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과 성경-개인적 의미
외람되게도 "요즈음 저는 표현력은 크게 모자라지만 예로부터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총망라하여 그 중 간략하게 고증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 정리하여, 사람의 성공과 실패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법칙을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우주만물의 법칙과 사람의 운명에 있어서의 그 관계를 연구하고, 동서고금의 변화의 역사를 살펴서, 최고의 권위가 있는 책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1]
“역사란 위인전에 불과하다”는 카알라일의 견해가 있는데, 이는 유신의 “애강남부”에서의 “사생계활 영광규연”이라는 결론이 그것을 미리 시사해 주었다.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우주천체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우주만물이 움직이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삶은 하늘이 돌고 도는 것같이 돌고 도는 것, 따라서 칼뱅의 구원예정설, 영국의 경험주의 필연주의의 사고체계처럼 우리 삶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신은 말했다: “天道回旋 生民預焉 … 死生契闊 … 靈光巍然!”
밤하늘의 별자리가 돌고 돌듯이 우리들의 삶 또한 예정되어 있고 돌고 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비행기가 선회하듯이. 삶과 죽음이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안개속을 헤매일 때처럼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하늘에는 신비한 광채가 빛나고 선조들이 남긴 덕택으로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또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위대한 성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과나무와 지혜의 열매
사과 그림 하나로 유럽의 화단을 놀랍게 변화시킨 세잔느, 사과나무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튼, 빌헬름텔의 화살로 사과 맞추기 게임,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 인류의 발전을 이룬 인간본성의 영광(靈光)이다. 그래서 영광은 영원히 빛난다. 靈光巋然! 무덤이 우뚝 선 모양을 띠고 있는데 그러하기에 영원하게 남아 있다. 뉴튼의 선언처럼, 거인의 어깨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시걸의 갈매기는 그렇게 높은 하늘을 난다. 비록 우리 부모님 세대가 세상의 부귀영화와 절연되었을지는 모르나 우리 후손들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은 영광靈光을 보듯 분명하다. 인간의 세대를 넘어 전하는 인간 정신의 오묘함은 그 영원의 불빛은 언제까지나 간직되고 끝까지 살아 남으리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그것이다. 나의 작업은 비록 몸은 망가졌지만 끝내 살아남아 부모의 유언을 따라 인류의 위대한 정신의 힘을 남겨준 사마천, 영광외연(靈光巍然)을 증거한 유신을 통해 인류의 영원불멸성을 다시 강조하는 것, 그 복원의 작업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국가의 흥망성쇠에 관한 법칙에 대해서 사마천이 이미 이천년 전에 잘 고찰해 두었고, 따라서 나는 사마천 이후 2천년의 시간적 간격을 메우고, 은상과 한무제와 사마천과 상구성과 반악과 유신과 당태종과 문무왕과 양나라와 신라와 첨성대의 관계를 규명해 내는 연구를 통해서, 가설과 그에 따른 입증을 세우는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사마천을 한국사 속에서 재발견하는 큰 작업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창자가 뒤틀린 적이 하루에 아홉 번도 넘고 근심스런 마음이 하루에도 수백번 일어나, 집에 홀로 있으면 정신이 몽롱하여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았으며, 집밖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당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려내려 베옷적삼을 흥건히 적시고 맙니다.”[2] [3]
새로운 창의적인 작품은 미칠 지경에 이르러야 나온다는 견해가 있다. 창작의 고통은 니이체의 삶과 그의 고백록에 잘 나와 있기도 한데, 고대 그리스의 관점을 찾아가 보면, 창조적 작업에는 마음이 미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소스가 두 가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하나는 신적 개입이요, 다른 하나는 악마의 개입으로 나타난다고 구분했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첫 추수감사절의 예배를 올린 것은 신적인 개입과 악마적인 개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종교적 박해가 없었다면 미국의 역사가 쓰여질 수 없었을 것임으로 악마의 쓰임새가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80대 20법칙의 사회이고 또 10퍼센트 나쁜 사과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새 삶은 도전이라기보다 응전에 달려 있다. 새로움을 발견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앙드레 지드가 말하길 새로운 땅은 긴 항해 끝에 보인다고 했다. 멀고 먼 항해의 여정을 경험하지 않고서 어찌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을까? 칠흙같은 야밤을 건너는 공포와 두려움을 통과하지 않고서 어찌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발견의 문제를 제기하는 나의 연구의 결과물 이 책이 문학서라면 내 평생 위고와 세익스피어와 멜빌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본 내게 시라노의 눈물과 크리스탱의 피가 베어 나오는 지를 물을 것이고, 역사서라면 토인비와 베버의 어깨 너머로 바다와 산과 강을 쳐다본 내게 몽테뉴와 파스칼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며, 만약 법률서라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사모한 내게 번역이란 텍스트 언어 사람 사이의 연결불능의 간극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말한 카도조의 법과 문학 이론을 전할 것이며, 정치사회학이라면 뒤르켐과 베버의 사회적 사실을 통해 종교와 문화의 심층을 아울려 보게 만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대의 고난을 짊어지고 생사를 결정한 사람, 폐부에 간직한 진실의 말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남긴 반악과 유신과 사마천과 양운의 글을 만분지일만큼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내일 죽는다고 해서 내게 무슨 여한이 남아 있을 수 있을텐가?
[1] 사마천, 보임소경서, “近自託於無能之辭 網羅天下放失舊聞 略考其行事 綜其終始 稽其成敗興壞之紀”.
[2] 사마천, 보임소경서, “是以腸一日而九迴 居則忽忽若有所亡 出則不知其所往 每念斯恥 汗未嘗不發背沾衣也”.
[3] 사마천과 양운과 반악과 유신과 당태종과 문무왕과 추근과 황현과 죽음, 사기 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고찰한 것은 물론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 헨리 맥켄지의 소설 “The Man of Feeling”, 멜빌의 소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푸코의 감옥의 역사와 생체권력, 엘리 위젤의 증언 등 특히 죽음에 관한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이제는 마치 죽음의 전문가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언과 신탁 업무를 주로 맡는 형평법 법원의 법관이나 변호사는 죽은 사람의 일을 다루는 일 즉 ‘죽음의 전문가’에 해당할 지 모른다. 나 또한 모멘토 모리 Memento mori의 뜻을 새겼다. 뒤돌아 보아라! 당신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라! Look behind you! Remember that you are but a man! 따라서 만약 나의 연구 결과물에 있어서 어떤 거짓이 결부되었거나 또는 결정적으로 큰 오류가 있어서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그것은 나의 부모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어서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으로 어찌 사마천과 반악과 유신과 문무왕의 혼을 대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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