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서 김일제전 번역
김일제는 어떻게 투후가 되었는가?
BC 121년 여름. 곽거병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련산 일대를 공략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3만 이상을 사살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노획했다. 흉노의 선우가 패배에 대한 책임을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묻자 이들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작정하였다. 투항하기 전에 휴도왕이 마음을 바꿔 동조하지 않자 혼야왕이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군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磾)와 그의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잡혀왔다. 이들은 교외 밖에서 궁정용 말을 키우는 노예의 천한 일을 맡았다. 그러던 중 무제가 연회를 베풀며 달리는 말을 사열하는 과정에서 꼿꼿한 자세를 견지한 일제를 발견하고 그를 궁정 무사로 발탁하였다. 노획한 흉노왕이 섬기는 하늘님 천주(天主)의 청동동상(金人)-“休屠作金人為祭天主”-을 고려하여 한무제가 김씨성을 하사하였다. “磾” 한자는 흑색 염색용 검은 숫돌을 지칭하는 글자이고, 서양인의 몸에서 나는 노린내를 없애주는 남성용 방향제를 금제향(金磾香)-당나라 때의 통명기에 의하면 김일제는 궁궐 드나들 때 의복을 청결히 소제하고 서양인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이 금제향을 뿌리고 다녔다-《說郛》: “金磾香 《洞冥記》 金日磾 既入侍 欲衣服香潔 變胡虜之氣 自合此香”-. 금제향으로 부른 것 또 검은 먹물로 문서를 지우는 것 또 조작된 문서를 흑서(黑書)-백서의 반대말-라고 부르는 것 등 어원을 고려해 본다면 김일제(金日磾)는 은밀한 역사를 은폐 조작하고 미화하는 흑서의 검은 장막을 함의한 말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민자는 살아남기 위하여 과거 역사를 은폐 조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은 진화론의 적응하는 동물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서 김일제전 번역
한서 김일제전 | |
金日磾字翁叔,本匈奴休屠王太子也。武帝元狩中,票騎將軍霍去病將兵擊匈奴右地,多斬首,虜獲休屠王祭天金人。其夏,票騎復西過居延,攻祁連山,大克獲。於是單于怨昆邪、休屠居西方多為漢所破,召其王欲誅之。昆邪、休屠恐,謀降漢。休屠王後悔,昆邪王殺之,并將其眾降漢。封昆邪王為列侯。 | 김일제의 자는 옹숙이고, 본래 흉노족 휴도왕 태자이다. 한무제 원수중(BC 122 –BC 117) 표기장군 곽거병이 장병들을 흉노족 우측을 공격하게 하고 대거 적의 목을 베고, 휴도왕의 제사 드리는 청동동상을 노획했다. 그해 여름철 곽거병은 거연산을 거쳐 다시 서쪽으로 들어가 기련산을 공격했고 대거 노획을 거두었다. 곤야왕와 휴도왕의 서쪽이 한나라 군에 대파당하자 선우가 이둘을 원망하고 주살하고자 했다. 이에 곤야왕과 휴도왕은 두려워서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했다. 휴도왕이 이를 후회하자 곤야왕이 그를 죽여버리고 부하들을 데리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곤야왕은 열후에 봉해졌다. |
日磾以父不降見殺,與母閼氏、弟倫俱沒入官,輸黃門養馬,時年十四矣。 | 일제는 아버지가 투항하지 않고 피살되자 어머니 알씨와 동생 륜과 함께 궁전밖 황문 말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천한 일을 했다. 이때 일제의 나이 14세였다. |
久之,武帝游宴見馬,後宮滿側。日磾等數十人牽馬過殿下,莫不竊視,至日磾獨不敢 | 세월이 흐른 후 무제는 연회를 베풀고, 후궁들이 가득찬 가운데 사육하는 말들을 사열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제각기 자신이 사육한 말을 끌고 전각 아래를 지나갔다. 힐끔힐끔 훔쳐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일제만은 훔쳐보려고도 않고 지나갔다. |
日磾長八尺二寸,容貌甚嚴,馬又肥好,上異而問之,具以本狀對。上奇焉,即日賜湯沐衣冠,拜為馬監,遷侍中駙馬都尉光祿大夫。日磾既親近,未嘗有過失,上甚信愛之,賞賜累千金,出則驂乘,入侍左右。貴戚多竊怨,曰:「陛下妄得一胡兒,反貴重之!」上聞,愈厚焉。 | 김일제는 8척2촌의 장신에다 용모가 준엄했다. 그의 말은 살찌고 뛰어나 무제는 기이하게 여기고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무제는 기특하게 여기고 목욕재계하게 하고 의관을 하사했다. 일제는 馬監(마감)에 제수받고,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로 고속 승진해갔다. 일제는 무제의 곁에 있었고 잘못 하나 없이 수행했다. 무제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매번 하사금을 받아 수천금에 이르렀다. 외출 순시할 때마다 황제의 마차에 배승했고, 환궁하면 좌우에서 시중했다. 귀척들이 이런 일제를 질투하고 시기하여 말하길: “폐하는 오랑캐의 자식 하나를 어찌 이다지도 귀하게 중용하십니까!”라고 하였지만, 무제는 이를 듣고도 물리치고 더욱 후하게 아꼈다. |
日磾母教誨兩子,甚有法度,上聞而嘉之。病死,詔圖畫於甘泉宮,署曰「休屠王閼氏。」日磾每見畫常拜,鄉之涕泣,然後乃去 | 일제의 모친은 두 자식 교육에 열심이었고 법도를 갖추라고 했다. 무제는 이를 치하하였다. 모친이 병으로 죽자 무제는 감천궁에 초상화를 그려두게 했다. 초상화의 제목은 “휴도왕 알씨”였다. 일제는 모친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절을 올리고 곡을 한 후 다녀갔다. |
日磾子二人皆愛,為帝弄兒,常在旁側。弄兒或自後擁上項,日磾在前,見而目之。弄兒走且啼曰:「翁怒。」上謂日磾「何怒吾兒為?」其後弄兒壯大,不謹,自殿下與宮人戲,日磾適見之,惡其淫亂,遂殺弄兒。弄兒即日磾長子也。上聞之大怒,日磾頓首謝,具言所以殺弄兒狀。上甚哀,為之泣,已而心敬日磾。 | 일제는 아들 두명을 애지중지했고 무제의 노리개 아이로 항상 무제 곁에 두었다. 이 아들이 무제의 목을 껴앉고 있는 것을 일제가 직접 똑바로 보자 아이는 달아나 울면서 말했다: “옹이 분노했어요”. 이에 무제가 일제에게 말했다: “내 아이에게 어찌 화를 낸다는 것인가?” 그 후 아이가 자라나 장성해지자 조신하지 못하고, 궁전앞에서 궁인들과 희롱을 즐겼는데 이를 일제가 목격했고 일제는 음란한 것을 싫어하여 자식을 바로 죽여버렸다. 이 아이는 일제의 장남이었다. 무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자 일제는 머리를 땅에 대고 석고대죄 사과를 하며 자식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말했다. 무제는 심히 슬퍼하였고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이는 일제의 마음을 울렸다. |
初,莽何羅與江充相善,及充敗衛太子,何羅弟通用誅太子時力戰得封。後上知太子冤,乃夷滅充宗族黨與。何羅兄弟懼及,遂謀為逆。 | 망하라와 강충은 서로 원래 사이가 좋았고 강충이 위태자를 공격할 시 동생 망통과 함께 태자반란군에 맞서 역전분투하여 봉작위를 받았다. 그 후에 무제가 태자의 억울함을 인지하고서 강충의 종족을 주멸하였고 이에 망하라와 망통은 두려움이 앞서 역모를 꾸몄다. |
日磾視其志意有非常,心疑之,陰獨察其動靜,與俱上下。何羅亦覺日磾意,以故久不得發。 | 일제는 평소 그런 낌새를 채고 망하라의 행동을 의심쩍고 예의주시했다. 일제는 몰래 그 동정을 살폈다. 망하라 역시 그런 일제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역모를 꿰할 수 없었다. |
是時上行幸林光宮,日磾小疾臥廬。何羅與通及小弟安成矯制夜出,共殺使者,發兵。明旦,上未起,何羅亡何從外入。日磾奏廁心動,立入坐內戶下。須臾,何羅袖白刃從東箱上,見日磾,色變,走趨臥內欲入,行觸寶瑟,僵。日磾得抱何羅,因傳曰:「 莽何羅反 」上驚起,左右拔刃欲格之,上恐并中日磾,止勿格。日磾捽胡投何羅殿下,得禽縛之,窮治皆伏辜。繇是著忠孝節。 |
무제가 임광궁에 행차했을 때 일제가 수행했고 때마침 일제는 객사에 누워 있었다. 망하라와 망통 그리고 다른 형제 안성은 가짜로 칙명을 조작하고 야출하여 사자를 죽이고 거병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무제가 아직 침상에서 잠자고 있을 때 망하라가 어디에선가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마침 측간 변소에 가던 일제는 직감적으로 의심이 들어 궁전 안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순간 품 속에 칼을 품고 침입하는 망하라가 일제를 보고 얼굴색이 변해 침실내로 잠입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했다. 비상암구호를 묻자 아무 반응이 없어 일제는 망하라를 덮친 후 “망하라 모반!”이라고 전달했다. 무제가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좌우의 시위가 모여들어 칼을 대고 물리치려고 했다. 무제가 그가운데 일제가 있는 것을 알고 공격을 멈추게 했다. 일제가 망하라를 전각아래로 내던지고 제압하고 포박했다. 이들 모두 죄를 묻고 사형에 처했다. 이로서 충효와 그 인과관계는 절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日磾自在左右,目不忤視者數十年。賜出宮女,不敢近。上欲內其女後宮,不肯。其篤慎如此,上尤奇異之 | 일제는 무제의 좌우 곁에서 보좌했고 십수년을 옆으로 눈길 하나 흐트리지 않았다. 궁녀가 하사되었지만, 일제는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무제는 은근히 내심으론 후궁으로 삼을려고 했는데 일제는 응하지 않았다. 일제의 중후근심이 이와 같았고 무제는 특별히 경이스럽게 여겼다. |
及上病,屬霍光以輔少主,光讓日磾。日磾曰:「臣外國人,且使匈奴輕漢。」 | 무제가 중병에 걸린 후 요절한 곽거병의 동생 霍光(곽광)에게 어린 후계자 황제의 보좌를 부탁했다. 하지만 곽광은 일제에게 양보하자 일제는 “신은 본래 외국인인데 그것은 흉노가 한나라를 가볍게 보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사양했다. |
於是遂為光副。光以女妻日磾嗣子賞。 | 이 때 일제는 곽광의 부하로 2인자이었고 곽광은 자신의 여식을 일제의 둘째 아들 김상의 아내로 삼았다. |
初,武帝遺詔以討莽何羅功封日磾為秺侯,日磾以帝少不受封 | 무제는 임종 전에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秺侯(투후)로 봉하라는 遺詔(유조)를 남겼으나 일제는 소제가 아직 어리다며 작위를 받지 않고 사양했다. |
輔政歲餘,病困,大將軍光白封日磾,臥授印綬。一日,薨,賜葬具冢地,送以輕車介士,軍陳至茂陵,諡曰敬侯 | 일제는 남은 생을 보좌하다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은 작위에 봉함을 일제에게 알렸다. 일제는 죽음의 병상에서 인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망했다. 장례용품과 장지를 하사받았고 관을 이끄는 수레와 따르는 용사들을 장지인 무릉에 딸려보냈고 시호는 경후라고 했다. |
… | … |
金日磾夷狄亡國,羈虜漢庭,而以篤敬寤主,忠信自著,勒功上將, | 김일제는 한나라의 적국 오랑캐 출신으로 나라가 망해서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나깨나 진실로 한왕을 섬기고, 진심으로 믿음을 다해 섬긴 결과 큰 공을 세우고 높은 계급의 장군이 되었다. |
傳國後嗣,世名忠孝, | 후대 자손에게 봉읍지를 전해주고, 충성과 효성이 높은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
七世內侍,何其盛也! | 황제의 곁을 지키는 높은 벼슬의 궁중 내시를 대대로 지냈으니 그와같이 집안이 번창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本以休屠作金人為祭天主,故因賜姓金氏云 | 원래 휴도왕이 청동금상(금인)을 만들어 하늘(천주)에 제사를 지냈는 바 이에 따라서 황제가 김씨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
七世(칠세)는 七葉(칠엽)과 같은 말이다. 七葉(칠엽)은 문무왕릉비 비문속의 “부칠엽”과 같은 의미 즉 칠엽귀신(七葉貴臣), 칠엽중신(七葉重臣)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내시와 시중은 국왕의 좌우 곁에 서서 왕명을 출납하는 직무를 하는 높은 벼슬의 사람이다. 왕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으로서 비싼 담비가죽으로 된 초선(貂蟬)의 관을 머리에 쓰고 있어 그 신분을 쉽게 알 수 있어 칠엽대신이라는 말을 쓴다.
말세, 말엽이라는 우리말 단어에서 보여지듯 엽(葉)과 세(世) 글자는 서로 통용된다. 곽광과 김일제전을 함께 싣고 있는데 곽광과 김일제의 가계를 대조대비해서 교훈을 설명하고 있는 한서의 편찬 의도에서 본다면 칠세(七世)내시는 칠대(七代)내시로 해석된다. 곽광과 김일제는 뿌리깊은 본토토박이 군벌호족 외척세력과 뿌리 기반없는 외국이민자 노비출신이라는 출신배경의 큰 차이뿐만 아니라 한서의 영행전(총애받은 내시들이 국정을 전횡한 사례들)에서 김일제와 김일제 아들을 거명하면서 비록 이들이 각각 한무제와 한선제에게 총애를 받은 내시이긴 하였지만 그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측면에서 다른 총애받은 내시들의 삶과는 다르다고 논평한 구절-“昭帝時 駙馬都尉秺侯金賞 嗣父車騎將軍日磾爵為侯 二人之寵取過庸 不篤”(한서, 佞幸傳)을 참조하라.
무제는 임종 전에 망하라를 토벌한 공을 세운 일제를 秺侯(투후)로 봉하라는 遺詔(유조)를 남겼으나 일제는 소제가 아직 어리다며 작위를 받지 않고 사양했다.
7. 한무제의 죽음의 병상에서 내린 유조
한무제의 죽음의 병상에서 내린 유조에 대한 한서 곽광전 구절은 다음이다: “后元二年春,上游五柞宮,病篤,光涕泣問曰:“如有不諱,誰當嗣者?”上曰:“君未諭前畫意邪?立少子,君行周公之事.”上以光為大司馬大將軍,日磾為車騎將軍,及太仆上官桀為左將軍,搜粟都尉桑弘羊為御史大,皆拜臥內床下,受遺詔輔少主. 明日,武帝崩,太子梟尊號,是為孝昭皇帝. 帝年八歲,政事一決于光。遺詔封光為博陸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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