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설명
“인정의 정치학”과 “분배의 정치학”
“인정의 정치학 politics of recognition”은 개인의 “정체성 identity”을 확립하는 개념(찰스 테일러 Taylor가 말한 “인간의 정체성은 주체와 객체 양자 간에 대화적으로 진행되는 상호 인정의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므로 개인이 속한 집단 간의 고유한 정체성의 “차이 difference”를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는 “정체성의 정치학 politics of identity”이라고도 부른다. 다양한 “소수 minority 집단”의 정체성과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추구하기에 “문화적 신분의 위계 구조 cultural status hierarchy”에 내재된 “문화적 불평등 cultural injustice”을 해소하고 “동등한 존엄성 equal dignity”을 추구하는 것이 “인정의 정치학”의 목표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호네트가 여기에 속한다.
“분배 투쟁 politics of redistribution”은 “사회•경제적 위계 구조 socio-economic hierarchy”에서 야기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를 대변하는 프레이저는 “인정 투쟁”을 강조하다 보면 복지 국가(경제 민주화)같은 분배 정의에 대한 요구를 상대적으로 간과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고 인정의 정치학을 비판한다. 프레이저의 견해에 따르면 현재 문제의 핵심은 구조화된 경제적 불평등에서 기인하는데 소수자 개인의 정체성 투쟁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법적인 측면에서 평등 사회와 복지 국가를 실현한 미국과 독일의 경우와는 (호네트는 독일의 사회학자, 프레이저는 미국의 정치학자) 다르게,[1] 우리나라는 아직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사회임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은 최소한 정치제도와 법적으로는 평등 사회와 정의 사회를 실현시킨 상황이기 때문에 성소수자, 이민자, 극단주의자 등의 “소수자의 인정 투쟁”이 분배 문제를 크게 왜곡시키지 않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분배문제가 핵심인 복지국가를 아직 완성해내지 못하고 있고 또 법과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불평등 사회로 여전히 머물고 있는 과정적 단계에서 소수자의 인정 투쟁 문제를 우선시하게 되면 구조적인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 내기가 벅차다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분배와 인정 모두를 요구하고 있는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단순한 이원론으로는 대립과 간극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뚜렷한 대안적 시각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나라에는 특수한 문제점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탈북자” 문제가 있는데 이건 “소수자”의 문제이긴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 사회처럼 단순한 “소수 이민자”의 문제로써 바라볼 수 없다. 한국에서 탈북자 문제는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선진국에서의 소수자 문제(다문화주의) 또는 이민자의 문제와는 분명히 다른 측면이 존재하고 또 선진국(서독과 동독이 통일된 지가 이미 25년이 되었다)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해결이 된 “이념 문제”가 크게 달려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소수 탈북자’의 문제는 탈북자의 남한내에서의 삶의 투쟁을 어떻게 해결해 낼 수 있을까의 단순한 ‘인정’ 또는 ‘분배’의 정치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더 큰 틀의 ‘통일’이라는 정치 경제학적 문제가 개입된다. 이런 측면에서 ‘인정의 정치학’의 궁극적 목표인 ‘선한 경쟁 (good competition)’의 구도로는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해결해내기 어렵다고 보여 ‘인정 투쟁’의 이론적 취약점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이념 경쟁은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역사의 종언”이 된 지(1989년)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독일의 경우와는 다르게 남한과 북한의 두 다른 이질적 체제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1] “인정 투쟁 politics of recognition”을 주장하는 호네트 Honneth와 이에 대해 “분배 투쟁 politics of redistribution”을 주장하는 프레이저 Fraser 사이의 논쟁 (Fraser and Honneth, Redistribution or Recognition? A Political-Philosophical Exchange, London: Verso, 2003. 한국번역판은 “분배냐 인정이냐?”(프레이저 & 호네트 지음, 김원식•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4년)을 참고하라.
'필경사 바틀비 주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는 왜 필요한가? (0) | 2025.05.08 |
---|---|
빌 게이츠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모습에 암시된 의미 (1) | 2025.05.08 |
바르트의 ‘의미 작용’ (1) | 2025.05.08 |
시뮬라크르 (1) | 2025.05.08 |
“putting my hand in my pocket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의 의미 (3) | 2025.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