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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주해서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시 하는가?

by 문무대왕 2025. 5. 26.

7.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taboo)시 하는가?

 

 

죽음의 의미

 

사람들은 죽음이란 숨겨져야 할 해골처럼 여기고 죽음이란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회피하려는 습성이 있다.  일본인들이 죽을 사자 발음과 같다고 해서 빌딩 층수에 4층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미신적 습성은 아마도 죽음의 공포부터 도피하려는 심정에 기인하는 것 같다.  죽음이란결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서 되도록이면 그런 죽음에 대한 어떤 암시라도 피하고픈 사람의 감정이 이성적인 대책보다 앞서기 때문이리라.  대개 사람들이 유언장을 미리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유언장을 준비하는 행동이 괜히 죽음을 앞당기는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 그렇게 미신적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밤에 꾸는 꿈이자신의 행위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악몽을 꾸고 나면 왠지 몸이 움츠려 드는 것과 같이, 흔히 공포의 감정은 이성적인 대처를 방해한다.

 

대공황

 

자본주의 경제에서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두 가지 약점은 공황(Depression)과 빈부격차의 문제라고 말한다.  경제에서 공황은 사람의 죽음에 비견된다. 유명한 경제학자 슘페터는창조적 파괴가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 요소라고 파악한 바와 같이 종말은 발전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졸업은 어떤 단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졸업식을 영어로 commencement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시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발전과 창조가 죽음을 통해서 나온다는 측면에서 경제적의미에서 죽음의 과정에 해당하는 공황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은 타당하고 또 그것을 두려워할 어떤 특별한 이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학에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공황이 들어가야 당연하고 또 학교에서 깊이 배우고 가르쳐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학교(대학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에서는공황에 대해 크게 다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회피한다고 해서 공황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 가장 성공한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증권 분석(Security Analysis)”이란 책도 초판 (1934)이 나온 후 약 70년이 지난 후에야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황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면, 무익한 토론과 논쟁으로 결정을 늦추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증권 분석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호레이쇼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현재 쓰러진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다시 일어설 것이며, 현재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1] 투키디데스가 밝힌 대로, 흥망성쇠는 인간 역사에서 반복되는 사실적 법칙이고 따라서 인간의 자만심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주는 것 같다.

 

자연과 부활

 

우리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존재다.[2]  죽어서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란 결코 없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새싹은 씨에서 솟아나는데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농토를 갈아 엎어야 한다.  새싹이 새 생명을 잉태하고 따라서 그렇게 신성하다면 묶은 땅을 새로이 갈아 엎는 것 또한 신성하다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논밭을 갈아 엎는 것은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잉태한다.  새로운 삶을 부활이라고 말한다.  부활은 생명의 법칙인 것이다. 

 

 

데드 레터 dead letter, 블랙 레터 black letter

 

“블랙 레터(black letter)”라는 말은 인쇄체 글자, 텍스트를 말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확실한 법을 “black letter law”라고 말한다.  반면에 법이 죽어 있거나 작동 불능 상태에 있는 경우를 “Dead letter”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사형집행법률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는 않았지만 사형 집행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형 법률은 “dead letter”에 해당된다.

 

우리들은 대개 법은 확실한 것 (black letter law)”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법은 완전하고 확실한 것이 아니다.  법은 수없이 만들어졌다가 수없이 폐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법이란 언제 누가 결정하는가?  법률가라면 누구나 수긍하듯이, 법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명제는 참이다.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면 법 또한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법은 태어날 때부터 법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라는 법의 불확실성의 역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도전과 응전의 역동성은 오늘은 네 차례 내일은 내 차례식으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을 말해준다.  법은 항상 새로운 도전이 열려 있다.  법의 해석이란 고정불변의 고체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변화하는 액체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법은 가장 확실한 것같이 여길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 아무리블랙 레터라고 해도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해석의 문제가 열려져 있다.  법은 항상 새로운 도전을 받기 마련이고,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이며 또 이런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서확실한 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터스가 “사람은 같은강물에두번다시발을담글없다 (You cannot step into the same river twice).”고 말했는데, 해와 달이 뜨는 자연 사실과는 달리 인간 세상에서 사람의 일은 앞서서 일어난 사건과 사실관계가 100% 같은 경우란 존재하기 어렵다.  또 시대와 환경이 달라져서 법적 쟁점이 달라질 수도 있다. 

법원은 현재의 구체적인 사건을 해결해내기 위해서 이전의 사례를 살펴 보겠지만 법은 새로운 상황 속에서 재해석되는 것이므로 이전의 판례는 새로운 상황에 놓인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현재의 법과 어떻게 통합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선례는 현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도서관에 단지 입장할 수 있다는 문고리 열쇠일 뿐이지 현재의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만능키는 아니다.  법적 추론(legal mind)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로-(hallow-ween) 신성 숭배와 신성 모독의 경계선

 

할로- hallow-ween ‘hallow’는신성시하다, ween은 의도하다는 뜻이 결합된 단어다.  신성해야 할 할로윈 축제에 왜 죽음의 귀신과 해골 등이 등장하는 것일까?  우리 사람들은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존재다. (창세기 3:19).  우리 사람들은 죽으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3]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새싹은 씨에서 솟아나는데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농토를 갈아 엎어야 한다.  새싹이 새 생명을 잉태하고 따라서 그렇게 신성하다면 묶은 땅을 새로이 갈아 엎는 것 또한 신성하다는 의미가 된다.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잉태한다.  논밭을 갈아 엎는 것은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죽음 없이 부활 없고 부활은 생명의 법칙인 것이다. 영미인들의 이러한 숭고하고 장엄한 우주법칙과 부활의 존재를 믿는 생각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될 것이다. 

 

“신성시하다”의 영어 단어는 “hallow”인데논밭을 갈아 엎다는 뜻의 영어 단어는 발음이 비슷한 “harrow”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 발음 “r” “l” 구별하기 힘든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혀 구부리는 유음의 발은 쉽지 않다는 것.  하지만 서양인들도 “r” “l”철자에 혼동을 하고 어느 철자가 맞는지의 문법 논쟁을 한 사실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아버지의 이름이 “Olorus”인지 “Orolus” 인지를 두고서 많은 고대의 논쟁이 있어 온 사실 (Marcellinus “The Life of Thucydides”)에서도 알 수 있다.  r l 철자를 혼동해서 새로운 영어 단어가 생겼다고 유추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의 하나에 속하든 삶과 죽음의 경계는 종이 한끝 차이라며 서로 의미가 상통한다는 뜻에서든 아무튼 “harrow”하고 “hallow”는 서로 의미의 연관이 있다고 여긴다.

 

 

죽음이 가르쳐 주는 의미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떻게 해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지에 있다. 같은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깨우치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법칙을 알지 못하고선 결코 우주여행을 할 수 없듯이 지식과 인식 없이는 새로운 발전을 이룰 수가 없다.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에서 마지막 문장은, “삶의 임무를 띠고 나선, 이런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한 것이다. , 바틀비! , 인간이여!”[4]이 구절의 의미는 한자 성어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어울린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만시지탄의 의미가 이미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이 강조되고, 이미 늦어서 소용이 없다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의 표현과 같은 의미로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의 원래적 의미는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써가 아니라, "'토끼를 보고 나서 사냥개를 불러도 늦지 않고, 양이 달아난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 (見兎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표현이었다.  이중부정의 문장표현 구조는 강한 긍정을 의미한다. 

 

, 바틀비! , 인간이여!”이 문장을 통해, 독자들은 대개 만시자탄의 의미를 되새길 것 같다.  영미국인에게 인간적인(humanity)”이란 말의 의미는 뒤늦게 뉘우쳐도 이미 소용이 없다부정적인의미가 아니라,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뜻에서처럼 뒷문장의 고친다는 개혁의 두 번째 뜻에 보다 강조점을 두는 긍정적인의미로 쓰여진다는 점이다.  영어 구문 표현 중에 우리말 구조에는 흔한 것이 아닌 이중부정문의 예를 들어보자.  영어 시험 문제 중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장, “We cannot overemphasize the importance of reading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I have never experienced anything so painful in my life as A’s death (나는 A의 죽음만큼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바틀비 스토리에서 나오는 문장은, “Before, I had never experienced aught but a not-unpleasing sadness. (이제껏 나는 아름다운 슬픔밖에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예에서 나타나는 “cannot ~~ too ~~ 아무리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의 영어 구문 표현은 이중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영미인의 사고구조로는 아무리 늦어도 결코 늦은 때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속담과 같이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며”, “정말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의 표현이 그와 같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문제가 있다는 것, 그 문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해내는 )capable of solving the problem) 능력과 그 결과에 있다고 본다.

 

월 스트리트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필연주의 철학을 강조한 프리스틀리, 뉴튼, 아담 스미스 등 자연법칙 결정론자들은 사람은 어떤 동기(motives)에 의해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 동기는 주변 환경에 연유(cause)하므로 환경과 동기는 고쳐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영미인의 기계론 자연법 경험론의 철학이 동양의 운명론과 결정적인 차이가 나는 점은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운명은 교육을 통해서 바꿀 수 있고 또 새로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점에 있다.  바꿔 말하면 영미인도 한국인도 운명의 존재는 다같이 인정하는데 단지 그 역할과 정도는 서로 반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영미인에게 운명(정해진 법칙에서 어긋나고 예측하기 힘든 행운이나 기적이 작용하는 매우 특별한 것)이 전체 법칙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10%정도 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반면, 한국인은 정해진 운명이 9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그저 손 놓고 포기하는 개념으로 받아 들인다는 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

 

사람들은 미리 앞서서 이성적인 대처를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마침내 파국적인 결말을 맞고서 그때서야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약점이 거기에 있고 그래서 사람은 죽고 나서야 깨닫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헤겔은 말하지 않았을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5]  역사의 운동 법칙을 찾아낸 헤겔이 역사는 현실이 무르익을 때 비로소 관념적인 것이 실제적인 것에 맞서서 나타난다고 말했는데 그가 삶은 다만 인식되는 것 뿐이라는 의미로만 말했을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흔들고 지나간 자리를 통해서 바람의 길을 알듯이, 진리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선행하기보다는 그 일이 모두 다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인식되는 것 같다."  어쨌든 철학적 인식은 항상 너무 늦게 이루어진다.  철학이 이성의 회색에 회색을 덧칠할 때 인생의 한 모습은 이미 지난 것이되어 있을 뿐이다.  회색에 회색을 덧칠하면 그인생의 모습이 다시 젊음을 찾지 못하는 것이며 단지 인식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설명한 헤겔의 메타포어를 우리 삶에 인용한다면 우리가 현재 복잡한 세상사에 얽혀 그 변동의 소용돌이속에선 정확한 인식과 평가를 할 수 없을 것이며 지나가고난 뒤 냉철한 분석과 냉정한 시각으로 다시 전체적 조망 (파노라마, 부엉이 눈으로 보는 것)을 할 때에만 비로소 진실과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부엉이를 어깨에 앉혀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미국 대통령 문장에 독수리가 등장한다.  로마 제국의 개선장군의 행차 길에는Mementomori”라는 말을 전하는 노예가 따라 붙었다고 한다.  모멘토 모리당신도 죽을 운명임을 기억하라 (remember that you have to die)”라는 뜻으로 오늘 비록 승리했다고 너무도 취하지 말라는 경고의 속뜻을 갖는데 오늘날 월스트리트에서 중요하게 환기되는 개념이다.

 

행태 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의 많은 논문이 밝혀주듯이,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합리적 인간 (이기적 인간, 호모 이코노무스(homo economicus)’ 모델은 실제의 현실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차이가 난다.  인간은 자기이익을 추구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결론은 경제학의 순수한 가정이고 이는 법에서의 가상적인 장치인 의제에 해당한다.  반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카네만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 세상에 살아가는 현실의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판단을 그르치고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 “현실의 실제 사람들은 그런 실수를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real people make mistakes systematically).사람들은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실수를 줄여나갈 수가 있고 또 잘못을 고칠 수 있는 능력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만 또한 인간이기에 그러한 실수를 막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실수를 통해서 인간 사회의 진보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보는 necessitarian 견해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발전과 진보를 이루기 위한 조건 하나는 편견을 버리고 오픈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플로지스톤(불꽃) 이론의 탄생과 종언

 

플로지스톤(불꽃) 이론

 

사람들의 행동을 불러오는 동기에는 우리들의 마음 속의 생각에 좌우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긴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경우 그동안 존재하던 뭔가가 나갔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사람의 몸과 마음은 별개이고, 사람이 죽으면 혼이 나간다고 여기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  혼불의 개념이 민간 신앙에서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과 몸에 대한 관념론적 사고에 기반한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나무와 숯을 태우는 경험은 일상적이었다.  금은동의 제련 또한 고대로부터 경험했다.  물건이 타고 나면 재 (금속을 가열하면 금속회가 남는데 이를 ‘Dead Body’라고 불었다)가 남는데 재는 가열전의 금속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시체도 죽기 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은 혼이 나갔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연소, 호흡, 발효, 부패 작용의 경험적 이해에서 물질 변화 과정에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물건이 탈 때 사람들은 거기서 나오는 뭔가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따라서 어떤 물건을 태을 때 연기가 나가듯이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몸에서 뭔가 나간다는 것이 생각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할로윈 축제의 기원과 영국의 고대 민간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들어 미신이라고는 믿지 않는 자연과학자들도 연소 현상 같은 물질적 변화 과정에 대해서 단 하나의 간단한 원리로 설명하려는 생각이 높았다.  물질이 타는 것은 물질 속에 그 무엇’(이를 플로지스톤이라고 가정한다)이 있기 때문인데 이 플로지스톤은 불꽃과 함께 물질의 외부로 빠져 나오게 된다고 설명하면 사람은 대개 이에 수긍하는 편이 강했다.  이와 같이 연소물질에 하나의 가상 물질(무색 무취 무형체)플로지스톤(phlogiston)’ 불꽃 (flame)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의 존재를 과학자들도 가정하고 있었다.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프리스틀리 또한 가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 개념인 플로지스톤 이론에 집착했으며, 철학자 칸트도 플로지스톤 이론을 경탄해 마지 않았음을 볼 때 우리나라에서 민간 신앙의 혼불같은 개념이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한 때 과학자들까지도 신봉했던 플로지스톤 이론은 이미 200년 전에 사라져 종언을 고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1772년 라부아지에가 모든 물질은 연소할 때 공기의 일부 즉 산소의 영향으로 인해서 중량이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해 주었고, 이로 인해 플로지스톤 이론은 곧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1789년 출간된기초화학교과서에도 실려 있는데, “물질은 있던 것이 없어지거나,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물질이 그 형태가 변하여 새롭게 생긴 물질로 존재한다(Nothing is lost, nothing is created, everything is transformed).”  라부아지에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화학방정식으로 증명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라부아지에의 기초화학 교과서가 출간된 1789년에 플로지스톤 이론은 이론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미신적 신앙에 가까운 경외감으로 아직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면 기초화학 교과서를 다시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1] “Many shall be restored that now are fallen, and many shall fall that now are in honor.”

[2] “All go to the same place; all come from dust, and to dust all return.”

[3] “All go to the same place; all come from dust, and to dust all return.” (전도서 3:20.)

[4] “On errands of life, these letters speed to death.  Ah, Bartleby! Ah, humanity!”

[5]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mmerung ihren Fl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