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개념과 자선 단체 트러스트 구조
‘시뮬라크르’는 시늉, 흉내, 모방, 재현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이미지나 유사한 것, 모호한 재현이나 닮은 것, 단순한 속임수나 가짜”를 말한다. 신문, 방송, 영화, 인터넷을 통해 보이는 세계는 가상으로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이지만 인간 사회의 삶에 매우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 기호, 코드가 실재 대상을 삼켜버린다”고 말했다.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서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다. 기호와 이미지를 통해 광고, 뉴스, 영상, 상품 이런 것들을 생산해 내는 네트워크 또는 가상현실의 모습을 말해 주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대상은 소멸되어 버린다. 곧이어 사라진 지시대상들이 기호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됨에 의해서 시뮬리시옹은 더욱 강화된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의 4단계 즉 재현, 변형, 은폐, 대체의 단계 가운데 대체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뮬라시옹은 더 이상 이미지나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어떤 실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지시하는 대상 또는 실체로부터 독립한 채, 그 자체가 스스로 자립적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1]
빌 게이츠의 자선 단체 트러스트 구조
빌 게이츠의 자선 단체 트러스트의 경우를 보자.[2] 자선 단체 트러스트가 설립될 때는 빌 게이츠가 구체적 지시 대상이 되지만 설립되고 나면 빌 게이츠로부터 독립되어 트러스트 그 자체가 스스로 자립적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 빌 게이츠가 죽고 나서 그의 흔적이 사라져 버리더라도 오히려 빌 게이츠를 완벽하게 닮은 (시뮬라크르) 단체가 빌 게이츠가 꿈꾼 그대로를 재현(원본 실재), 변형(실재 흔적 찾기 어려움), 은폐(실재를 은폐), 대체(실재의 부재)해 나가는 것이다. 트러스트 재산은 빌 게이츠의 원본 재산을 모태로 출발하고 목적에 맞는 여러 활동을 벌이는데 이는 게이츠의 개입없이 일어나는 변형 또는 은폐에 해당하고 그가 죽고 나면 트러스트가 그를 대체한다. 현실의 개인 인물로서 빌 게이츠가 시뮬라크르의 공간에서 여러 얼굴을 가지며 활동을 하게 된다. 트러스트는 빌 게이츠 원본을 재현하고 변형시키고 은폐시킨 시뮬라크르다. 그리고 그를 뛰어 넘어 스스로 원본으로 대체된 시뮬라크르다. 이들은 빌 게이츠 실재보다 더욱 실재적이다. 빌 게이츠가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 회사 또한 트러스트 구조에 의해서 움직인다. 월 스트리트에서는 모든 행동들이 원본, 모방, 재현, 변형, 은폐, 대체로 나타난다. 광산 철도 주택 등 기초자산에서 생겨난 증권 시장의 구조 그리고 이들을 기초로 하여 생겨난 파생상품 시장이 증권 시장보다 거래 규모가 더 커진 월 스트리트 금융 시장을 보라.[3]원래 모델을 뛰어넘는 역동성의 구조가 월 스트리트를 받치고 있다. 금융 파생 상품이 그러하듯이, 월 스트리트는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것이다. 빌 게이츠는 창조적이고 실재적인 비즈니스와 부의 화신이고 월 스트리트의 아이콘, 신화, 상징, 환타지가 된다.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아니면서 더 실재같은 ‘하이퍼-리얼리티’가 지배하는 세계의 한 예로써 ‘디즈니랜드(Disneyland)’를 들었는데, 실제의 미국은 디즈니랜드처럼 유치하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시뮬라크르임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시뮬라크르인 디즈니랜드로써 가림막을 친다는 것이다. 월트 디즈니는 원본의 쥐를 미키마우스라는 시뮬라크르를 변형 생산해 냈고 이러한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서 실재로 쥐를 바라보게 만들었는데 따라서 이제는 쥐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구별 불가능하게 은폐 대체되어 버렸다. 월 스트리트 또한 그것의 원본들인 카네기, 게이츠를 변형하고, 만들어내고, 이런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 월 스트리트를 바라보게 하는데 이제 월 스트리트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게이츠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구별 불가능할 정도로 은폐되고 대체되어 버린 것이다.
변화 발전의 조건-다양성의 차이와 자기 동일성의 유지
주식, 채권, 주택담보대출증권, 파생 상품이 만들어지고 거래되는 월 스트리트 시장 구조를 보자. 진화론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발생한 ‘차이’를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상품들을 설계하고 구조적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누구인가? 종교기관, 교육기관, 회사 법인, 국가기관 등의 트러스트 구조에서 끊임없는 세대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 또한 유전자처럼 자신을 불변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인데 그 역할을 변호사들이 담당하고 있다.
진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변화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존재하는 ‘변이 조건’과 변화 발생한 이후에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 조건’ 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진화의 조건은 변화가 일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여기에서 그것이 후세에게 유전되지 못하면 변화의 원동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는 바로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불변적인 자기 복제의 능력이 생명체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이 변하지 않는 자기복제의 능력과 또 변형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진화론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일견 보일 수 있지만 1차적인 성격과 2차적인 성격을 이해하면 이러한 모순이 해결된다. 생명체의 1차적인 본질은 불변적인 자기복제의 능력을 갖고 있고, 진화를 가져오는 변화란 생명체의 내적 본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복제능력을 가진 생명체의 내적 본성을 방해하고자 하는 원인이 외부로부터 침입하여 교란시켜서 발생한다고 진화론은 가정한다.
영미법이 프랑스나 독일의 대륙법보다 우월하다는 것 그리고 영미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원인은 바로 사회의 유전자가 다르다는 것에서 나온다. 영미국의 핵심 유전자는 영미법인데 사회 생명체의 자기동일성을 계속 지켜가려는 사회의 자기 복제 능력-이 1차적 원칙을 변호사들이 담당하고 있다. 여기의 변이조건과 유전조건이란 말을 ‘다원성’과‘통일성’으로 (들뢰즈의 개념으로 대체한다면 ‘차이’와 ‘반복’에 가깝다) 대체하면 보다 쉽게 수긍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통일성’을 유지해 나가는 유전자의 핵심 기능을 변호사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것과 영미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그들의 힘이 느껴질 것이다.[4]
빌 게이츠의 의사 소통-외연과 내포
빌 게이츠가 왼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악수하는 모습의 사진에 담긴 암시된 의미가 담겨 있다면 그것은 그가 월 스트리트 최고 재산가로서 돈을 투자할 여력이 있고 또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최고의 자선가로서 빈곤을 퇴치하고 인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한 자선 사업을 통해서 많은 돈을 유용하고 현명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5] 빌 게이츠는 사물을 대체한 기호와 이미지와 코드로 정보를 유발하고 전달하고 있다.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이라는 공식을 상기하라.
한편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리되어 있는 곳에 상호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쌍방형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네트워크스마트폰에서도 대중매체에 의한 의사소통은 일방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언론사들의 인터넷 소통은 댓글까지 포함하여 거의 통제 관리되고 있는 형편이고 또 언론매체의 일방적인 의사소통 구조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고, SNS 의사소통 또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해 내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대로, 대중매체 형식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비의사소통의 형식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이 같은 기사를 취급하고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과잉 정보를 배설하고 있지만 상호적인 의사소통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SNS으로 서로 개방된 의사소통을 하고, 상호성에 따라 서로 교환하는 대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서로 직접 접촉하지 않고 다만 기계에다 대화하고 있음으로 그것은 기계적인 가상적 의사 소통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으로 전달되는 빌 게이츠의 메시지는 수신자하고 교환의 양가성이 배제되어 있는 의사소통 구조에 놓여 있다. 기계는 거대한 대체 체계이다. 의사소통은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고 네트워크 망속에서는 누가 주체인지를 확인할 방법마저 쉽게 찾아내기 어렵다.
일본의 혼네와 다테마에 개념, 우리말의 보이지 않는 속내와 겉으로 보이는 겉보기 개념은 잘 알려져 있다.[6] 달마대사가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르킬 때 손가락을 보는가? 아니면 달을 보는가?[7]
우리는 빌 게이츠에게 “당신이 노리는 의도가 뭐요?”-이렇게 당돌한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이미지, 기호, 코드가 실재 대상을 삼켜버린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있고 교환의 양가성이 배제되어 있는 의사소통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속을 떠보려고 한마디 넌지시 던질 수 있는 대화의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더욱이 교양인이라면 그런 당돌한 질문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문화인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건 형사범에게 질문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말하듯이, 안광이 지배를 철할 정도로 지식을 갈고 닦으면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던가? 그리고 들뢰즈의 말로 답한다면, “어떤 제스처, 어떤 억양, 어떤 인사의 몸짓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깨닫지 못한다면 누가 진리를 찾으려 하겠는가?”
[1] 보드리야르(Baudrillard),“시뮬라시옹”. ① the orders of simulacra ② the phases of the image ③ the three phases of utopian and science-fiction 개념을 참조하라.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개념을 학문적인 분석틀로써 사용하는 들뢰즈, 보드리야르, 푸코 등은 프랑스 사람인데 이들이 영미법상의 트러스트 구조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은지(또는 트러스트 법제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조사해 보지 않았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영미법상의 트러스트 법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트러스트 법제가 도입된 시기는 가장 최근인 2000년대 들어와서였다.
[2] 빌 게이츠 자선 단체 트러스트 홈페이지, http://www.gatesfoundation.org/.
[3]“Understanding Derivatives: Markets and Infrastructure”, https://www.chicagofed.org/publications/understanding-derivatives/index.
[4] Deleuze G., “Difference and Repetition” (1968).
[5] 게이츠의 ‘관심과 열정’에 의해 운영되는 게이츠 자선 트러스트의 주요 목적은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 빈곤 퇴치, 교육 기회 확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의 확대이다.
[6] 일본어 “바카 쇼지키(馬鹿正直)”는 사슴을 말이라고 말하는 것에 숨어 있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stupidly honest”, “바보스런 솔직함”, “우직스런”을 뜻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다테마에(建前)는 외양 겉보기 겉치레 pretense, 혼네(本音)는 마음 속의 진실한 감정과 진실한 의도(true intentions)를 말한다.
[7] 문자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과 같다. 교종이 교리를 터득하면 불도를 완성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선종은 ‘불립문자’로써 수행과 계율을 중요시한다. “見月忘指”, "計著名字者 (이름과 글자가 나타내는 것에 집착하면) 不見我眞實 (나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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