시 생각해 보자. 비록 오늘날 보릿고개는 오래 전에 사라졌고 하지만 지금 현재에도가난이 원수인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지 않는가? 인간 세상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 같다. 박목월 시인의萬述아비의 祝文전문을경상도의 가랑잎”(1968)에서 인용한다.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사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인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여보게 萬述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亡靈도 應感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聆嘉聲而

()은 듣다 경청하다 聽()의 뜻, ()는 아름답다 善(),美()의 뜻, ()은 소리의 뜻이다. 嘉聲(가성)이란 단어는 美好聲譽(미호성예) 즉 聲望名譽(성망명예) 명성과 명예가 높다는 뜻이다. 따라서 聆嘉聲而”(영가성이)높은 명성을 듣고의 뜻이다. 英聲(영성)은 훌륭한 명성(名聲)을 뜻한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가성이의 의미와 같다. 사마상여의 봉선문에 蜚英聲 騰茂實”(비영성 등무실)의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아름다운 명성을 드날려서 풍성한 재능을 진동시키라의 뜻이다. 진사명(晉祠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日月有窮 英聲不匱 天地可極 神威靡墜 萬代千齡 芳猷永嗣” (일월유궁 영성불괘 천지가극 신위미추 만대천령 방유영사). 

 

霧集 爲是

霧集(무집)은 운무--즉 안개가 피어나는 霧氣聚合(무기취합)의 줄임말이고, 또는 안개처럼 많음-盛多-을 비유하는 단어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안개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아무 것도 안보이는 시계 제로에서 금새 모든 것을 꿰뚫고 움직이는 듯한 안개의 무한변화의 동적 모습에 신비스런 느낌 즉 초월적인 신비함-ethereal power of fog-의 존재를 믿는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爲是(위시)혹은’ ‘또는’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뜻의 관계조사이다. 영어로 ‘or’, 중국어로 抑或’ ‘還是의 뜻이다.

多朝多夕

남녀의 애정관계에서 상대방을 향해 생각을 하는 것을 사념(思念), 상념에 잠긴다고 말하는데, 현실적 효율성을 중시하는 유가의 입장에서는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시경의 관저에 나오는 싯구, 寤寐思服(오매사복), 輾轉反側(전전반측)의 표현이 그것이다. 오매불망 전전반측은, 자나깨나 생각에 잠겨 잠못들고 몸을 뒤척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뜻으로 朝思夜想(조사야상), 朝思暮想(조사모상)의 표현이 있다. 이 조사모상과 같은 뜻으로 쓰인 표현이 문무왕릉비문 뒷면제12행에 나오는 “□□聆嘉聲而霧集爲是朝多□□”의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의朝多夕多조다석다의 표현은 주야로 성찰을 한다는 뜻이다.

아침 저녁으로 노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는 첨성(瞻省)은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현재의 대화 과정이다. 朝조는 아침이라는 뜻 이외에 朝賀(조하) 즉 參拜(참배)하다의 뜻, 조회하다 모이다의 뜻 拜見(배알)하다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朝多라고 사용하고 있으므로, “朝多□□” 결자부분을朝多夕多즉 多朝多夕-一朝一夕(일조일석)-하룻밤이 아니라다조다석-수많은 날들까지 오랫동안이라는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우리 인류의 역사와 운명은 눈 깜박할 사이 하룻밤 사이 단숨에 바꿔지지 않을 것이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고 만만디를 요구하지 않는가? 

多朝多夕는 오매불망, 寤寐思之, 朝思夜想, 朝思暮想 등의 표현에 가까운 말이다. 

 

朝多□□”의 다른 두 번째 의미

춘추좌씨전에 其朝多君子 其庸可 勉事之而後可” (기조다군자 기용가유호 면사지이후가)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朝廷(조정)에 君子(군자)가 많으니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반드시 힘을 다해 晉진나라를 섬긴 뒤에야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의 뜻이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인재를 갖추고 있는 나라라면 주변국에서 어느 누가 그 나라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이런 역사를 배경 지식으로 삼으면 비문 내용의 의미를 조정에 많은 군자가 나오기를 기원하는내용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萃餐德音

동해지빈의 높은 명성을 듣고-聆嘉聲而, 안개처럼 많은 사람들이 아니 하룻밤이 아니라 수 없는 날들까지 계속하여- 霧集爲是朝多夕多, 찾아와 밥 한 술에 술 한 잔 따르며 좋은 말씀 들려주시기를 청하면-萃餐德音, 而響答影隨和- 화답해 주십시오.

아침 저녁으로 노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는 첨성(瞻省)은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현재의 대화 과정이다. 

이러한 령가성이향화자 개념과 표현은 한나라 채옹의 곽유도비문에 나오는 구절로써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 于時纓緌之徒 紳佩之士 望形表而影附 聆嘉聲而響和者 猶百川之歸巨海 鱗介之宗龜龍也” (蔡邕, “郭有道碑”).

이 신도비 구절의 뜻은, 관모를 쓰고 관대를 찬 중앙 관리를 지냈고, 허리띠를 두른 향신 지역 유지였다. 뛰어난 인품과 고상한 품덕이 그에게서 저절로 우러나왔고, 높은 명성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모든 강이 흘러 들어가는 큰 바다에 비유되고, 바다 물고기의 지존인 거북과 용에 비견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이었다.

 

12행 번역 요약

□□之
(東海)
(동해안가의 빈객으로 모시겠으니)
동해안 동해지빈의
聆嘉聲而 높은 명성을 듣고,
霧集爲是 운무 안개가 밀려오듯 많이, 아니
朝多□□-
朝多(夕多)
朝多(君子)
하룻밤이 아니라 수 없는 날들까지 계속하여
조정에 많은 군자들이 나타나도록
(萃餐德音
而響答影隨和)
(찾아와 밥 한 술에 술 한 잔 따르며 좋은 말씀 들려주시기를 청하면 화답해 주십시오)

 



[1] 동해지빈 솔토지빈의 빈은 빈객(賓客)과 같은 말이다. ()은 주인과 상대되는 말로 찾아온 손님, 客人(객인), 來賓(래빈), 貴賓(귀빈)과 같은 말이다. 춘추전국시대에선 빈과 객의 대우 수준이 달랐지만 그 후 민간 부문에서는 빈객의 구분선이 무의미해졌다. 여기서 객가인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를 남기고 싶다. 객가(客家)인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맹모삼천지교의 맹가와 사기의 저자 사마천을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마천의 이름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닐 遷()이지 않는가? 그의 선조 몇 대 때부터 타의에 의해서 떠돌아다녀야 했던 피란민에 해당했다. 나라 안팎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극심했던 춘추전국시대엔 유랑민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나라가 수도 자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던 전쟁과 천도의 시기였기에 궁정관리로 근무하면서 나라의 녹봉을 먹고 살았던 그의 선조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옮겨 다녀야 했다. 인류사에 불멸의 영웅들은 이름 자체에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불리한 환경과 정체성을 극복해낸 사람들이다.  객가인이란 낱말 뜻 자체가 말해주듯 자신들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것 즉 인생은 나그네 길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의 첫 번째 인물로 실은 백이숙제 또한 대표적인 객가인이다.  백이숙제가 고사리 캐 먹다가 아사한 수양(首陽)산은 바로 산동성의 양산을 말하는데, 고죽국의 본향이 양산이다.  노자 공자 묵자 노반 맹자 등 천하의 제자백가들의 본향이 이곳이고 조선과 진국 신라인의 본향이 이곳 양산이다.  옮겨 다닐 운명의 추나라 사람인 맹자와 맹모삼천지교의 맹가 어머니 또한 객가인이고,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이 바로 객가인들인데, 고죽국 사람들 또한 피란민의 삶, 객가인이 주류였다.  오늘날 등소평이 객가인이요, 현재 대만총통 채영문도 객가인이다.  신라 김씨가 객가인이었다.  그의 후손인 추사 김정희도 객가인이지 않겠는가?  추사는 귀양살이로 살다 갔으니 어찌됐든 객가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민족적 종족적 종교적 분류의 개념은 차치하고 객가인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지주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객가인은 교육과 전통을 중시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첨성대가 있는 교동에 경주최씨의 고택이 있는데 경주최씨는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경주최씨 이전의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에는 김유신가로 알려진 재매정 가계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모토로 살았던 객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