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르트의 ‘의미 작용’, 기표 signifier, 기의 signified
바르트의 ‘의미 작용’, 기표 signifier, 기의 signified
전달 메시지는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커뮤니케이션은 최소한 송신자와 수신자의 두 사람의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상대방에게 도달해야 메시지가 의미가 있는 것이며 또 상대방에게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어야 최소한의 행동이 유발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의미작용은 기호를 만들 때와 그 기호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해석할 때 나타나는 작업이다.
봉수대에 불을 피워 하얀 연기를 지퍼 오르게 하는 것을 보자. 봉수대 불은 기표이고, 그것을 전달받는 사람들에게 적이 쳐들어온다든가 또는 어떤 위급한 상황이 일아 났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의미작용이다. 여기서 기표는 봉수대 불과 연기이고 기의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행동을 말한다. 봉수대 연기라는 기표와 위기 대처의 긴급 사태 발생에 대한 행동 요령이라는 기의와 결합하여 봉수대 신호의 기호를 만들어낸다. 봉수대 연기는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개별적 사건(표지)이고, 긴급사태 행동 요령은 추상적 관념이다. 사랑의 전도사 셰익스피어에게 장미는 사랑의 열정을 나타내는 기표이고, 기의는 사랑과 열정이다. 기표와 기의를 결합하는 작용을 ‘의미 작용’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signification’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모든 신호에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행동을 유발시킬 만한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하찮은 일에는 별무반응을 보인다.
사진이 발명된 때는 1840년경인데, 사진이 나타나가 전에까지의 신호체계는 장미와 봉수대처럼 사람의 오감으로 구체적으로 인지되는 직접적인 경험이었지만 사진과 방송이라는 언론 매체가 등장하면서 중간 매개자의 메시지 전달 기능이 중요해졌다. (조선시대 ‘장계’같이 문서수발을 담당하는 중간 전달자가 개입하였지만 이들은 단순한 문서 전달자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9.11 테러 사건 때 뉴욕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장면은 영상 화면과 사진 전송으로 즉시 전달되었고 이러한 화면 정보는 어떤 별도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였고, 언어를 통한 구체적인 묘사를 불필요할 정도로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사진이 모든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였을까? 2001년 911 사태가 일어난 순간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전쟁이 일어날 줄 상상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의미를 재생산해는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을 확신하고서 장미꽃을 바친 사람들이 항상 연애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수신자가 꽃을 전달한 사람의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의미 작용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연애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은 사랑을 고백하는 의미를 가졌다는 기호체계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장미꽃을 갖다 바치면서 무릎을 끓고 사랑을 고백하는 청각적 의미와 시각적 의미가 함께 일어난 경우라면 아마 실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의미작용은 시각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Denotation 디노테이션과 Connotation 코노테이션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서 어떻게 정보를 받아들이고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일까?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의미를 ‘Denotation 디노테이션’(외연적 의미)이라고 말하고, 그 속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Connotation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이라고 한다. 건물에 불이 난 모습의 사진은 단일한 메시지를 가질 수 있지만, 한편으론 9.11 테러 사건의 경우와 같이 특정한 장소와 정치적 문화 종교적 제 요소를 감안하게 되면 의미 작용은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고 확산될 수 있다. 사진의 의미작용에 관하여 바르트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스투디움 studium’은 문화적 개념으로써 누구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으로 예컨대 고층빌딩에서 큰 화재가 나면 사상자가 발생하고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나타날 것이라는 객관적인 해석을 말한다. 어떤 수신자가 알아본다는 것은 송신자의 의도에 맞닿음을 뜻한다. 스투디움은 수신자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 맞출 때 ‘빙고’라는 외침이 나오는 바로 그런 순간의 느낌과도 같다. 스투디움은 보내는 정보로써 수신자는 총체적인 as a whole 의미로 판단하는데 코드가 서로 통하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것 즉 문화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푼크툼(punctum)’은 사진의 의미에서 나의 폐부를 예리하게(이는 은유적인 표현이므로 표시나지 않게 은밀하게 그리고 매우 강렬하게 전달되는 메시지를 말한다-‘필이 꽂힌다’, ‘화살이 폐부를 찌르고’, ‘감동 먹다’ 등의 표현을 쓴다) 찌르는 것과 같은 어떤 깊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것으로 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주관적인 요소에 해당한다. 예컨대 9.11 사건이 이슬람 급진파의 비행기 납치 자살 공격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정치 군사 종교 전문가중에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전쟁의 위기를 앞서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을 터인데 이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1]
코노테이션
바르트는 사진을 코드없는 메시지라고 말했는데, 사진에도 2차적 의미인 코노테이션이 들어가 있다. 그것은 사진의 선택 (여러 장의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작업이 개입된다), 기술적 처리 (게이츠의 왼손이 안보이게 부분을 잘라내는 것같이), 지면 배치(1면 머리 기사인가), 제목과 기사 ((‘결례(rude)’라고 기사 제목을 다는 경우)) 등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다.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총체적인 의미작용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2]
“이발소에서 잡지 한 권을 내미는데 그 잡지 표지에 프랑스 군복을 입은 한 흑인 젊은이가 눈을 들어 프랑스 국기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지의 ‘의미 sense’이다. 그러니 순진하건 아니건 나는 이 이미지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즉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라는 것, 모든 프랑스의 아들은 피부색의 구분 없이 그 국기 아래 충성으로 봉사한다는 것,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해 비방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른바 압제자들에게 충성하는 이 흑인의 열정보다 더 훌륭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확대된 기호학적 체계를 앞에 두게 된다. 즉 선행하는 체계로 이미 형성된 하나의 기표가 있다 (한 흑인 병사가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한다). 하나의 기의가 있다 (여기에서는 프랑스의 특성과 군대적 특성의 의도적인 혼합이다). 마지막으로 기표를 통한 기의 현존이 있다.”[3]
빌 게이츠가 악수하는 사진에 함축된 의미
빌 게이츠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자신은 미래의 인류 발전에 공헌하는 비즈니스 투자와 교육과 자선 사업으로 돈을 현명하게 쓴다는 그의 철학과 행동하는 양심을 암시한다. 이러한 해석은 관용어구의 사전적 의미와 같이, 바르트가 사진의 의미작용에 대하여 개념 지은 ‘스투디움’으로 설명된다.[4] 사진이 어떤 의미를 전달해 주는지 사진의 의미작용에 대한 바르트의 설명을, 빌 게이츠의 악수하는 사진에 적용해 보자. 빌 게이츠가 왼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의미는 슈퍼초강대국 미국의 월 스트리트는 세계의 부를 주무르는 심장부이고, 월 스트리트 최고의 재산가로써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5] 그리고 ‘재산을 현명하게 쓴다 use wisely’는 자선과 나눔의 문화적 전통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는” 이유는 대개 “자기 돈을 꺼내기 위해서 (to produce my own)”이고, 호주머니 지갑이 두툼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자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의 영어 표현은 “with my hand in my pocket”인데 이 어구는 옥스포드 영어 사전의 설명대로 “자기 돈을 쓰다 spend or provide one’s own money”라는 관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빌 게이츠의 호주머니와 그의 왼손에 대한 의미를 본다면, 빌 게이츠의 호주머니에 왼손을 넣고 악수하는 모습은 더 이상 단순한 한 개인의 악수가 아니라, 그것은 미국의 교육과 자선의 문화적 전통과 월 스트리트 정보통신 비즈니스의 특성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코드’의 의사 소통에 해당한다. 이런 측면에서 빌 게이츠의 악수법을 상대방에 대한 결례라고 ‘문화적 차이’를 들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가 상대방의 ‘문화적 차이’와 상대방의 내포된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 모순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6] 자신의 문화적 차이를 내세운다면 반대로 상대방의 문화적 차이 또한 인정해야 함이 옳다. 상대방의 존재는 자신의 본 모습을 비쳐 볼 수 있는 거울이거나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렌즈가 있는 망원경으로 이해되어야 함이 옳다고 본다.
[1] 참고적으로, 보도 사진은 예술 사진과 차이가 나서 예술적 감각으로 설명하기란 힘들지 모르지만, ‘이미지 정치’하고 주요 이슈를 물타기 해버린다든가 또는 교묘하게 정보 조작의 능력을 발휘하는 고도의 정치 기술자들-정치계 은어로 ‘스핀 닥터’라고 말하는 그들의 존재를 상기하라.
[2] 이 잡지의 표지 사진은 바르트의 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바르트가 사진을 책 속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저작권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르트의 경우라면 아마 잡지의 표지 사진에 대한 게재 동의를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면.)따라서 바르트의 언어이론을 보다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진 소스: 위키 &http://visual-memory.co.uk/daniel/Documents/S4B/sem06.html
[3] 바르트, “현대의 신화”,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 역, 동문선, 1997, 274쪽.
[4]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스투디움 studium’은 보내는 정보로써 수신자는 총체적인 as a whole 의미로 판단하는데 코드가 서로 통하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것 즉 문화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5] ‘당신은 내 손아귀에 들어 있다’의 뉘앙스는 부정적인 의미가 따르나 투자의 개념으로써 당신이 필요로 하면 자신은 돈을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6] 한편 빌 게이츠의 악수법이 논란이 되는 배경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따라서 그만큼 대우받고 싶어하는 자존심에서 나온다고 볼 여지도 충분한데 이에 대해서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이론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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