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든 것을 곰곰이 되새겨 보고, 또 그것을 그가 내 사무실을 자신의 지속적인 거처이자 사는 집으로 삼고 있었다는 조금 전에 발견한 사실과 결합하면서, 그리고 그의 병적인 우울증까지 빠뜨리지 않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말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두루 살펴 보자, 내가 조금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겠다는 느낌이 스며 들기 시작했다. 내게 드는 첫 번째 감정은 순수한 우울함과 진실한 연민이라는 바로 그런 감정이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 바틀비의 절망적인 고독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비례하여 바로 그 똑같은 우울함이 두려움으로 겹치고, 바로 그 똑 같은 연민이 혐오감으로 겹쳐지는 것이었다. 비참함을 생각하거나 또는 직접 보게 될 때 어느 일정한 정도까지는 우리들에게서 최고도의 애정[1]이 우러나올 수 있지만, 어떤 특별한 경우,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데, 과연 이 말이 진실일 뿐만 아니라, 너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어김없이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이기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은 과도한 기질적 질환[2]은 어떻게 치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연민의 정으로는 실질적인 도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인식을 마침내 갖게 되면, 영혼은 연민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다. 그날 아침 내가 목격한 것에 의해 그 필경사가 타고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납득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육신을 위해서는 자선[3]을 베풀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받는 고통은 육신 때문이 아니다. 고통스러움을 겪는 것은 그의 영혼이다. 내 구호의 손길이 그의 영혼 속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4]
나는 그날 아침 트리니티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자 하였던 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찌됐든, 내가 직접 목격한 이상 나는 당분간 교회에 나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바틀비를 어떻게 해야 될 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고심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강구하기로 결론 내렸다. 다음날 아침, 그에게 그의 이력과 기타 사항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차분하게 해 던져 보는데, 만약 그가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분명하게 또는 마지못해 거절한다면 (내 생각에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것 같다), 그럴 경우 얼마가 되건 내가 그에게 지급해야 할 그간의 급료에다 20달러 짜리 지폐 한 장을 더 얹어 주면서, 이제 그의 근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나는 말할 것이다.[5] 하지만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내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으며, 특히 그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면, 거기가 어디가 되었건 간에, 그의 여비를 내가 기꺼이 부담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게다가, 고향 집에 돌아간 후, 언제라도 무슨 도움이 필요할 경우가 생긴다면, 내게 편지 한 통 보내주고 그러면 틀림없이 내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음 날 오전 시간이었다.
“바틀비,” 가림막 뒤에 있는 그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
대답이 없었다.
“바틀비,” 이번에도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이리 와.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네게 간단히 이야기나 할까 해서 그래.”
이 말을 듣고 그는 아무런 소리 없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틀비,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말해주겠니?”[6]
“나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네 신상에 대해 말해주겠나?”
“나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게 말해야 되는 것을 거부할 무슨 적절한 사유가 있다면 그걸 말해 보겠나? 나는 네한테 친근감을 느끼는데.”[7]
그는 내가 말하는 동안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가 앉은 자리 바로 뒤, 내 머리 위로 15센티미터쯤 떨어져 놓여 있는 키케로[8] 흉상에 계속 눈길[9]을 맞추고 거길 쳐다보고 있었다.[10]
“바틀비, 네 답변을 듣고 싶은데 말해 보게나?” 그가 답변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여유 시간을 주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내가 말했다. 내가 그의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 그의 얼굴 표정은 내내 변하지 않았고, 다만 그 창백하고 힘없는 입술이 살짝 떨렸을 뿐이었다.
“지금은 내가 어떤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아요,” 하며 그가 말하고서는 다시 그의 은둔처로 물러갔다.[11]
내가 고백하건대, 내게 조금 약한 면이 있어서긴 하지만 이번 경우에 나타난 그의 태도가 거슬렸다.[12] 그의 태도 속에는 무시하거나 모독하려는 감정이 숨어 있는 듯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내게서 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우와 관용을 고려해 보면, 그의 삐뚤어짐은 배은망덕한 짓으로 보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내가 어찌해야 될 지에 대해서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그의 행동에 굴욕감을 느꼈고, 그를 해고하기로 이미 결론내고 사무실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무언가 미신적인 것이 내 심장을 두들기고, 내 목적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아서고, 만약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이 사람에게 내가 감히 쓰라린 말 한 마디라도 꺼낸다면 나는 천하에 몹쓸 사람이라고 비난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그의 칸막이 뒤쪽으로 내 의자를 친근하게 끌여다 앉으면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바틀비, 그렇다면 네 이력을 밝히는 것은 괘념치 말게나. 하지만 친구로서, 부탁하건대, 가능한 한 이 사무실의 관례를 따라주길 바라네. 내일이나 모레쯤 서류 검토하는 것을 돕겠다고 지금 말해 줘. 간단히 말해서, 하루 이틀 지나면 네가 좀 합리적인 사람[13]이 될 거라고 지금 말해 달라는 거야.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봐, 바틀비.”
“지금은 좀 합리적으로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죽어가는 시체 같은 그에게서 나온 답변이었다.
바로 그때 접문이 열리더니 니퍼즈가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심한 소화불량 탓에 유별나게 밤잠을 설친 것이 역력했다. 그가 바틀비의 그 최종적인 말을 엿듣게 된 것이다.
“뭐 하고 싶지 않다”고?, 니퍼즈가 이를 갈듯이 말했다. “내가 변호사님이라면, 그가 하고 싶다는 말을 하게 만들 텐데요.” 그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가 하고 싶다는 말을 하게 만들 텐데요. 난 그가 선호하는 것을 주겠어요, 저 고집불통의 당나귀 같은 사람에게는! 변호사님, 이번에 그가 안 하고 싶다고 말한 건, 대체 뭔가요?”
바틀비는 손발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미스터 니퍼즈,” 내가 말했다. “넌 당분간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싶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최근에 나는 이 “선호하다(prefer)”라는 단어를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도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14] 사용하는 습관이 붙게 되었다. 내가 그 필경사와 접촉하게 되면서 내 사고 방식이 이미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이 오싹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어떤 탈선의 징후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들자 나는 뭔가 즉결 조치[15]를 재빨리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니퍼즈가 매우 화내고 삐친 표정으로 나가자, 터키가 밝고 공손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존경하는, 변호사님,” 그가 말했다. “어제 여기 바틀비에 대해서, 내가 생각해봤는데요, 만약 그가 매일 시원한 에일 맥주[16] 1리터 정도를 마시고 싶어하기만 하면, 그가 고쳐질 수 있으며,[17] 그리하여 필사 검증하는 자신의 일에 끼어들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너 역시 그 단어를 쓰는군,” 내가 약간 흥분하여 말했다.
“존경하는, 변호사님, 무슨 단어 말씀입니까?” 하고 터키가 물으면서, 칸막이 뒤의 좁아터진 공간으로 공손하게 밀고 들어왔고, 그 바람에 나는 그 속기사와 거의 부딪힐 뻔했다. “무슨 단어 말씀입니까, 변호사님?”
“나는 여기에 내 혼자 있고 싶습니다,”[18][19] 바틀비가 자신의 사적 공간이 혼잡해진 것에 화가 난 듯 말했다.
“터키, 저것이 그 단어다,” 내가 말했다. “저것이 바로 그것이다.”
“앗, 선호하다 라는 그 단어? 네, 그렇죠. 정말 이상한 단어입니다. 나 자신은 그것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님, 말씀 드렸듯이, 만약 그가 그걸 정말 원하기만 한다면.“
“터키,” 내가 그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넌 제발 그만두게나.”
“아, 물론이죠, 변호사님. 변호사님이 내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원한다면요.”
터키가 물러나가 위해 접문을 열었을 때, 니퍼즈가 자기 책상에서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내가 어떤 문서를 푸른 색 종이와 하얀 색 종이 가운데 어느 쪽에다 필사했으면 싶은지 물었다.[20] 그는 ‘하고 싶다(prefer)’라는 그 단어를 조금도 짓굳은 억양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21] 이 단어가 그의 혀에서 무심결에 자동적으로 튀어 나온 것이 분명했다. 나 자신과 부하 직원들의 머리는 아닐지라도, 말을 이미 상당 정도 변질시킨, 이 미친 사람을 확실히 제거해버려야겠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즉시 해고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1]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정서(affections)는 사람들이 인식(understanding)의 수준을 넘어서, 어떤 대상에 대해 감정을 느끼고, 관심을 보이고, 좋아하고 하는 그런 성향이나 이끌림(inclination), 선호 의지(will), 마음(heart)이다. 흄, 아담 스미스, 프리스틀리 등의 경험철학자들에게 감정에 대한 개념은 공유된다.
[2] “기질적 질환(organic ill)”. 1850년대 당시에 사람이 불치병 (incurable disease)에 걸렸다면 의사의 처방에 의해 존엄사도 가능하다고 본 일부의 의견이 나타났다. 하지만 영미인의 필연주의 경험론 철학에서는 우주질서는 인간 사회의 완전과 발전을 향한 인간의 노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다. 자연은 무궁무진한 것이고 인간 사회 또한 무한한 발전을 해나간다는 철학적 기초에서 희망의 끈은 포기되지 않는다.
[3] Alms은 의연금, 구호성금을 내는 것을 뜻한다. alms house는 사설 구호단체가 오갈데 없는 빈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구빈원을 지칭한다. 공공단체가 운영하는 수용자 시설을 “poorhouse”라고 불렀다.
[4] 대륙국가에서는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고가 우위에 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 등의 정신분석학의 관념론이 성행한 것 같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변화는 “영혼의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프리스틀리, 아담 스미스 등 영국의 경험론자의 사고는 인간의 보다 좋은 삶이 물질적인 풍요 그 이상의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런 ‘좋은 삶’의 추구는 최소한 물질적인 풍요가 밑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경험론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밖으로 나타나는 행위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대륙국가의 사고와 차이가 난다.
[5] 퇴직금은 severance pay. 산업사회의 발전으로 자유 방임주의가 팽배하였던 당시 “고용 계약의 자유 (the employment at will rule)”, “해고 자유의 원칙(presumption of terminability at will)”을 보여준다.
[6] 당시 1850년 노동법 개정으로 도망친 노예들을 원주인에게 돌려보내는 노예추국법(Fugitive Slave Ac 1850)이 시행되었다.
[7] 구약성경의 에스더는 자신의 출신과 배경을 비밀에 부치고 살아 남아서 절멸의 다급한 순간에 처한 유대민족을 구해내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8] Cicero (BC 106-BC 43) 유명한 로마 시대의 변호사. 키케로에 대해서 화자인 변호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 로마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키케로가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에 대해 재판 없이 처형하고 반란을 진압한 사례에 비추어, 자신도 주인에게 반기를 든 직원인 바틀비를 지체없이 즉시 해고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모든 법과 절차를 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까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9] 영미인의 대화 문화에서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말하는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 보지 않는 사람은 죄지은 guilty 감정이 있다거나 또는 관심이 없다는 표시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는 조심해야 될 것 같다. 이런 태도를 보이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다. 반면 동양인은 (특히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 대화 중에 시선을 상대방에게 똑바로 맞추지 못하는 태도를 나타내는데 이는 동양인의 진노외 추궁과 죄의식의 문화에서 나오기 보다는 공손함의 문화에서 나오는 것 같다.
[10] 대륙법 국가에선 “진노의 하나님”의 개념이 우월하여 처벌과 추궁의 관점이 강조되는 반면 영미국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의 개념이 우월하다. 따라서 영미국의 학교 교육에서 처벌의 관점보다는 보상의 관점이 앞선다. 프리스틀리의 교육 철학에서 강조되듯이, 잘못을 처벌하는 ‘심판’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잘못을 했더라도 실수나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해주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강조되므로 영미국의 학교 교육에서 처벌의 시스템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은 처벌을 두려워하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스스로 밝히려는 태도를 보이기 어렵다. 영미국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시스템에 기반하므로 스스로 밝히는 것을 장려하고 자진 신고제의 인센티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또 중요한 차이점 하나는 “모든 정보 제공의 의무 (full disclosure)” 개념이다. 대륙법 국가에서는 국가가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빈약한 반면 영미법은 정부에게도 솔직한 정보 제공의 의무를 부담시키므로 설령 정부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일지라도 공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륙법 국가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처벌을 피하고자 함구로 일관하거나 더 나아가 있는 사실도 덮어버리고 그 흔적을 지워버리며 증거 인멸까지 시도하는 2차적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흔히 일어난다. 반면 영미법은 잘못을 고치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사랑의 하나님”의 개념이 우월하여, 정보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공개하는 “자진 신고 의무 (duty of candour)” 제도 즉 설령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먼저’‘솔직하게(candid)’‘공개해야(being open)’ 한다는 원칙이 법문화적으로 정착되어 있다. 솔직한 자진신고(candour), 완전 정보 제공, 투명성 등의 개념에 대해서 영미법과 대륙법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11] 구약성경에서 에스더가 자신의 출신 신분을 왕이 물어보는 대로 순진하게 밝혔다면 왕비가 될 수가 없었을 테고, 따라서 유대민족을 멸망의 순간에서 구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 카르타고 사람들은 로마 제국이 전쟁을 회피하려면 모든 무기를 자진해서 갖다 버리라는 요구에 순진하게 넘어가서 전쟁을 회피하기는커녕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던 사실-그와 같은 “순진한 바보”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 만약 바틀비가 당시에 도망친 노예의 처지이었다면 그가 자신의 정보를 밝힌 순간 원래 주인한테 되넘겨져야 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일본어 “馬鹿正直”(바카 쇼지키, stupidly honest)를 참고하라.
[12] 바틀비의 대답 (증언) 내용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답변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증인에 대한 변호사의 질문 방식이나 기술이 약해서 그가 원했던 답을 이끌어내지 못한 사실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13]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각종의 산업 재해 사고가 크고 많이 일어나자 합리적인 사람의 행동 기준에 대한 설정 요구가 드높아졌다. 법학에서 “합리적인 인간(reasonable person)”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35년이고 법에서 “합리적인 인간”의 개념이 처음으로 제시된 케이스는 영국의 1837년 Vaughan v. Menlove 사건이었다. 산업 사회로 발전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라도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고의성이 없으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발전되면서 크고 작은 각종의 사고가 빈발하면서 시각이 달라졌다. 대규모 공장 노동자 인력이 필요하였는데 이들은 많은 경험이 요구되는 일도 아니고 따라서 모든 노동자는 거의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산업사회가 크게 발전하자 개인의 특이성은 어느 정도 선에서 희생되어야 하는 생각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새로운 산업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발전은 “합리적 인간”에 대한 개념이 정립 (개인의 특이성이 희생되고 평균인이 요구됨) 될 것을 요구하였다. 홈즈는 “보통법”에서 말했다: “For society to function, "a certain average of conduct, a sacrifice of individual peculiarities going beyond a certain point, is necessary to the general welfare."
[14] “무심결에(involuntarily)”의 뜻은 사람의 자유 의지에 상관없이 즉 의도가 개입될 여지도 없는 사이에 무심결에 자동적으로 일어난 행동을 말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의 책임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5] Summary action은 증인의 소환 없이 문서 증거에만 의존해서 즉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약식 재판의 한 종류를 말한다.
[16] 맥주(Beer)는 발효 방법에 따라 크게 두 종류(애일 Ale, 라거 Lager)가 있는데 에일(Ale) 맥주는 주로 영국산이고, 라거(Lager) 맥주는 독일산이다. Ale 맥주는 진저넛, 오후 차 마시는 휴식시간(tea time) 등의 표현과 같이 영국 출신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음식 관련 어휘이다. 에일(ale)은 astor, ester 발효 향 ale, astor, ester 이렇게 발음, 향기, 맛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 표현이다. 이민자들 사이에 자신의 출신국가를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어떤 맥주를 택하는지 ‘선호도’에 따라서 대략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가름해 볼 수 있다. 개인의 선호도는 문화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17] 영미 경험론의 입장은 사람은 개과천선(mending)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실수와 잘못을 고칠 수가 있다는 교육의 기능면에서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18] “혼자 있을 권리(right to be alone)” 즉 프라이버시(privacy)는 인간 본성의 하나로 이해되고 오늘날은 헌법적 기본권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19]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한 정부의 불간섭 정책 즉 자유방임주의 laissez-faire는 개인의 자율에 맡기는 “leave alone”, “allow to be”의 정책이었다.
[20] 빨간색은 보통법, 푸른 색은 형평법 법원을 뜻했다. 영미국에선 전통적으로 정치 정당의 색깔을 진보는 빨간색, 보수당은 푸른 색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색깔로써 지지 정당과 사상과 신조를 구분한 것이다.
[21] 말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 문제에서 말하는 사람의 지위, 입고 있는 옷의 색깔, 복장의 형태, 말의 억양, 어조, 성조, 뉘앙스 등의 보조사항으로 인해서 의미의 차이가 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