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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국가를 정치하라

제9장 교육 문제

by 문무대왕 2025. 4. 29.

행복정치학 

9

 

교육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지속적인 행복이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판단을 잘못 내리는 경우가 흔하다.[1]  그렇다면,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진지한 시도는 교육에 있어서 눈에 잘띄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은 흥미를 배양하고 젊은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지식을 공급함으로써 이러한 책임을 지고 있는 명백한 제도적 기관이다.*

 

*일부 독자는 교육기관의 업무를 정부 활동으로서 바로 연관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 고등학교 학생의 90%가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고, 대학생의 3/4가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다.

 

행복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은 즐겁고 만족스런 삶에 대해 크게 기여한다고 보여지는 활동과 행동을 찾아내는 작업을 주로 해오고 있다.  이러한 시도 가운데 업무와 직업경로는 틀림없이 중요하다. 취업은 사람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하고 또 삶에서 다른 유사한 것을 즐기는데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하기 위해서라도 취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노동자가 해고 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나는  매우 격심한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은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히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흥미롭고 깊이 만족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취업은 친구들 및 교제관계 원천이다.  취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존심을 가져다 주고, 사람들을 성장하고 성숙되게 만들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져다 준다. 

 

그렇긴 하지만, 일이 행복의 유일한 원천은 결코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니엘 카네만이 경험추출법으로 발견한 것은 하루중의 거의 모든 즐거운 활동은 사람들이 하는 일 이외에서-즉 여가와 활동적인 레크리에이션, 가족과 친구와의 식사, 아이들과 함께 놀기-일어나는 경향이 있다.[2]  사람들의 행복을 탐구하는 또 다른 설문조사가 밝히는 것을 보면, 일하는 업무가 행복과 관련되어 있는 정도는 친한 친구관계, 자신의 건강에 대한 인식도, 시민 활동이나 지역사회 활동 등과 같은 삶의 측면보다도 더 적다.[3]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의 또 하나는 다수의 고령자 노인들은 일할 때 느끼던 것보다 은퇴 후의 삶에 더 만족한다는 것이다.[4]  이러한 연구결과가 시사하는 것은 진실로 행복을 도모하게끔 설계된 교육은 오로지 학생들에게 직업 훈련만 시켜서는 아니 되고, 여러 방면에서의 흥미를 함양하고 또 행복을 향상시키는 경향이 있는 다양한 취미활동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초중고등 학교 교육

 

학부모들이 공립 학교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연례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이 주기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교사들은 단지 생산적인 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성공적인 인과관계, 시민 책임감, 결실을 맺고 보람있는 여가 활동 등 두루 학생들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점이다.[5] 그러나 이런 것은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지난 수 십 년간 강조해 온 임무가 아니다.   워싱턴 연방정부 관료들이 반복적으로 분명히 해 온 것은 공립학교에서의 국가적 이익은 주로 미국이 성장을 이루고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모든 젊은이들을 21세기 경제에서 직업 훈련을 적절하게 시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공 교육의 질이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지탱한다고 보는 것은 소비에트연방이 과학과 공학에서 미국을 앞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깨우치게 한 스푸트니크호 발사 이후 195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25년 후 소련의 위협은 사라졌고 대신 미국은 세계 경제의 급속한 성장에서 일본과 유럽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들어섰다.  이러한 우려는 교육부가 1983년에 발간한 공교육에 관해 매우 유력한 보고서인, “위기에 처한 국가”에 분명하게 언급되어있다.[6] 이 보고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선언한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고 대신 침울한 경고로 시작하고 있다: “상업, 공업, 과학, 기술혁신에서 한 때 도전자 없이 압도적이었던 미국의 우월성이 이제 전 세계의 경쟁자들에게 따라 잡히고 있다.  더글라스 해리스, 마이클 핸델, 로렌스 미셀이 밝힌대로: “보고서 전체에 걸쳐서 교육 용어보다 경제 용어가 더 많다.  위기에 처한 경제”라는 제목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7]

 

1983년 이래로, 공교육이 국가적 의제(agenda)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오고 있긴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생산적인 직업 훈련을 시키는 것에 교육의 중심이 계속 두어져 왔다.  정책 집단에서,  학생들은 학교가 경제성장과 경쟁력을 높이도록 하여야 하는 “인적 자본”이 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4년 행한 국정 연설에서 “우리들은 모든 학교를 단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세계 경제에서 경쟁해내고 이기는 것이고 이를 우리 자녀들이 배우고 있는가?[8]

조지 부시 대통령도 2007년 “낙제학생 방지(뒤처진 아이가 한 명도 없기)프로그램[1]을 재도입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다: “우리나라가 보다 더 경쟁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고교심화학습 과정[2]에 들어가는 것을 확대하고 수학과 과학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제공하는 최고의 직업을 우리 자녀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9] 오바마 대통령도 각급학교와 대학에 대한 투자를 더 많이 하는 것에 대한 주요한 이유가 직업 기술, 경쟁력, 경제 성장이라고 말했다.[10] 

 

이러한 정치지도자들이 표명한 견해가 주로 정부의 교육 정책에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다.  직업적 목표가 우선 순위에 있다. 낙제 학생 방지 법률에 따라 모든 지역 교육청[3]이 학생들을 정기적으로 시험평가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강제적인 평가는 정부관료가 생산 노동력에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읽기와 산수에 집중되어 있다.  이와 대비되게, 국민윤리에 대한 시험평가는 덜 강조된다.  이러한 과목에 대한 유일한 시험은 매년 시행되지도 않고 10년만에 한 번씩 치뤄지고 또 그 결과는 언론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한다.  또한 학생들의 삶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음악감상, 미술, 도덕 윤리 등과 같은 전인 교육의 측면에서의 진전을 측정하고자 하는 정부의 시도는 아직 없다. 

 

정부가 기초 능력을 강조함에 따라서 교장과 교사의 주된 관심은 학교활동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공공정책에 극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모험적인 시험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초등학교에서 두드러진다.  전체 지역 교육청의 62%가 보고하기를  저학년에서 학생들의 영어 언어 교육과 수학 과목의 노출 시간을 늘렸다고 한다.[11]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지역학구의 36%가 사회과목에 대한 시간을 줄였고, 28%가 과학 시간을, 10%가 미술과 음악시간을, 9%가 체육 시간을 각각 줄였다.[12]  영어와 수학 과목 때문에 포기한 다른 과목들의 시간을 평균적으로 내보면 그이전보다 대략 1/3으로 상당히 크게 줄어 들었다. 

 

고등학교에 대한 법률 변경 효과는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수학, 과학, 읽기에 20년 전보다 더 많은 코스를 택하고 있으나 사회과목과 예술에도 더 많은 코스를 이수하고 있다.[13] 고등학교 고학년의 75% 이상이 최소한 국민윤리나 국가제도 과목을 이수하고 있고, 거의 전부가 미국 역사 과목을 선택하고 있다.  연방법률의 보상과 제재는 틀림없이 학교관리들을 직업과 연관된 과목들-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루고 또 학교가 책임을 지는-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그러나, 공정하게 평가해보면, 교육자가 강조하는 읽기와 수학 코스는 직업 기술을 그대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충만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하는 여러가지 활동들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고등학교에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교과과정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요관심 영역은 교사들이 장래 삶에 나타날 다양한 흥미의 폭을 길러주는 데 실제로 성공하고 있는지 여부다. 이 점에서, 놀랍게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정부의 우선순위를 유지함에 있어서, 다수의 연구자들이 교육이 장래 소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나, 고등학교가 지속적인 지적, 시민윤리적, 예술적 흥미를 길러내고 있는지 또는 실제 운동경기나 훈련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기여하는지 여부를 규명하고자 하는 연구는 별로 없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니다.  81개 고교의 졸업생 대표자들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그 절반만이 10년 후에도 상당한 지적 흥미를 유지하였다.[14]  정치 참여에 대한 주요 논문에 의하면, 다수의 고교 국민윤리 과목이 고교 졸업후 투표율이나 정치적 활동과 지역사회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15]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교육은 행복에 직접적인 효과가 사실상 없다고 연구자들이 주장하므로, 학교가 장래 삶에서의 행복에 기여하는데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이 거의 없다(직업 훈련을 시키는 것을 제외하고)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사람들의 여가시간이 점차적으로 늘어났다고 응답하는데 이것은 독서, 여가스포츠, 시민 활동 등과 같이 학교에서 즐기기를 배운 취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다 더 많이 시청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16]  이러한 연구결과는 높은 행복수준에 미치는 연관도가 텔레비전보다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준 활동들에 지속되는 흥미를 함양시킬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목표를 향한 하나의 수단은 활발하고 소통하는 시민 참여를 위해서 필요한 지식, 흥미, 전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시민 교육은 국가 교육 기관의 기본적 목표라고 항상 인식되어 왔다.  오늘날 미국인의 80%이상이 이것을 공립학교의 “매우 중요한” 기능이라고 믿고 있다.[17]  정치문제와 시민문제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은 소통을 강화하고 민주주의의 실제를 가져오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에게 행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시민 참여가 줄어들고 있고,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정치와 정부의 문제에 대해서 중저소득층 지역사회를 조직동원하고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기타 풀뿌리 정치 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회인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한층 더 중요하다. 

 

현재 미국의 학교는 정부와 시민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마저도 충분하게 숙지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지적하고 있다.  교육부가 수행한 1998년 설문조사를 보면, 미국 고교 고학년생의 대략 75% 정도가 “국민윤리 과목에 우수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3분의1은 심지어 정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10분의1도 않되는 소수만이 왜 시민들이 민주주의 절차에 참여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2가지 이유를 설명해 낼 수 있다.[18] 비록 국민윤리에 대한 이전의 시험이 엄격하게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결과는 고교 고학년생의 국민윤리 지식이 1960년대 말 이후 점차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19] 한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 고교졸업생 중에서 국가제도에 대한 지식이 모든 면에서 1940년대 말의 고교중퇴자 수준과 같다고 한다.[20]

 

왜 정치가 중요한지 왜 학생들이 정치적인 과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데 학교 수업 시간을 잘못 운영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거의 90%가 국민윤리 과목에서 가장 빈번한 활동은 읽기와 연습문제 빈칸 채워넣기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교육은 딱딱한 제도적 편제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21] 정치학자의 논문에 따르면 미국의 국가제도 교과서는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정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왜 정치가 학생들이 관심사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설명이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국가제도와 국민 윤리 교과서에 대한 가장 면밀한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제도 과목이 가장 수준이하다.  대체적으로, 그것들은 “학생들이 비판적이거나 창의적으로 도전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임무가 학생들에게 관심이 되는 의제에 연결되지 않고 있다.  국민윤리 교과서는 이러한 측면에서 조금 더 낫다고 여겨진다. .

 

 

학교가 잘한 것을 보면, 학생들을 활발한 지역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고 또는 참여를 의무화 함으로써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고교생의 40-50%가 현재 참가하고 있다.[22]  그러한 경험은 졸업 후까지 자주 이어지는  시민 참여의 습관을 길러줄 수가 있다.  이런 시민 참여는 학생들에게 개인적 만족을 주고 지역사회에게는 이익을 가져다 준다.  봉사활동은 도움을 요하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동정심을 함양한다.  이러한 것은 교실수업으로는 결코 얻어낼 수가 없다.  그러나, 학생들의 노력에 대해서 숙고해 보게 함으로써 학생들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문제와 시민으로써 책임 사이의 관계를 깨닫게하는 여러 방법들로 교과과정에 통합해 냄으로써 그러한 경험이 주는 온전한 혜택을 얻으려는 노력이 아직도 대개의 고등학교에서 결여되어 있다.

 

전인 교육에 대한 두 번째 요소는 예술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감상이다.  비록 거의 모든 학교 제도가 예술 과목을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있으나, 그러한 과목은 흔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고 선택과목으로써만 제공되고 있다.  이러한 과목들의 목표는 대개 조악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런 과목들은 자격없는 비교사가 수업을 담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시간과 예산이 부족하면 가장 먼저 줄어 들거나 폐기되는 과목들 중의 하나다.[23]

 

*예술 교육의 목적에 관해서 정통 학술지에 격론이 벌어진다.  대학에서 글쓰기 입문 과목 같이 흔히 주변과목으로 취급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학술논문지의 토론은 이론적인 추상성이 매우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전국 전체의 교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것과는 먼가 크게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See Ronald E. Neperud, Context, Content, and Community in Art Education (1995). 

 

교육방법들이 오래 지속되는 흥미나 깊은 이해를 유발하기에는 부족하리 만큼 부실하게 설계되어 있다.  시각미술 과목의 교사 다수가 학생들의 관찰력을 향상하는데, 또는 보다 비판적으로 보는 것을 평가하는데 또는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내다볼 수 있는 상상력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고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취미로 하거나 아니면 예술 소비자로서 학생들이 지속되는 흥미를 얻도록 하는데 어떤 교육방법이 가장 나은 것인지를 알아 내고자 하는 연구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주변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예술 작품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열어주는 기회를 활용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24] 

 

연습과 운동경기는 학생들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데 기여하는 취미를 습득하는데 도움을 주는 미완성의 기회의 또다른 사례를 아직도 제공하고 있다.  레크레이션의 활발한 형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국성인의 25%만이 의사가 권고하는 체육활동을 별도 시간을 내서 하고 있다) 큰 만족을 가져다주는 취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학교는 활동적인 레크리에이션 운동경기에 참여할 의지를 개발시키는데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평균 9세 아이가 15세에 이를 때까지 육체적 활동에 쏟는 시간이 하루 3시간에서 주중 49분 주말30분으로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25]  이러한 결과는 더욱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활발한 운동이 정신적 위기의식과 학업 성과를 높여줌으로써, 스트레스와 걱정불안과 우울증을 막아줌으로써, 비만을 예방함으로써, 건강과 장수의 가능성을 높여줌으로써 학생들의 행복에 뛰어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연구논문이 밝혀주기 때문이다.[26]  이러한 기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자원을 소수의 유명한 팀 운동경기-(이런 것은 졸업하고 나면 거의가 행하지 않는다)에서의 뛰어난 선수층에 집중하는 한편 또 매주 체육관에서 자유시간을 주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이 요구된다.  장래의 삶을 통해 지속될 체육 활동을 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노력으로써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테니스 달리기 수영 조정 등 여러가지 열정적인 평생 스포츠에 노출시키는 것이 보다 더 나을 것이다.

 

고등학교가 보다 직접적인 접근방법을 취하고 심리학자들이 행복에 대해 인지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까?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이미 그러한 코스가 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울증을 미연에 막는 노력으로써 펜실베니아대학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Seligman)과 동료 연구자들은 8-15세 사이의 학생집단에게 행복학 연구에 바탕을 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27]  이 코스는 학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 앞에서의 수업시간 발표 및 행복을 증진하는 실제적인 훈련 일정을 포함하고 있다.  한 주간, 참가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하고 자기 삶이 더 나아진 경험을 느끼게 한다. 다른 한 주간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친절함과 관대함의 행동을 특정된 수만큼 반복하게 한다.  그 다음주는 학생들이 최근에 겪었던 특별한 곤경에 대해 글을 표현하고 왜 그런 경험이 스트레스를 주는지 또 그런 일에 오해를 하게 되었거나 또는 과잉반응을 보인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

 

 

이러한 종류의 훈련을 비평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쉽고 또 학교가 제공하여야 마땅한 중대한 지적 작업으로부터 이상한 일탈이라고 쉽게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셀리그만 교수를 변호한다면, 실제적 수업의 세부 내용은 참가자들의 다수층에게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실험적 연구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28]  일부 연구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러한 훈련을 포함한 실험적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육이 끝난 여러 달 후에 통제집단보다 더 큰 행복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

 

셀리그만 교수가 제공하는 코스는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생들을 통제집단과 비교해 보는 일련의 별도의 평가에서, 이 프로그램은 2-3년 기간에 걸쳐 우울증의 발생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29]  젊은이들의 20%까지가 연중 정신건강 문제를 겪는다고 여겨지므로 이러한 종류의 노력을 크게 칭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셀리그만 교수의 팀만큼 실력이 뛰어난 강사가 가르칠 때 특히 그렇다.

 

또 다른 그룹이 여러가지 문제와 위험을 다루는 단기 고교 코스를 실험적으로 실시했다.[30]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시도를 했거나  학생들에게 성공적인 결혼을 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또 다른 이들은 에이즈, 임신, 마약과 음주남용, 자살들을 예방하는 코스를 시도했다.  이러한 종류의 성공적인 개입으로 여러 중요한 면에서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높일 수 있다.  효과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평가하고 또 잘 훈련된 강사를 확보한다면, 그런 프로그램은 확대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행복에 대한 연구가 보다 잘 알려지게 됨에 따라, 보다 많은 고등학교 교사들과 교장들이 이러한 과목에 대한 코스를 정규 학과 과정으로써 제공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지지하는 이유들은 논리적인 것으로 보이며 더우기 칭찬할 만한 하다.   십대청소년은 어떻게 보다 행복하고 보다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자살율, 우울증, 마약과 음주 남용의 증가 이 모두는 많은 청소년들을 문제 있거나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만족스런 삶을 탐구하고자 하는 물음에 직접적으로 해답을 주는 코스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도움이 필요한 징후에 대처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 물음에 긍정적이라고 대답을 하고 싶지만, 학교가 그러한 코스를 제공하는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행복을 증가시키는 실제적 훈련 같은 코스는 특히 그렇다.  그 이유는 다수의 고교 교사들이 그러한 자료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에 관한 엄격한 코스를 이수한 사람은 거의 없다.  실무자의 관점에서 행복학 연구 논문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학을 깊게 배운 교사들도 거의 없다.

 

자격 없는 강사들이 행복학에 대해 알려진 것들을 왜곡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31]  행복에 관해 시중인기를 끄는 심리학 서적들이 넘쳐나고, 이러한 책들은 “좋은 삶”에 대해서 과장하고 또 증명되지 않은 이론과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오도하고 또 근거 없는 자기주장 등으로 종종 채워져 있다. 자격없는 강사가 보다 큰 행복을 달성하는 방법이라고 하며 실제적 훈련을 제공할 때 더욱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성숙되고 성공적인 삶에 필수적인 태도들을 희생시키는 그러한 훈련을 자제시키에는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학생들에게 감사한 자세를 갖기를 촉구하고 선한 삶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마땅찮게 여기는 사건과 상황을 받아들이게 이끌 수 있다.  자신감과 자존심을 쌓는 선의의 노력은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들이 극복해야 할 약점을 무시하게 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피하게 하는 부적절한 낙관주의를 낳을 수가 있다. 요약하면, 중용과 균형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대부분의 다른 인간적인 노력만큼 중요하다.  열광적이고  훈련되지 않은 교사는 이점을 간과하거나 또는 교실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다룰지를 그저 깨닫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문제들은 골치 아픈 딜레마를 노출한다.  지속가능한 행복과 불만족의 원천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은 학생들에게 분명히 큰 값어치가 될 수 있다.  젊은이의 40%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다수는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행복학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행복에 대해 순진하거나 왜곡된 교육은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 있고 학교를 성난 학부모들과 다른 관심 집단들로부터 반갑지 않는 반론에 노출되게 할 수 있다.  이상적인 것은, 사려 깊은 코스 자료를 개발하고 이를 가르칠 자격있는 강사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무적인 면에서, 학교들이 한다고 해도 가까운 장래에는 이러한 단계를 취할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자격있는 강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학교가 아마도 그러한 코스를 뒤로 미루고,  알차고 뿌듯한 삶에 기여하는 기술과 흥미의 폭을 길러주는 보다 익숙한 과목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행복에 대한 대학 교육의 효과

 

고교 고학년이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 교육이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현저하게 물질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된다.  과거에는 항상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에 대학 신입생은 가치관을 기르고 의미있는 인생철학을 계발하는데 주로 흥미를 가졌다.  단지 40%만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했다.[32]  그러나 1960년대 말에 들어서 학생들의 야망이 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경에는 그들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이제는 의미있는 인생철학을 쌓는 것을 중요한 목표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대학신입생은 단지 40%에 불과한 반면, 대학신입생의 75%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33]  그 이후로, 돈버는 것이 대학을 진학하는 가장 뚜렷한 이유라고 말하는 것이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며, 그런 학생들의 목표는 거의 같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다른 목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덜 행복하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많은 연구논문들이 밝혀 주고 있다.[34]  그렇다면,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의 다수는 충만한 삶에 대해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다행히도, 대학은 오랜 역사를 통해 모든 대학생들이 최소한 최저 학습 범위를 이수할 것을 강조해 오고 있다.  전문직업학과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도 보통 최소한 1년간은 교양 과목을 이수하여야 한다. 교양과목은 학생들을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에 노출시킴으로써 여러가지 방면에서 흥미를 유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강의실 밖에서는, 대학은 다양한 흥미에 맞추어 많은 수의 과외활동 프로그램-교향악단, 합창단, 운동팀, 교내 스포츠, 대학신문, 연극반, 기타 취미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청년 민주당원과 청년 공화당원의 조직은 대다수 대학 캠퍼스에 존재하고, 학생회 자치기구는 정치적 흥미와 능력을 개발하는 별도의 기회를 제공한다. 대학 고학년의 절반이 노숙자 센타, 빈곤한 가정 어린아이들을 위한 무료과외, 교도소와 고령자 방문, 기타 여러가지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구호단체에서 일하게 될 정도로 지역사회 봉사활동이 최근 크게 확대되었다.  과외활동이 활발하게 많아짐으로써 학생들은 새로운 분야의 흥미를 탐색하고, 평생 취미를 습득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 편안하고 조화롭게 살아가고 일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인상적인 다양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돈을 번다는 것의 광범위한 선입관은 대학 정규 과정에 확실히 흔적을 남겼다.  대학입학 지원자들을 붙잡기 위해서 대학들은 직업관련 전공을 더욱 더 제공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고, 학생들은 급여 수준이 높은 전문직업을 준비하는 프로그램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옮겨가는 것으로 반응했다.  1970-1990년 사이, 경영학 전공자 숫자는 3배나 상승했고 경영학은 대학생의 가장 인기있는 과목으로 부상하였다.  전체 4년제 대학생의 거의 3/5이 현재 직업관련 전공을 택하고 있다.  인문 예술 전공자도 박사과정을 들어가서 학계로 진출하려는 학부생을 위해 설계된 직업전단계 과정으로 의심이 드는 전공을 종종 선택하기도 한다.

 

직업관련이든 아니든, 이런 대학 전공을 전체 대학생의 절반이 선택하고 있다.  대학 교육과정의 대략 25%가 학생들이 특별한 흥미를 추구하도록 전형적인 선택과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흥미를 탐색하고, 시민정신을 닦고, 인정받을만한 글쓰기를 배우고, 외국어를 연마하는 등의 인문교육의 다른 야망있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여분의 시간이 거의 없다.

 

더구나, 모든 다양한 범위의 특별활동은, 다수의 대학이 대학생들에게 장래 삶을 풍요롭게 할 능력과 취미를 습득하기를 돕는 의도적인 계획에서 나오기보다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이러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대학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쏟는 예산의 대부분은 6개 정도의 인기 스포츠 종목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런 인기스포츠 종목은 졸업하고 나면 거의 운동을 하지 않는 것들이다. 가능한 많은 대학생들에게 아마추어 화가, 음악가, 사진가, 또는 최소한 지식있는 소비자나 예술애호가로서 계속 남을 수 있게 만드는 예술에서의 자신감을 얻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노력에 예산과 행정적인 지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특별활동은 대학 기숙생활을 하는 18-21세의 4년제 대학생들의 대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생의 다수는 나이가 더 많고, 파트타임으로 공부하고 있으며, 기숙사 생활을 하기 보다는 통학을 하고 있다.  요약하면, 과외활동이 평생에 걸친 흥미를 유발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은 숙고끝에 나오는 노력이라기 보다는 그냥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또 대학기숙사 생활을 하는 더 나이 어린 젊은 학생들에게서보다 요즘 늘어나는 추세의 나이 많은 대학생에게서는 그러한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보다 적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학생들의 태도, 흥미, 가치관의 변화를 측정하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바로 지적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전체적으로 환영할 만하다.  폭넓은 인문학에 내재가치가 있다고 믿는 고학년의 비율이  평균적으로 25-30%포인트  상승했고, 반면 교육을 주로 수입능력을 상승시키는 수단으로 보는 사람의 비율은 순 17포인트 하락하였다.[35]   심각한 지적 및 미적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믿는 고학년의 비율은 크게 상승했다.[36] 경영학, 교육학, 공학 등 인기 학과에 등록된 학생들 사이에 시민참여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은 일부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정치학과 시민활동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 비율 또한 완만하게 상승하는 편이다.[37]   도덕윤리는 상승하고 특히 소수학생이 이과목에 등록하고, 또 여러 연구자들에 따르면  향상이 실제 행동에 최소한 완만한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38] 

 

이러한 흥미와 태도가 졸업 후 여러 해에 걸쳐서 지속되는지 여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같이, 대학의 장기적인 효과에 대한 연구의 다수는 차후의 소득에 대한 영향과 결부된다.  그러나 또한 연구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지역사회봉사활동은 차후의 시기에 처음의 시민적 관심과 사회적 관심에서 초기 차이를 통제한 후에도 그이후의 여러 해 동안 더 많은 시간을 시민 관련 일에 전념하게 학생들을 자극시키는 것으로 보인다.[39]  정치학자들이 또한 발견한 것은 투표율과 여러 종류의 시민 활동은 고등학교 교육만 받은 사람보다 대학 졸업자들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학생들이 받은 교육에 따라 얼마나 크게 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선택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와 흥미 사이에 있는 초기 차이 때문에 이러한 효과가 얼마나 크게 나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40]  지적 흥미와 예술적 흥미를 함양하는 것과 같은 대학의 다른 목표에 대해서, 졸업생의 소수만이 지속적인 효과가 있다는 단편적인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연구결과는 너무 미미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또 행복학 연구학자들은 장래 삶에서 나타나는 행복에 대학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였다. 교육을 더 많이 받는 것이 행복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매우 미미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결론인 것 같다. 기껏해야 성인가운데 아주 적은 차이가 난다고 본다.  대학은  긍정적인 간접 효과[4]를 나타낸다.[41]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보다 행복한 편이다.  그래도 이러한 결과는 주로 대학 나온 사람들이 더 급여가 좋은 직업을 가지고 건강한 습관을 가질만큼 자기관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대학이 더욱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다양한 흥미의 폭과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대학, 어떤 학과, 또는 어떤 대학생활의 경험이 장래 삶에서 더 큰 행복과 연관되는 경향이 있는지 그리고 행복한 삶과 연관되어 있는 활동들에 더 많이 참가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장기 효과에 대한 탐구가 더 많이 행해져야 한다.  그러한 분야에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전인교육을 하고 인간적인 가치관을 함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대학들이 대학졸업생들의 삶에 대한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알아내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전인 교육[5]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도전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명백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결과를 검토해봄으로써 교육자들은 어떻게 학생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고 또 졸업 이후 장래 몇 십년간 학생들의 행복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대학 교육의 기여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가?

 

학계에서 비판자는 대학이 학생들을 알렉산더 메이크레존(Meiklejohn)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사고를 깊이 하도록 충분히 준비시켜야 하는가의 여부를 주기적으로 질문해 왔다.  앨런 블름(Bloom)이 그의 1987년 베스트셀러 비판서인 “미국인 마음의 폐쇄”에서 이 문제를 아주 잘 다루었다.[42]  보다 최근에는 예일대 법대 교수이자 전학장인 앤소니 크론만(Kronman)이 다시금 경종을 울려주었다.

 

어떻게 삶을 보내야 하는 지,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하고 또 그 이유에 대한 질문과 어떤 의지표명, 관계, 프로젝트, 기쁨들이 삶의 목적과 가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이런 질문은 대부분의 대학들이 오늘 날보다도 20세기 중반에서 더욱 심각하게 여겼던 질문이다. 자신감을 가지거나 또는 학생들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의무이거나 또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인문학 교수들이 날로 적어지고 있다.[43]

 

크론만 교수의 논점은 대다수의 대학의 사정을 기술하고 있음은 틀림없이 정확하다. 삶의 의미를 기꺼이 탐구하고자 하는 학생 어느 누구라도  보통 그런 임무에 적합한 읽을거리가 있는 코스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목적에 특별히 설계된 강의를 제공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러한 탐구를 장려하는 대학은 거의 없다.  일반 교양교육 프로그램의 대다수는 학생들이 주요한 지식체계-인문학, 자연 과학, 사회 과학-의 각 방면에서 두 코스 이상을 이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선택한 코스가 대학생에게 그들의 삶의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의도된 프로그램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자들은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철학의 역사나 “위대한 고전”[6]을 공부하게 하는 것은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대학이 학생들을 그러한 주제를 다룬 최고의 읽을거리에 노출되도록 설계된 선택 코스를 고안해내고 장려하는 데 대학이 중대한 노력을 담보해낼 만큼 분명히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비록 그러한 코스는 어떻게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학생들이 생각하도록 도울 수 있지만, 학생들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얼마만큼의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위대한 고전들은 답을 주는 것이라기 보다 질문을 제시한다는 것에 보다 어울릴 것이다.  주요한 기여도는 학생들이 피상적인 해답을 헤쳐보고 의미와 충만에 대한 탐구가 복잡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놓여있다.  많은 학생들에게, 크론만 교수에게도, 그것이 바로 코스를 그렇게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부정함 없이, 학생들이 어떻게 보다 충만하고 보다 만족스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이상으로 대학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분명한 하나의 단계적 과정은 행복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에 바탕을 둔 코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미 몇몇의 대학이 그렇게 하고 있다.  정말로, 만약 위대한 고전 코스에 흥미가 줄어들었다면, 행복에 대해서 행태과학자들이 제공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가 적용된다.  비록 그런 코스들이 내용과 접근방법에서 차이가 나지만, 대개는 한 두 가지 모델을 따르고 있다.

 

하나의 접근방법은 행복에 대해 알려진 것-측정될수 있는 방법, 결과의 정확성, 행복과 고통의 원천 및 그 효과의 기간과 강도에 대한 실험 결과의 축적-을 그대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한 코스의 구성은 행태 과학에 관한 다수의 대학 강의하고 비슷하나, 학생들의 삶에 대한 자료의 적합성이 크면 종종 매우 인기있는 코스가 된다.  예를 들어, 하바드대학에서 최근 행복에 대한 코스에 800명이 넘는 학부생이 몰려들었다.  이는 4년 기간에 걸쳐 전체 학생의 절반에 이룰 수 있는 정도가 된다.[44]

 

코스자료를 가르치는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와 비슷하나, 또한 셀리그만 교수가 사용하는 실무 훈련-감사함을 표하고, 불쾌한 사건을 보다 밝은 불빛에 비추어 분석하고, 친절한 행동을 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코스를 담당하고 있는 일부 강사는 뉴에이지(New Age) 욕조탕 광고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구로 이들 코스의 효과를 설명하고 있다.  한 강의계획표에 따르면  해당 코스는 “도덕적인, 만족스런,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대한 즐거움을 계발해 줍니다.[45]  또 다른 예는 더 대담한 주장을 담고 있다: “이 코스를 끝마치면 여러분은 보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개인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46]  또 다른 교수가 조금 약하긴 하지만 이렇게 표명하고 있다: “여러분은 행복에 관한 연구 결과를 여러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47] 하나 덧붙이는 것은 대부분의 강사들은 이러한 종류의 주장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고전 코스와 같은 행복에 대한 코스는 어느 특정 학생에게 어떻게 만족스런 삶을 살아가는 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연구 결과가 가져다 주는 것은 단순히 어떤 활동과 조건이 만족을 가져다 주는지, 불행을 가져다 주는지, 어느 한 쪽이나 또는 그 반대로 지속되는 효과가 없는지 등 그런 가능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 연구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지 않을테고 또 개인적인 학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거나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운동이나 다이어트에 관한 다수의 연구결과와 같이-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최소한 알아둘 가치가 있다.

 

대학이 학생들의 행복을 상승시키는 것을 돕는 실제 훈련을 제공하는 추가과정을 설치해야 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 혹자는 질문할 것이다. “삶을 변화시키고” 또는 “개인적 변화”을 이룬 그러한 코스의 강의 요강(실라부스)은 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일부에게는 선전에 가까울만큼 불편해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코스가 선택과목이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고, 적합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교수가 가르친다면 그러한 코스들을 막아야 할 이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다수의 대학 코스가 학생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제공되고 있다.  사실 대학은 흔히 대학입학요강서에서 전체 교양과목의 주요 목표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여러 방법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을 돕는데 있다고 표명하고 있다.  그러한 진술은 대개 직관과 희망에 지나기 않기 때문에 최소한 경험적 연구에 어떤 근거를 두고서 한다는 일련의 실제적 훈련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할 수는 거의 없다.

 

행복에 관한 코스를 가르치는 것은 별도로 하고, 대학은 기쁨과 깨우침의 새로운 원천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적 흥미를 독려하기 위해서 나이 많은 그룹의 사람들에 다가가는 기회가 더욱 커지고 있다.  18세의 어린 학생들에게 지속되는 흥미를 깨우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는 도전이었고 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나 그 결과는 매우 불확실하다.  현재 대학은 과거 40년간 미국 전체 대학에서 일어난 조용한 혁명을 이용하여 결과에 자신감을 갖고서 이러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크게 표시나거나 요란법석정도는 아니지만, 나이 든 미국인들이 정식 교육은 20대에 끝날 이유가 없으며 평생을 통해 연장될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많이 해가고 있다.  흔히,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대학 코스를 밟는 성인의 수가 학부과정과 전문직업대학원 수준의 학위 과정에 등록된 전통적인 학생들의 숫자를 넘어서고 있다.  신규대학생의 대부분은 이들의 분야에서 최근의 발전을 따라가고자 하거나 또는 그들의 업무 영역에서의 변화를 준비하고자 하는 직업적인 이유에서 등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는 단순히 자신들의 보는 관점을 넓히고 어떤 새로운 지적 흥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들어가기도 한다.  더욱 더 많은 성인들이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고 긴 은퇴기간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매우 흔하게, 대학은 이러한 점증하는 교육에 대한 관심을 단순히 돈 버는 수단으로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부유층 졸업생을 위한 호화유람선이 넘쳐나는 것과 같이 회사를 바라보고 수업료가 비싼 경영자 코스가 넘쳐난다.  그러한 과정이 무슨 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은 전통적인 과정이나 인터넷 수업을 통해서, 배움의 새로운 분야를 찾고자 하는 심각한 욕망을 갖고 있는 주위의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서기를 또한 잘 해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은 보통 대학생 나이를 넘어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면서 진보 교육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 더해서, 대학은 학생들이 더욱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다.  대학생이 해야 할 장기지속효과의 가능성이 있는 결정 하나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유망한 전문직업군에서의 공통된 만족과 좌절에 대하여 놀라우리만치 많은 양의 적합한 사실들을 축적해 왔다.  학생들이 교육을 마치고 나면 맞게 될 삶의 모습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증거를 주지 않고서 학생들이 지원할지 모르는 여러 전문 직업학교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하다.*  아서 레빈(Levine)과 자네트 큐레톤(Cureton)이 대학생의 “초상화”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수의 학생들은 경제적으로도 잘 살고 사회에서 선함도 모두 실천하기를 원하지만 이 둘을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정말 별로 하지 않고 있다.[48]  대학은 학생들이 그러한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시도로써 직업에 대한 많은 연구서들을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만족이 다른 직업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러한 지원은 더욱이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높은 특권과 소득의 직업은,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만족 수준의 평균이상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직업 10가지는 흔히 의외적인 경우가 있다. 만족 수준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목사(신부), 물리치료사, 소방사, 교육행정가, 화가-조각가, 교사, 작가, 심리학자, 특수교육 교사, 토목 기사 순이다.  삶의 만족의 가장 높은 수준과 연관된 직업은 목사(신부)이 리스트 최고에 오르며 비슷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하나의 직업의 예로 법학을 들어보자면, 법률가들의 삶에 대해 많은 정보가 입수 가능하다. 성공한 법률가로서 필요한 주요 요소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리고 걱정과 불만족을 종종 초래하는 변호사 실무 측면에 대해서 변호사와의 수많은 인터뷰에 근거한 에세이가 많이 나와 있다.  법정 변호, 회사 자문, 공익 보호등 여러 종류의 법률 업무를 설명하는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변호사의 소득, 신참변호사의 로펌 이직율이나 직업이직율, 스트레스 수준, 음주나 마약 남용, 이혼, 자살 등에 관한 정교한 통계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한 정보를 법률가 과정에서 얻거나 강의실 밖에서 어떤 편리한 형태로 얻든지 간에, 분명하게 그러한 정보가 법률가의 직업을 고려하는 학생들에게 적합하다,

 

단과대학이 그러한 정보를 배포하는 대학교내의 유일한 창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없다.  학생들이 일단 전문직업 대학원에 들어가거나 전문직업 전공학과를 선택하고 나면, 그리고 나서도 전공 법 분야와 어떻게 개업할 것인지 또는 어느 기관에서 근무할지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법률가 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직업에  따르는 공통적인 만족과 불만족에 대해서 많은 양의 정보가 나와 있다.

 

그러한 정보는 더욱 유용하다.  여러 전문직업가가 최근 몇 십년간 각 전문가들의 삶의 질에 크게 영향을 끼친 주요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일하는 곳에서 흥미있는 새로운 구성의 변화가 일어났다: 차터 스쿨[7], 유망한 분야에서의 초기 비즈니스 창업, 전문특화 출판사, 의료보험 관리기구, 온라인잡지, 수많은 비영리 단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많은 전문직업들이 타고난 천직이라는 개념은 점차 엷어지고 좀더 사업가로 변해갔다. 교육청이 표준화된 시험 성적을 올리게 노력하고 또 보다 엄격한 책임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기 때문에 공립학교 교사들이 교실에서 교사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과 방송의 회사 사주는 뉴스 기자 직원을 줄이고 기자들에게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인간적인 흥미와 선정적인 이야기를 싣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회사의 수익 우선 체제로 변해 간 편이다.  의료보험관리기구는 의사들에게 좀 더 많은 환자를 진찰하도록, 더 많은 행정적인 업무를 하도록, 관리 비용에 좀더 밀접한 감독을 받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출판사들은 때때로 높은 저작 수준에 대한 관심보다는 회사의 이익 창출에 보다 관점을 두는 대형 회사들에 의해 합병되었다. 점증된 스트레스, 늘어난 업무시간, 직장과 가정 사이에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모든 전문직업군에서 듣게 된다.

 

법률 업무 변화가 전문직업의 성격을 변모시킨 엄청난 변화와 또 이로인한만족에 대해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49] 대학과 대형 비영리단체에서 법률담당 직원, 법률가 직원을 고용하여 회사의 다양한 범위의 여러 문제를 담당하는 대기업내 대형 법무팀, 공익 가치를 위해 싸우는 공공소송 법인등이 법률 담당 자리를 만듦으로써 법률가로서 일하는 새로운 기회가 마련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로펌은 신참변호사를 대거로 고용하고, 최고의 파트너로 승진하는데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이러한 회사의 변호사들은 고객에게 법률비용을 부과하는 하루 일과의 시간표를 작성하여야 한다.  고용변호사는 법률비용 청구서가 많고 적음에 따라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더 오랜 시간 일하게 하는 유인책으로 작용한다,  과거와 같은 거의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파트너변호사는 이제 그들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가져온 물량으로서 평가되는 것이 점진적인 추세이고 만약 이들이 “충분하게 돈을 벌어들이지 않으면” 로펌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더 오랜 시간 일하는 것에 대한 대가와 이러한 변화로 인해 대형로펌의 최고 파트너 변호사의 연간 수입은 수백만에 이르기도 하고 또 아주 특별난 로스쿨 졸업 신규변호사가 받는 초급 연봉이  몇 십만 달러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일부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또 다른이에게는 난감해 질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직장에서 법률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대형 법인에 근무하는 신규변호사의 최소한 절반이 3년 내에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난다.[50]  그러한 높은 직원 이직율은 떠나는 직원에게 뿐만 아니라 관련 회사에게도 낭비다.  만약 모든 로스쿨이 대형 로펌의 근무에서 일어나는 혜택과 불이익 그리고 다른 법률 사무에서의 근무하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현재 알려진 사실들을 학생들에게 노출되게 한다면, 최소한 일부의 이직은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법률 업무의 형태를 선택하든간에, 전문직업대학원 재학생들은 단순하게 기술적인 능력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에서 경제적 성공을 넘어서 참의미와 달성감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숙고해 보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회는 다양한 코스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직업-역사, 현재의 문제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마땅히 배워야 한다.  전문직업인에게서 자주 발생되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토론 코스는 어떻게 자신들의 가치관과 양립되는 방법으로 일을 해 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일부 학생들은 유명한 전문직업인의 전기를 읽음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또 일부는 좀더 기발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정신과의사이자 저자인 로버트 콜스(Coles)는 여러 전문직업대학원에서 도덕윤리 문제와 관련된 전문직업군에서 흔히 벌어지는 다른 딜레마를 제기하는 소설과 단편을 이용해서 코스를 가르친 적이 있다.  충만한 전문직업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내부적 회의감과 두려움을 꺼내는데 주저하는 학생들도 가공적인 인물이 직면한 질문들에 대해서 격렬한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참가자들이 열정적으로 이러한 토론에 임하고 있으며 그 이후로도 콜스 교수하고 연락을 계속하고 있다.

 

 

앞 문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코스는 흔히 전문직업대학원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에서 “위대하게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가장 잘 제공하는 방법을 고려하는 대학의 의도적인 노력은 별로 흔하지 않다.  법학대학원, 경영대학원, 의학대학원은 모두 각자의 전문직업인에게 불어 넣어 주어야 할 가치관과 이상을 전달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주기적으로 비판받고 있다.[51]  아무리 임무가 어렵다고 해도, 졸업생의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각단과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어떤 비전을 마땅히 제공하여 학생들이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들의 직업경로를 제시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육의 궁극적인 중요성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진보가 궁극적으로 충분한 풍요를 낳고, 모으고 또 소비하는데 쏟는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롭게 탈피하며, 깊은 만족을 가져다 주는 인간적인 취미를 함양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52]  오늘날, 예측된 풍요는 미국에 찾아왔다.  그러나 돈과 재산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들었다거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케인즈 같은 철학자가 내다 본 창의적이고 개념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전환하였다는 신호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아무리 풍요스러워졌다고 해도, 다수의 사람들은 좀 더 많은 돈이 지속되는 행복의 열쇠라고 계속적으로 믿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은 젊은이들이 정말로 만족스런 삶을 탐구하는데 도움을 주는 가장 잘 준비된 제도기구다.  당연한 것이지만, 선생들은 무엇이 학생들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학생들에게 말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학교와 대학은 학생들에게 탐색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식, 기술, 흥미를 최선을 다해 제공할 수 있다.  만약 교육자가 그러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면, 학생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게된다.  교육자들은 또한 정부 관료가 행복을 증가시키는 정책을 제시함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결국 정부가 시민을 크게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려면,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삶이 정말로 만족스런 것인지를 먼저 인식하여야 한다.

 

현재, 젊은이들이 충만하고 보람있는 삶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쏟는 정부 관료와 교육자는 거의 없다.  경제 성장에 최우선순위를 둠으로써 공교육에 대한 연방 정부의 정책은 경쟁적인 노동력을 개발해내는데 몰입되어 있다.  예외없이, 정부지도자들은 새로운 정책들의 추진을 미래 경제 성장과 번영에의 투자로써 정당화하고자 한다.  학교당국자는 주로 위에서 내린 결정을 따라 간다. 이들은 흔히 문제해결을 위한 선택의 수단이 거의 없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지금은 우선적으로 표준화된 시험 성적에 의해서 측정되는 기본적인 수학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 관료들은 대학 교과과정에 대해서 영향이 별로 없다.  대학 직원들은 교양과목의 보다 넓은 목표를 추구하고 인상적으로 다양한 코스와 활동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대학 교육은 사회전체의 경제력과 우선순위로부터 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주된 이유가 급여수준이 높은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서인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대다수 대학들이 지난 30년간 직업 지향의 전공들을 확장하고 향상시키는 데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더구나 “지식 기반 경제”가 주도하는 시대에  혁신과 과학적 발견이 경제 성장의 열쇠라고 더욱 강조되는 곳에서, 대학 예산은 더욱더 시장(marketplace)이 느끼는 욕구(needs)를 반영하고 있다.  연방정부의 연구 지원은 “경제적 잠재성”이 있는 분야로 옮겨졌고, 값어치있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수는 산업계의 자문 대가로 경제적으로 큰 보상을 받고 있다.  한편, 문학, 예술, 좀더 일반적인, 인문학의 대학 교수 급여수준은 학생들이 그러한 과목에 흥미를 잃은 것과 함께 점차로 줄어 들었다.[53]

 

 

그러한 우선순위를 재고할 시간이 분명히 찾아왔다. 교육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은  다같이 직업 능력을 습득하는 것 이외의 목적에 보다 중심을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교육에는 노동력을 담당하는 생산자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 이상이 있으며, 학교와 대학은 “인적 자본”을 생산해 내는 것 이상이 있다.  마지막 분석으로,  토마스 제퍼슨이 근200년 전에 쓴 말이 오늘날 지금도 진실이라고 여긴다: “모두가 조건을 개선하고, 미덕을 도모하고, 인류의 행복을 진전시키는데 쓰여지는 자원으로서 빛과 교육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54]



[1] 역자 주: No Child Left Behind” 교육개혁 법률은 말 그대로 뒤처진 아이가 한 명도 없기 즉 낙제학생방지 법률이다.  2002 1월 부시 대통령이 서명하여 법률로 발효되었다.  연방 교육부가 모든 학생들이 읽기와 산수를 잘하게 한다는 취지로 만든 이 법은 1962년에 제정된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한 것으로 미국 내 모든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교육기관의 책무성 강화, 학교 선택, 교사의 전문성 강화를 보다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주의 거센 반발과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현실성이 없고 징벌성이 강하다는 불만이 지적되었다. 이 법에 따라 학군 내 기존 공립학교도 종합평가 시험에서 부진하면 일정 부분 제재를 당한다. 2년 연속 연간 학력 향상 기준치(AYP: Adequate Yearly Progress)에 미달하면 학교는 개선안을 내놓아야 하고, 3년 연속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의무적으로 학생들에게 개인지도나 보충수업을 실시해야 한다. 4년 연속 목표에 미달하면 학교는 시정 조처를 받아 교사 전체가 교체될 수도 있다. 한편 일부 지역은 이법에 따라 제공되는 연방정부의 지원금을 이용하여 교사의 질과 학생의 학업성취를 점차 향상시키고 있는 경우도 나타난다. 

[2] 역자 주: College Board에 의하면 AP (Advanced Placement) Program은 미국 고등학교 학생들이 재학 기간 동안 대학 수준의(College-level) 학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AP 외국어를 포함한 22개의 분야에 37개 과목이 제공되고 있다. 대학 교수와 경험있는 AP 선생님들이 평가하는AP 시험 점수를 통해 학생들은 대학 학점을 인정 받거나 더 높은 수준의 과목을 이수할 수 있다.   

 

[3] 역자 주:  학군(School District)은 미국의 각 주에 있는 특별 교육 행정 단위로 해당 지역의 공립학교 교육을 담당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지역 교육청의 성격과 유사하다. 교육 운영권은 주 정책에 따라 대부분 학군이 담당한다. 연방정부는 직접 교육정책을 펴기보다는 재정 지원을 통해 학군으로 하여금 연방정부의 교육 방침을 따르게 하고, 주 정부는 학군을 위해 학업 기준을 세우고 재정 지원과 운영 감독을 한다.

[4] 역자 주: 유의한 매개변수가 존재한다면, 독립변인이 종속변인에 주는 영향은 직접효과(direct effect)와 간접효과(indirect effect)로 나뉘어진다. 직접효과는 매개변인(mediation variable)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매개변수를 거치지 않고 종속변인에 영향을 주는 것이고, 간접효과는 매개변인을 통해 종속변인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직접효과와 간접효과를 합한 값을 총효과(total effect)라고 한다.

[5] 역자 주: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은 자유 교육, 전인 교육, 교양 교육으로 흔히 번역한다.  이는 인간 본연의 자유와 이성을 계발하는데 중점을 둔 교육 철학으로써 실무 직업과 관련된 직업전문 교육의 강화와는 대조된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는 문학, 언어학, 철학, 역사학, 수학, 순수 자연과학 등의 전공분야를 말한다.

[6] 역자 주: the Great Books”는 1929년 시카고대학의 제5대 총장으로 취임한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 새행한 “시카고 플랜”에서 유래한다. 시카고 플랜은 ‘철학 고전을 비롯한 세계의 위대한 고전 100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지 않은 학생은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라는 고전 철학 독서 교육 프로그램이다. 시카고대학 학생들은 “시카고 플랜”에 따라 위대한 선인들이 남긴 고전 100권 이상을 읽어나가야 했다.  시카고대학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시카고 주 정부는 어린이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수준에 맞는 철학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그레이트 북스’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철학 고전을 읽게 만들고, 성인들에게도  똑같이 고전을 읽을 것으로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이다.

 

[7] 역자 주: “차터 스쿨 이론은 레이 버드 교수가 처음 제시했다. ‘차터 스쿨’은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주립대학 교육학과 레이 버드 교수가 1974년 쓴 “차터에 의한 교육(Education by Charter)”이라는 논문에 처음 등장했다.  차터 스쿨은 ‘공적 자금을 받아 교사·부모·지역단체들이 설립한 학교’를 뜻하는 것으로, 버드 교수는 논문에서 공립학교 교사 중 혁신적인 교육 아이디어가 있는 이들이 뜻을 모아 ‘차터’를 통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버드 교수는 공교육 변화를 위해서는 학교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1년 미네소타 주를 시작으로 1995년에는 매사추세츠가 차터 스쿨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반 기업을 제외하고 학부모·교사·시민 누구나 차터(Charter:헌장)를 만들어 주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학교를 설립할 수 있다. 차터 스쿨은 자율형 공립학교로서 학군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면서 학군의 교과과정·인사 따위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자체 교육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차터 스쿨은 흑인·히스패닉·아메리칸 원주민의 비율이 일반 공립학교보다 월등히 높다. 부유한 지역이 좋은 학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미국에서 저소득 이민자에게 차터 스쿨은 양질의 공교육을 받을 또 다른 기회이기 때문이다.   차터 스쿨은 학군의 통제에서 자유롭지만 주 교육위원회 규정과 연방정부의 학생낙제방지법등을 지켜야 하고, 입학 시험을 통해 학생을 뽑아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