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3-나는 어떻게 문무왕릉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의 이 소설을 내 평생을 두고 흠미했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부분은 비석도 비바람에 마모되어 누구의 비석인지 조차도 희미해지는 인간사회의 망각의 구조를 쓸쓸히 적고 있다. 쉽게 잊혀지는 것이 인간의 기억과 망각의 구조인데 왜 어떻게 위대한 인간 정신은 영원히 이어진다고 얘기하는 걸까? 노자 도덕경은 불멸의 불과 인간 정신은 영원히 계승된다고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지는 지구상의 만물이라는데 불멸하는 존재가 과연 있기나 하는 걸까?
우리나라 맨 처음 고대국가 조선의 나라 이름에서 "조선"의 의미는 사마천의 해석대로 "조일선명"에서 나왔고 따라서 "아침에 가장 선명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달리 표현하면 "아침 이슬"이 되겠는데 아침이슬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나 해가 뜨면 바로 증발해버리는 매우 짧은 시간에만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화무십일홍”, 일본의 벚꽃 나들이 사꾸라 시즌 花見, 켄터베리 순례길, 또 우리나라의 고대 전통 답청, 그리고 명심보감에 나오는 구절 “富貴貧賤 成敗興衰似夢 時刻須防不測”의 의미 등은 서로 통한다.
인간의 기억은 경험한 모든 것을 저장해 두고 있고 또 그것을 필요할 때마다 새로 매치시켜 찾아내 결론에 이른다는 구조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론적 함의를 추출하면, 과거는 분명히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어머님 말씀, ‘해가 뜨면 일어나야 한다’. 소치는 아해야 동창이 밝았으니!-유명한 시조가 있드시. 밤새 공부해서 늦잠을 잤다면 아침을 먹고 나서 다시 자야 하는 것이고, 해가 뜨면 일하러 나가고 해가 지면 쉬어야 한다. “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飮耕田而食”. 사람은 무리하면 발란스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러면 몸과 마음의 해를 끼치게 된다. 어려서 경험한 가위 눌림은 사고를 미연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몸 신경계의 경고 작용에 의해서 일어난다. 악몽은 우리 자신을 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 속의 가이드를 우리는 “성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교의 경전에 해당되는 상서대전에 나오는 구절, "부모가 존재하듯이 만물에는 영이 있다." 나는 인간은 육체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마음과 심령과 그리고 위험에 대처하여 살아남는 용기-배짱 등을 가진 성스런 심령의 존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귀신보다 인간을 먼저 내세우는 유교에서도 만물에는 영이 들어있다는 사고가 지배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종교가 정치의 장으로 이용되면서 유교는 사대부 지배 계층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사용되어온 바 평등사상을 배척하고 계급 사회를 지향하는 기득권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만물에 신성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사람간에는 차별이 없고 인간은 다같이 평등하다는 사고를 낳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신성을 가진 성스런 영적 존재이다. 다만 신성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도교에선 이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카톨릭 주교가 장발잔의 마음을 일으키게 만든 성령의 인도가 레 미제라블의 소설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생존 본능에 의해서 누구나 어떤 두려움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 미지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 그것 말이다. 두려움은 오로지 마음 속의 상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두려움의 극복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생각해 본다. 백이와 숙제가 고죽국을 떠날 때의 심경일까?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는 소크라테스와 사마천의 경우처럼 오로지 죽음 이후에 가려지는 것이 아닌가?
예수와 어거스틴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이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것은 앙드레 지드가 말한 “먼 바다를 여행하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 있다”는 발견의 과정적 조건과도 같다. 이러한 조건은 문무왕릉 비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 전 김춘추와 김법민이 우리의 역사로써 증거해 주었다.
나는 지난 몇년간 “전부 아니면 전무”의 위험적 선택을 했다. 한 곳에 몰빵하면 실패가 크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버틸 수 있는 최후의 시간까지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의 상황에 이른 바 나는 어떻게든 결론을 얻기 위한 모험적 선택을 해야 했고 또 그것은 뒤돌아보면 나에겐 피할 수 없는 프리스틀리의 필연이었고 칼뱅의 운명예정설이었던 것 같다. “궁즉통”이라고 하는데 과연 위기상황에서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결국 백이숙제처럼 고사리 캐다가 가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온몸으로 우주의 기운을 마셨다. 오로지 밤하늘의 별과 대화하고 온몸으로 풀과 바람과 이슬을 맞이했다. 그런 3년간의 마지막 순간에 홀연히 그동안 찾았던 진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전율했고, 나는 지금도 내 눈을 의심한다.
그동안 내가 천착해 왔던 문무왕릉의 비밀이 드러나는 거대한 진실 앞에서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와 발끝까지 온몸이 전율함을 느꼈다. 이 영원한 우주 공간에서 두려움과 진실 앞에는 누구든지 전율할 수밖에 없다.[1] 정녕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이 진실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맞설 것인가? 두려움과 환희의 전율이 번개처럼 내 혼란한 머리 속을 동시에 강타했다. 이런 느낌은 문무왕 시절에 성행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정통 도교인 “부란 신앙”의 핵심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진리는 어느 한 순간 천둥 벼락 번개가 치듯이 짜릿하게 강타한다는 것. 종교와 신화적으로 말하면 번개의 신은 축융씨, 농업과 주방 화덕의 신은 신농씨, 그리고 상업과 전쟁의 신은 혜비수(비너스) 등인데, 이들 신들은 서로 함께 하고 서로 상통한다. 동서고금중외의 사료들을 천착해보라.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의 영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서 상상력으로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 영혼은 나비처럼 자유로이 날아다닌다. 석탑은 영어로 granite tower라고 말하는데 첨성대를 영어로 표현하면 granite tower(석탑)이 된다. 영어로 우뚝 솟은 기념비를 세워줄 만큼 불멸의 영웅적 인물을 ‘granite figure’라고 말하는데, 내가 고려대 석탑에서 공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내가 고려대를 다닐 적은 조지훈 선생은 이미 한참 전에 작고하셨다. 따라서 석탑 교정에서 내가 만난 것은 조지훈 선생의 육친적 존재가 아니라 그의 혼과 얼 그 정신이었다.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혼은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라 다닌다. 그래서 나는 조지훈 선생과는 무친이지만 사마천이 기록한대로 “천도무친 상여선인”의 이치가 지금에도 작동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태종과 문무왕이 해낸 일들을 보면 알다시피 사람의 일에는 천의와 인심이 작동되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 선조들의 단어로 말하면 조상의 음덕을 받는다는 것이다.
추연의 음양오행설은 실전되어서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전부를 기록하지 못했다. 새로움은 옛것을 통해서 이뤄진다.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우박처럼 그저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뉴튼의 일화로 잘 알려진대로, 사과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다는 말은 비유적 의미이다. 부모없이 어찌 자식이 태어나올 수 있는가? 뉴튼은 갈릴레오의 책을 통해서 그와 교류하고 지식을 축적했다. 뉴튼은 갈릴레오가 죽은 그 해에 태어났으니 갈릴레오를 실제 만난 적은 없고, 그의 라틴어 책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뉴튼에게 갈릴레오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를 열었을 수 있겠으며 아인슈타인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사과가 떨어진 곳에는 분명하게 사과나무가 있다는 것, 그것은 자연법칙이다.
“五德終始”가 반복 순환한다는 추연의 음양오행설의 요지는 ‘새로움이 옛 것을 극복한다는 것’-是新剋舊(시신극구)에 있다. 내가 당태종과 문무왕의 복원을 제창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봉건체제로 되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위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되찾자는 뜻이다. 새로운 잎은 썩은 씨앗에서 솟아난다. 시대는 발전해야 하고, 부패한 옛 것은 제거되어야 하고, 인간 사회의 질병과 환란은 극복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는가? 묘산 소림사를 개창한 도홍경은 말했다: “總者 料興亡於遺音之絶響 明者 覿機理於玄微之未形”. 총명하다는 것은 돌아가신 사람이 생전에 남겼던 인간 세상의 진실을 살펴보는 것이고, 예지롭고 영특하다는 것은 나타날 징조들을 자세하게 살펴서 이론으로 예측해내는 것이다. 케인즈식으로 말하면, 이미 작고한 선인들이 살았을 적에 생생하게 남긴 과거 기록들을 찾아내 탕 요리를 해내듯이 섞고 끓이고 달여내서 새로운 이론과 법칙을 만들어내고, 현재 당면하고 있는 또 앞으로 나타날 현상들을 자세하게 살펴서 정치한 이론으로 규명하고 정확하게 미래 예측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미 2천년전의 실전된 기록들을 어떻게 다시 찾아내 읽을 수가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천의인가? 인사인가? 음양오행설을 주창한 제나라 웅변가 추연의 저작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실전되어서 현재는 찾아볼 수 없지만 사마천이 사기 추연열전에 소개한 내용만으로도 어느 정도 추측 가능하다.
산해경에서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의 이름을 “조선”과 “天毒國”(천독국)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천독은 글자 뜻 그대로 毒(독) 즉 백신 처방으로 미리 사전에 예방을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지금은 닭백숙의 요리로 주로 쓰이지만 계림의 닭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치료제로써 쓰였다. 우리 선조들은 지네를 잡아 먹는 닭에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막아내는 치료제를 개발해 냈을 것이다. 병을 미리 막거나 치료하는 백신은 한의약에서 어떻게 개발해 내는가? 주된 수단과 방법은 약초를 불로 끌이고 달여내는 탕요법에 있다. 철을 녹여내는 용광로, 미국처럼 모든 사람들을 품어내는 이민 사회의 용광로 그 같은 도가니탕에서 새로움이 창조되는 것이다.
한반도가 왜 천자의 나라가 되었고, 군자의 나라가 되었고, 그토록 지상낙원으로 알려져서 공자까지도 한반도로 뗏목을 타고서라도 이민을 오려고 했을까? 진시황제도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절실히 오고 싶어했을까? 필시 그럴만한 까닭이 없었다면 어찌 사마천이 그런 기록을 남겼을텐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후한서에서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國焉”, 동이족은 천성이 유순하고 교화로써 통하기에 군자가 다스리니 불사의 나라라고 말했다. 不死國(불사국)이란 중국의 황제국 입장에선 죽지 않고 항복하여 산 채로 붙잡힌 노예의 공급처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이국 입장에서 보면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므로 다같이 똑같은 평등한 자유인에 해당한다. 공자가 동이족 한반도로 이주해 살고 싶다고 말했는데, 영원한 자유의 몸으로 사는 곳이 한반도 동이족의 한반도이었다. 식민국가는 자유민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해경에서도 같은 결론을 훨씬 이전에 내렸다. 삼국사기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술했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음이 없고, 부인이 지조가 굳고 믿음이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과 달라서 공자(孔子)가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려고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論曰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나는 부활의 믿음을 갖고 있다. 내가 사사한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석도 비바람에 씻겨져 나가 잊혀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원에서 빛나는 불멸의 불빛이 빛나고 있음을 언제나 믿어 왔는바 나의 믿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육신의 사망과 영적인 부활의 체험을 하는 순간 산 정상 위에서 맨발로 뜀박질하며 달려 내려온 사건처럼, 거대한 진실 앞에 얻은 엄청난 전율적 체험을 이제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문무왕이 7월1일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태어난 날은 7월 2일이니 밤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되겠다. 문무왕의 소천은 681년이었고 따라서 나의 태생과는 1280년의 큰 물리적인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문무왕의 화신을 얘기한다는 것은 허황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로써 저자거리의 웃음을 살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꿈[2]에서 보고 꿈으로 통해서 아침에 샤워장에서 떠오르는 생각으로 사료를 추적하고 책을 찾고 뒤져가면서 문무왕 비문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낸 사실을 비추어 본다면 연구과정에서 일어난 성령의 존재를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꿈의 성질의 하나, “富貴貧賤 成敗興衰似夢 時刻須防不測”. 물론 나의 꿈이라는 것은 깊은 밤 새벽녘까지 탐구하다가 잠깐 잠이 들어서 그런 가사 상태의 신경과민에서 나타난 결과이지 무슨 태몽 같은 현몽을 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말한다면, 문무왕릉의 비석이 682년 이후 쭉 존재해 왔건만 지금껏 어느 누구도 비문에 쓰여있는대로 그 진실을 찾아낸 사람이 없지 않는가? 모두가 진리를 탐구하는데 밤새 도서관 불을 밝히는데, 왜 나에게까지 이런 차례가 오게 되었을까? 왜 쟁쟁한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명멸해왔는데, 부족한 나에게 이런 최초로 밝혀내는 영광된 기회가 주어졌을까? 나는 김유신이 겪었다는 신이한 경험이랄까 어떤 신비스런 체험이랄까 그 같은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었기에 삶과 자연 속의 일어나는 신비스런 신령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느낌을 여지껏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무측천이 쓴 당고종 건릉비 술성기에 나오는 구절 “逍遙而訪道 思窅眇以尋眞”(소요이방도 사묘이심진) 의미대로, 심원하고 정미한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 끝까지 가보는 소요유의 모험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공자의 천하 주유가 그렇듯이 말이다. 내가 문무왕릉비를 해석해낸 것은 춘추와 사마천과 반악과 유신과 당태종과 안평대군과 김정희의 글들을 읽음은 물론 노장과 노반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뉴튼과 갈릴레오 아인슈타인 등 동서고금의 수많은 성인들의 발자취를 추적해서 이루어진 퇴적물이자 결과물이다.
성 어거스틴이 꿈에 나타난대로 펼친 책장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이 천의-하늘의 뜻이라면 나 또한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광대무변의 학문의 바다에서 어떻게 그 책에 들어 있는 구절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읽어 볼 수 있었을까? 인생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표현-숲 속에 난 두갈래 길을 선택하는 여정으로 본다면 어거스틴의 꿈은 천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끝없는 책을 펼쳐야 하는 學海(학해) 속에서,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정면으로 깨는 데에 필요한 다양한 사료와 정확한 문언 해석을 바탕으로 증거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람의 일-人事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책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해낼만한 용기와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또 만유인력의 뉴튼의 사과는 사과나무가 없었으면 떨어질 사과는 당연히 원천적으로 없었다는 측면에서, 위대한 선인들의 지혜의 발자취가 분명히 들어있다는 점에서 인사에 해당한다. 계절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가고 왕조가 교체되는 역사 속에서 분명한 것은 슬픈 죽음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기쁜 발견의 역사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우연적 발견인지 필연적 계시이든 사람의 손에 달려 있기도 하다. 항우가 천하쟁패의 실패를 하늘의 뜻으로 돌리고 자신의 책략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한 점을 사마천은 지적했는데, 사소한 기쁨이나 사소한 슬픔이 아닌 위대한 기쁨이나 커다란 슬픔에는 ‘천의인가 인사인가’의 문제로 보다 깊이 성찰하고 곰곰하고 자세하게 더욱 깊숙이 따져보는 철투적 자세가 필요한 바 아마도 이러한 태도가 인류 역사 발전의 요체일 것이다.
하늘은 언제나 침묵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인류의 두뇌와 마음과 손과 발에 달려 있지 않을까? 슬픈 역사에 대한 천착은, ‘천의인가 인사인가’로 질문하며 후대에게 금경金鏡의 교훈 ‘明鏡之鑒戒’ (당태종 이세민의 “金鏡” 맨 마지막 구절 “易云 書不盡言 言不盡意 今略陳梗概 以示心之所存耳 古語云 勞者必歌其事 朕非故煩翰墨 以見文藻 但學以為已 聊書所懷 想遠見群賢 不以為嗤也.”) 명경감계를 남겨준 유신의 애강남부의 구절 천의인가? 인사인가? 이 표현은 유신의 애강남부 구절, “春秋迭代 必有去故之悲 天意人事 可以淒愴傷心者矣”)을 생각해 보라.
화재 속에 갇힌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서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그 같은 사랑의 마음, 홍수 속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건져내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강물 속으로 내던지는 그런 사랑의 마음은 천의인가? 인심인가? 둘 다 살아나는 경우보다 어느 한 쪽은 희생되는 경우가 더 많이 발견될지 모른다. 그러기에 인간사회의 요점은 화재와 홍수를 미리 예방하는 사전적 조치에 심혈을 기울려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어찌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겠으며,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해도 사람이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어찌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홍경이 말한 구절의 핵심에는 선인들이 살아 생전에 행동으로 옮긴 그 살아 있는 말씀을 복기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간 후에 조작한 기록은 생명력의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처럼 살아 생전에 자신의 믿음을 실천해 내는 것 그것만이 참된 정의이자 진정한 용기인 것이다.
사람의 일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직접 그 마음이 나타난다. 혜강의 성무애락론이 함의하듯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직접 느끼기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세계 만인의 보편적 공통 언어라는 음악도 자기 자신이 직접 느끼지 않는 한 어찌 음악의 효능을 알 수 있을텐가?
“新羅文武王陵之碑”(신라문무왕릉지비) 이 비석은 1795년경 발견되어 홍양호가 그 탁본을 구했고 또 김정희가 1817년 경주 사천왕사 부근에 방치되어 있던 그것을 답사해서 확인해 봤다. 비문의 많은 부분이 마모되거나 소실되었는데 그래도 비문의 일부만이 남아 파편으로 전하고 있어서 비문의 전체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남아 있는 부분들이 있고 또 전세계사적 자취를 찾아내 복원가능하다는 희망을 붙잡을 수 있다. 비록 전체가 아닌 일부 파편이긴 하나 문무왕릉비의 탁본을 뜬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다.
여기서 문무왕릉비의 발견의 역사적 의미를 두고서 흔히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높이는 결정판으로 여겨왔다. 그 이유는 문무왕릉비에 적혀 있는 한 구절 “欽味釋▨葬以積薪▨▨▨▨▨▨▨滅粉骨鯨津嗣王允恭囙心孝友冈” 이 비문 뒷면 제20행의 글자 내용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들한다. 학계의 다수적 해석을 반영한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의 해석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특히 “欽味釋▨葬以積薪▨▨▨▨▨▨▨滅粉骨鯨津” (▨ 표시는 멸실된 글자) 부분의 글자 해석을 “장례를 지낼 때 땔나무를 쌓아 올리고 큰 바다에서 쇄골 의식을 거행했다”로 이해하여 이 구절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적혀 있기 때문에 비문의 이 구절이야말로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판단된다고 주장하여 왔다.[3]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은 지금까지의 학계의 다수적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교과서의 해석과는 정반대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얼마나 부정확하고 또 악의적으로 조작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나의 담대한 주장은 문무왕릉비 비문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확인 가능하다는 것을 재천명한다.
문무왕릉비 비문 원문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해석하면, 삼국사기가 기술한 문무왕조 기사에 들어 있는 문무왕의 유언의 내용이 문무왕릉 비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술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4]
나는 마침내 입증해냈다. 여기서 “마침”은 한글로 쓰면 그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한자로 “磨針”(마침)으로 쓰면 그 뜻을 알 것이다. 큰 철봉 같은 쇠통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서 가느다란 바늘이 만들어진다. “마침정”의 고사성어는 우리나라에서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가르친 어둠 속에서의 떡썰기와 글쓰기 중 누가 더 바른지 내기하자며 자식의 공부를 단련시킨 성어와 같은 의미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루 하루 갈고 닦아서 마침내 최고의 경지 자기만의 독특한 정상에 올라선다는 마침정의 의미로써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내가 극심한 통증에도 진통제를 먹지 않고 아픔을 참아내 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고통이 없이 어찌 정상에 오를 수가 있을까? 고통은 한편으론 침잠하고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는 일시적인 순간 모면에 지나지 않고 또 한번 빠지게 되면 마약처럼 인이 박히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당태종과 유신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힘든 노동자들은 노래를 불러야 고통이 덜해질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서 내가 겪은 고통이야 어려운 세상을 극복해 온 한많은 우리 어머님들의 그것에 어찌 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통의 개인지사는 접어두고, 오로지 공의와 진실추구의 공적 기록을 적어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오욕의 역사 가운데 그 진위를 가려내고 진실을 복원하여 전달한다.
문무왕의 유해는 바다에 뿌려졌다거나 수중릉이 있다는 그런 지금까지의 호사가들에서 의해서 잘못 알려진 견해들을 나는 온전히 반박해 내고, 문무왕릉의 존재가 문무왕릉 비문 자체에서 발견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내서, 그동안 굴절되고 왜곡되어온 오욕의 한국사를 바로잡고, 역사적 아픔과 상처를 깨끗이 치유하고, 그결과 불멸의 민족 정신과 통일 정신을 드높여 민족중흥의 새역사가 쓰여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하고 간절히 기대하고 열열히 소망한 까닭으로 이 책을 상재한다.
[1] Epiphany- a moment of sudden and great revelation or realization 개념, 마태복음 2장 중,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2] 꿈의 성질의 하나, “富貴貧賤 成敗興衰似夢 時刻須防不測”.
[3] 이한상, 『영원을 꿈꾼 천년왕국 신라』
[4] 고려 인종의 명령에 따라 김부식이 1145년에 완성했다고 여겨지고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술한 정사체의 역사서로서의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인정받고 있는데, 만약 삼국사기의 내용에 가장 큰 흠결이 발견된다면 지금까지의 역사 교과서 내용과 그에 대한 이해는 원천적으로 그리고 혁명적인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성 시기 (1145년경)와 문무왕릉비의 건립 시기(682년) 차이는 약 460여년이다. 김부식은 문무왕릉비를 참조했음이 분명한데, 왜 비문의 내용과는 정반대로 역사를 날조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김부식 정권이 1135년에 일어난 묘청의 난을 거의 1년만에 진압한 직후 도교세력의 부활을 저지하고 또 금나라의 침략에 굴복하고 타협하여 정권을 연장하려한 정치적인 목적과 당시의 동북아 정세를 둘러싼 시대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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