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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敎(교)의 의미

by 문무대왕 2025. 4. 14.

4. ()의 의미

인간 사회의 부족과 잘못은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런데 왜 여지껏 그토록 신음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가? 한쪽에서는 많아서 넘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부족해서 굶어 죽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즉 문제해결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공정한 기회 마저 박탈당하고 상실된 사회로 변해 버렸지 않는가? 교육은 받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양자의 존재가 필수이기에 교육에는 큰 돈이 들어간다. 교육은 도로 건설처럼 돈과 시간이 크게 들어가는 국가의 기간 인프라이고 돈과 시간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를 갖질 못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내려고 하면 우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여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세상사람들에게 알릴만한 능력과 용기를 가진 선지자들은 성경시대에나 존재했던 과거지사로 보일 뿐이다. 지금 세상에서 먼저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찾아 보기란 가물에 콩 나듯이 거의 전멸되었거나 화석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예 잊혀진 것은 아닌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아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말할 수조차 없는 자기 존재 또는 사회 존재 의미에 대한 무관심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고통과 아픔이 극에 달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서서 포효처럼 소리 높여 외칠 뿐, 그 메아리는 어디에도 반향을 찾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천애의 낭떠러지에서 외쳐본들 메아리는 계곡 속에 함몰되고 만다. 사람들은 고대광실만 찾을 뿐 계곡의 정신을 잊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귀 기울려 주고 관심을 갖겠는가? 지금 세상은 돈과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철저한 헤게모니 구조가 작동된다. 따라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낙오되고 배제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죽음의 진리 그리고 산모의 고통 같은 것인데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오직 당사자만이 겪는 경험이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가 없다. 설령 당사자라고 해도 그 아픔의 강도를 감정적 표현의 언어 수단적 제약성 때문에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명확하게 재현해 낸다고 해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뿐 사람들은 지식과 교육에 접근할만한 금전적 여유마저 없어 무지, 가난, 차별의 사회적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만족하든 아니하든 생각을 깊이 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마저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어서 교육을 통해 실수를 제거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린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 맴도는 순환론적인 한계에 빠지게 되고, 결국 해보니 별 수없다는 체념 상태인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에 이르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의 보통 사람들의 본 모습은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판단을 내리는 데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것도 그런 실수와 잘못을반복적으로행하게 된다. 행태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Real people make mistakes systematically.” 하지만 사람들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또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다. 여기에 미래의 희망이 놓여 있다. 실수는 실수를 낳게 되는 원인을 찾아내면 그것을 교정시켜내는 교육을 통해서 시정하고 예방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보와 발전이 기대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제한성과 가능성의 조건을 발견하는 것은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의 성격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과 통한다. 인간 사회의 살아 있는 역동성과 그 힘을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은 유한하고 미약한 갈대이지만 반면 생각의 무한한 가능성의 힘 바로 이 제한성과 가능성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희망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인간 사회는 혼자서 살아 갈 수 없고, 또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의 창출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공감은 자기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진실로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진 앵무새같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속박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할 때 소통이 이뤄질 수 있고 또 이것이 인간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조건일 것이다. 이 점을 나의 느낌으로 말해보자. 셰익스피어의 지혜를 따라서 본다면,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느낀 그대로를 말해야 한다. 파스칼의 다락방에서 하늘의 별을 보고, 몽테뉴의 정원에서 꽃을 가꾸듯이 순수의 생각을 자신의 가슴, 마음, 감정, 영혼 속에서 느낀 바 그대로를 말하자. 문무왕릉비 비문에서 이러한 공감의 미학과 공감의 역사 그리고 위대한 언어의 마술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까치밥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1]

 



[1] 송수권, “까치밥시 가운데 인용. 송수권의 깊은 정서적 이해와는 완전 딴판으로 삼국유사는 “射琴匣(사금갑) 기사를 통해서 민족 고유의 명절과 민속인 정월대보름달 불꽃놀이와 까치밥의 의미에 대한 깊은 정서적 이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왜곡하였다. 삼원절은 후손들이 목욕 재계하고 조상을 기리는 忌日(기일)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런 신성한 기일날 궁중에서 남녀가 정을 통하는 불륜극을 삽입하여 우리 선한 민족성과 사회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저자의첨성대 연구책에서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