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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비 연구-제3권-투후는 누구인가

투후와 육가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by 문무대왕 2025. 4. 14.

 

1.    투후와 육가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臨危而智勇奮投命而高節亮侯之忠孝淳深陸賈之優游宴喜

 

위기를 맞이하여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절개를 드높인 충신에는 충효지심이 돈독하고 깊었던 투후가 있고, 은퇴하여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즐긴 육가가 있다,

 

육가(陸賈, BC 240-BC 170)는 초나라 출신으로 정치외교가이었다. 한나라 건국 공신으로 잘 알려진 장량이 군사상 책략가라면 육가는 외교술의 대가에 속했다. 육가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망한 주요 원인과 한나라의 건국의 배경을 이론적으로 심층 분석하여 한나라의 통치술을문무 병행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신어의 저자이다. 육가는 유가적 문치주의에 경도되기 보다는行仁義 法先聖”(행인의법선성)의 도가 사상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따라서 유방이 죽고 난 뒤 여씨의 전횡 시기에 물러나 있다가 도가의 문무병행의 국정통치술을 펼친 한문제 때 다시 중용되었다. 육가는 유방이 항우와 맺은 강화 조약 등을 검토하는 등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에 정통하여 유방의 외교정책을 입안하고 수립한 전략가이었다. 육가는 문무 병행의 국정철학을 논한 한고조 때의 드문 문신이지만 동시에 남월에 출정한 군 경력이 그의 철학과 전략을 대변해 준다. 육가는 지금의 베트남인 남월에 출정하여 조타를 남월왕으로 옹립하고 남월을 한나라의 우호 제후국으로 만든 군사와 외교술의 대가이었다.

 

서정부에서 이런 육가를 투후와 같은 구절로 묶어서 표현한 배경을 보자. 투후 상구성은 어사대부에 임명되기 전대홍려직을 맡고 있었다. 대홍려는 육경 구경에 속한 직위로 육조판서로 치면 예조판서에 해당한 직위이었다. 승상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직에 조선시대의 재상에 속한 지위였고 어사대부는 관리들의 감찰과 탄핵을 맡은 장관으로서 그 위치는 판서 장관보다는 높고 승상보다는 낮은 위치에 속했다. 대홍려는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를 담당한 바 주된 업무는 제후왕들을 접대하거나 황실종친 인사들을 관리하고 국가 제례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당연하게 대홍려직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문서와 지식에 통달하여야 했고 외교술에 능해야 했다. 육가가 맡았던 업무 분야와 투후 상구성이 맡았던 대홍려직이 같은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악의 서정부에서 육가와 투후를 병렬적 구절로 같은 구절로 묶은 배경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육가가 제후국 왕들과의 관계에 능했고 주변국과 외교술에 뛰어난 문신이면서도 남월에 출정한 뚜렷한 군사상 공적을 세웠던 바와 같이, 투후 상구성 또한 대홍려직 문신이었지만 무고지화 태자의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진압한 군대 지휘자로 활약했고, 그 후 흉노를 정벌하러 서역에 출정하여 적군과 격전을 치루고 귀국한 장군으로서 군사상 업적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철학 사상적으로 보면, 육가가 문무병행의 도가적 입장에 있었고, 그 당연한 결과로 한문제 때 중용되었는 바 투후 상구성 또한 한문제의 사당을 지킨 첨사로 마지막 생을 마감한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육가와 투후 상구성과의 관계는 보다 분명해 진다.

 

이런 측면에서, 소하 조참 위상 병길 등의 명재상과 이광 위청 곽거병 들의 명장군들의 묶음과는 달리 육가와 투후를 같은 한 묶음으로 처리하여 또 다른 유형 즉문무 병행의 대표적 사례로서 들고 반악의 서정부는侯之忠孝淳深 陸賈之優游宴喜”(기호 투후 지충효순심 육가 지우유연희)으로 표현한 것이다. 육가를 유가로 분류하기도 하는 이가 많지만 그의 도가적 사상은충신장이 서두에서 육가의 신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배경을 보면 분명하게 확인된다. 참고로 충신장의 서두 부분을 설명한 글을 부록으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