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왜 여지껏 큰 성과와 발견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유명 대학도서관 그리고 전자도서관 검색 등의 방법을 통해서 관련 연구서들을 섭렵하고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저자가 찾고 싶었던 연구 결과 내용에 가까운 자료는 찾질 못했다. 그리하여 황야를 걸으며 혼자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또 나의 생각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글들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일이 자구 하나 하나 해석을 스스로 확인해 나갔고 또 다른 사람들이나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였다. 대신 나의 글을 완성한 후, 세상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1] [2] [3]에서의 태도를 견지하며, 평가받을 것을 스스로 약속했다. 이러한 나의 자세는 상앙의 상군서에서 스스로 배웠고, 상군서의 구절을 각주로 인용한다.[4]
새로운 발견은 외부적 시각에서 전혀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한 성취해내기 쉽지 않다는 와호장룡의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어떤 직관적이거나 계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직관력을 가지기 힘든 이유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적 태도에 있다. 만약 나의 연구 결과 가운데 직관이나 계시적인 생각이 통했다면 그것은 한국과 여러 외국의 문물과 사고를 직접 겪어 보고 스스로 통찰한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과정에서 어떤 내적 가슴 속에서 나오는 영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내가 우주천체의 근원적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성적 능력으로써가 아니었다. 지성은 발견의 과정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적 가슴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무언가에 있는데-그것을 직관 또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결책이다.”[5]
우주 질서의 법칙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거기에 이미 존재한 진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삶을 발전시켜 왔다. 우주는 ‘빅뱅’하고 원자 분자 운동처럼 잠시도 쉬지 않지만, 뉴튼 아인슈타인 등 위인들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천체를 관측한 뒤 그가 발견한 진리를 담은 책 제목을 “별의 메신저”라고 붙인 것은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천체 관측과 원자 운동(DNA 나선구조)의 발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외양과 실체는 다를 수 있다. 사람의 논리와 감성과 이성에 의한 ‘해석 작업’(interpretive process)이 없다면 진리는 발견되기 힘들다.
권위에 짓눌려 완전성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니이체의 지적을 참고로 적어둔다.
[1] THE MORAL OBLIGATION TO SPEAK THE TRUTH
“Some one will say: Yes, Socrates, but cannot you hold your tongue, and then you may go into a foreign city, and no one will interfere with you? Now I have great difficulty in making you understand my answer to this. For if I tell you that to do as you say would be a disobedience to the God, and therefore that I cannot hold my tongue, you will not believe that I am serious; and if I say again that daily to discourse about virtue, and of those other things about which you hear me examining myself and others, is the greatest good of man, and that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you are still less likely to believe me. Yet I say what is true, although a thing of which it is hard for me to persuade you.”
[2]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이 침묵하고 외국으로 나간다면 아무도 당신을 말리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여러분을 납득시키기에 큰 어려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말하는 식으로 내가 말한다면, 나는 하나님에게 불복종하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나는 내 입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심각하게 말한대도 당신은 날 믿으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만약 사람의 도덕성이란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아름다움에 부합하는 영혼의 활동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 최상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담론과 또 이 법정에서 행해진 나에 대한 심문과 다른 증인들의 심문에 대해서, 물론 여기 이 법정에서 나와서 증언하지 않는 사람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매일 다시 토론한다고 해도 당신들은 그래도 나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합니다. 비록 이것은 내가 당신들을 설득시키기가 어려울지라도 말입니다.” 이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을 인용한 나의 번역에 대해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인구에 회자되는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철학적 탐구의 자세를 말한 그런 번역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즉 법정 용어로 번역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생의 마지막에 직면했을 때는 오로지 영혼 즉 양심만이 남는다.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도덕적 의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양심이고 영혼이다.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은 법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영혼의 울림으로써 말한 것이다. 사마천이 죽음으로써 거짓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 임소경에 대한 편지의 내용과 같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없어지지만 그 영혼은 살아 있다. 소크라테스, 사마천, 그것은 문무왕의 유언과 같다. 영혼의 울림 말이다. 나는 문무왕의 유언에 대해서 진실을 캐냈다. 나의 진실은 나의 죽음과도 같이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의 법정에 서지 않으려고 지구 끝까지 도망을 치면서까지 반대심문을 받을 기회를 꺼려했다. 하지만 결코 운명의 끈은 피할 수 없다. 내가 죽음의 사선을 넘고 눈사태 속에서도 살아 돌아온 감사함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의 말을 믿어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대하지 않을 것이고, 또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달리 대할 이유가 없다. 나의 말을 믿어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믿어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고 또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해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감사함을 가지고 있고 또 내가 죽는 날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은 하지 않겠는가?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음으로. 당신은 살기 위해.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The hour of departure has arrived, and we go our separate ways, I to die, and you to live. Which of these two is better only God knows).
[3] 880여년 전, 740여년 전 기재되어 그토록 오랫동안 국사의 위치로 점해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재 내용을 정면 반박하고, 또 문무왕릉비 파편이 발견된 이후 220여년이 지나는 동안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축적한 기존의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해 정면 반박하고, 또 1,340여년 전의 오래된 고문자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그동안 국가와 학계가 정해놓은 기존의 국사 지식을 정면으로 격파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고 그만큼 어려운 일에 속하지 않겠는가? 이런 전차로 나는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진술을 준비했다. 사실 내가 법과대학에 입학하고서 맨 처음 읽은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에 집착한 이유가 무언가 있었지 않을까?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표현한대로 우리 인생에서 앞서간 성현들의 위치가 이토록 남다를 수 있다는 것인지? 유신은 말했다. “天道回旋 生民預焉 死生契闊 靈光巍然!” 밤하늘의 별자리가 돌고 돌듯이 우리들의 삶 또한 예정되어 있고 돌고 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잠자리 비행기가 빙빙 맴돌듯이, 바다의 배가 선회하듯이. 삶과 죽음이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안개속을 헤메일 때처럼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하늘에는 신비한 광채가 빛나고 선조들이 남긴 덕택으로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위대한 성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큼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과 그림 하나로 유럽의 화단을 놀랍게 변화시킨 세잔느, 사과나무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튼, 빌헬름텔의 화살로 사과 맞추기 게임,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 인류의 발전을 이룬 인간본성의 영광(靈光)이다. 그래서 영광은 영원히 빛난다. 靈光巋然(영광규연)!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이 바다처럼 넓고 크게 빛나라! 이러한 뜻의 이름이 내 이름 “홍희”!
[4] “상군서”의 영어 번역은 J.J.L. Duyvendak, “The Book of Lord Shang” (1928), 'He who is concerned about the highest virtue is not in harmony with popular ideas; he who accomplishes a great work, does not take counsel with the multitude.'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거사에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사람은 어떠한 공훈도 얻지 못한다. 새로운 법을 신속하게 제정하는 결단을 내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판 여론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할 수 있고, 독자적인 지식체계로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우둔한 사람은 일을 끝내놓고도 그것에 대한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싹이 트기도 전에 그 사유를 먼저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세상 사람들과 의논을 나누기 보다 일을 먼저 성취해 놓고 그 기쁨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보다 낫다. 개혁정책에 성공한 곽언은 말했다: 최고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대단한 사람은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商., “商君書”, 更法편. “臣聞之 疑行無成 疑事無功 君.定變法之慮 殆無顧天下之議之也 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負於世 有獨知之慮者 必見.於民 語曰 愚者闇於成事 知者見於未萌民不可與慮始 而可與樂成 郭偃之法曰 論至德者 不和於俗 成大功者 不謀於衆”.
[5] “I did not arrive at my understanding of the fundamental laws of the universe through my rational mind. The intellect has little to do on the road to discovery. There comes a leap in consciousness, call it intuition or what you will, and the solution come to you.”
'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0) | 2025.04.14 |
---|---|
敎(교)의 의미 (0) | 2025.04.14 |
참고 문헌 (0) | 2025.04.14 |
나는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가 (4) | 2025.04.11 |
어떻게 임무를 달성해 낼 것인가 (0) | 202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