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경사 바틀비 주해서

Scrivener 직업에 대하여

by 문무대왕 2025. 5. 27.

 11.A. Scrivener 직업에 대하여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스크리브너(scrivener)가 등장해서 한 마디 대사를 읊는 장면이 나오는리차드 3에 나오는 대사 구절을 보자.

 

이게 먼 줄 아세요?  바로 헤이스팅스에 대한 검찰의 기소장입니다.

기소장은 법률 문서답게 또박또박 아주 훌륭하게 잘 썼습니다.

오늘 세인트폴 대성당 앞 광장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흥미롭게 전개될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캐츠비가 이 기소장 원본을 가져다 준 후

여기에다 이렇게 옮겨 쓰는데 열한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원본을 작성하는데도 또 그만큼 시간이 걸렸을 테니 총 22시간이 지났습니다.” (익스피어, 리차드 3, 3 5)

 

위의 대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scrivener”는 법률문서 원본을 손으로 직접 베껴 써서 사본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며 “law-copyist”라고도 부른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문서를 복사하는 일은 복사기의 등장으로 퇴장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복사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타이피스트가 문서 사본을 작성했고, 등사기 (mimeograph)가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문서를 스캔하여 전자 문서로 저장한다.  작가가 문서 복사하는 일을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copyist” 단어를 놔두고 굳이 “scrivener”를 쓰는 이유는 아마도 “scrivener”는 라틴어 어원이 말해주듯이 역사적인 의미가 있고 또 독립적인 직업의 의미를 보다 강하게 전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굳이 오늘날의 법률 해석의 한 태도로 본다면 “단어를 바꾸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환경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며 문헌의 본문 의미를 고수하려는 문언주의(textualism)의 사고가 들어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폭넓은 상식과 깊은 전문성 (어찌 보면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 성격을 갖는다)의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 (통합, 융합, 통섭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을 강조하면서 휴얼 Whewell1840“consilience”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기존의 잘 알려진 concordance 합치(coherence) 일관성, convergence(통합)이라는 단어 대신 잊혀진 단어인 “consilience”가 오히려 희귀하여 그 의미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전(preservation)’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필경사 바틀비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암시하는 바는 통합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들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새로운 언어를 쓰는 것은 의사 소통과 전달의 의미를 보다 확실히 하고자 하는 구별적 의도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바벨탑처럼 무너지지 않고 사회를계속 유지 발전시키려면 필수적인 언어적 의사소통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우리 인간은 언어 사용을 통해서 생각 작용을 넓히고, 의사소통을 하고 교류하며,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서로 마음의 공감은 어떻게 얻어지는 걸까?

 

scrivener어원인 스크라이버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문서 저장 형태인 목간 또는 죽간에 구멍을 뚫어서 서로 이을 수 있도록 한 도구를 말한다.  바틀비가 하는 일은 법 문서를 글자 한 자도 안 틀리고 정확하게 그대로 베껴 쓰는 일 (his job is to copy legal documents by hand)이었다.  많은 분량의 딱딱한 법 문서를 글자 한 자도 안 틀리게끔 정확하게 베껴 쓰는 일-그것은 단순 모방하는 일 (mere copyist)이므로 단조롭고 쉽게 지루함이 느껴지는 일에 해당한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면 단순 노무에 해당하는 단순 모방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scrivener, law-copyist 직업을 두고서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필경사(筆耕士)”라고 번역하고 있다.  일본도 필경사로 번역하였고 쓰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직업으로써 필경사라는 존재하지 않고 가까운 직업을 굳이 찾자면 대서사정도가 해당된다.  물론 우리나라 행정부에서 왕조실록을 작성하거나 책을 필사하는 사람은 존재했기에 그런 직업과 비슷할 수는 있다.  더욱이 한국에서의 필경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바로 그가 桂苑筆耕”(계원필경)으로 유명한 최치원이다.  우리나라에서 변호사 제도가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때는 20세기 들어선 1906년이었고, 영미국같이 변호사 사무소에서 고용되어 법률 문서를 작성하는 직업-scrivener은 존재하지 않았다.  요즈음의 경우 대서사성격의 직업을 가진 부류를 행정사라고 부르고 있는데 법률 문서를 작성하는 변호사 업무가 발달하지 못한 (예컨대 영미국 같은 트러스트(trust)’ 법제가 존재하지 않고 보통법 판례법의 발전이 낮은) 우리나라의 법제도와 문화상 영미법의 변호사 제도를 단순하게 대조대비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law-copyist”를 축자 번역하면 사법 서사라고 말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으나 사법서사라는 단어는 일본에서는 직업으로써 사법서사가 존재하는데 (우리나라의 유사한법무사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법서사(Judicialscrivener)사법부 우위국가 사법심사(judicial review)’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영미국의 변호사의 성격에는 크게 못 미치고 큰 차이가 난다.  영미국에서 사법서사나 법무사에 가까운 그 정도의 제한적인 업무 영역을 확보하는 직업이 없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법무사나 일본의 사법서사 혹은 행정서사 직업에 가까운 영미법국가의 직업은 “paralegal (legal document preparer)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변호사가 아니면서 변호사 사무소 소속으로 제한적인 업무영역에서 법률문서를 고객 대신 써주는 일을 맡기도 한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부동산 등기 업무만을 전문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직업을 conveyancer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대개 변호사 자격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이 맡고 있다.

 

필기는 분실의 우려를 덜어내 진실을 보존하려는 목적, 필요할 때마다 꺼내 다시 보고 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진실된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사전달의 목적에서 필사가 행해졌다.  판례법국가에서의 scrivener, law-copyist의 직업에 대해 법제도와 문화가 다른 우리나라에서서기, 대서사, 대필가, 필경사, 필경사, 행정사, 사법서사, 타이피스트, 카피이스트 등의 단어로 완벽하게 번역되기에는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영미판례법은 변호사가 법정소송실무뿐만 아니라 트러스트, 등기 업무 등을 전담 (토렌스 시스템과 구별되는 Deeds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는 영미국)하고 있기 때문에 변호사의 업무 영역이 대륙법 국가하고는 법제도와 법문화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원문의 “scrivener”, “law-copyist”단어를 번역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필경사라는 단어를 선택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