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행 660년 전쟁 상황과 소정방 평전
□□□□□□□□□□熊津道行軍大摠管以 君王□□
국편위 번역: … (소정방을) 熊津道 行軍大總管*으로 삼고, 君王**을 … (* 그 직명으로 볼 때 당시 唐軍의 총사령관이었던 蘇定方이다). **(본 비문의 주인공인 文武王을 가리킨다).
추홍희 해석: (660년 소정방을) 웅진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군왕들로 하여금 (진지를 확고히 재정비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熊津道行軍大摠管
이 부분은 신구당서, 삼국사기, 자치통감, 태평어람 등의 기록을 참조하여 메꾸어 볼 수 있다.[1] 당나라가 망한 이후의 새롭게 편찬된 역사서는 새로운 왕조와 그 고위층의 지배이념에 따라 역사가 수정된 경우가 많으므로 비교적 편찬 시기가 빠른 예컨대 태평어람의 기록이 훗날에 재정리된 기록보다 신빙성이 더 크다.
당서의 소정방본전에 의해 “顯慶五年 蘇定方爲熊津道行軍大總管” 부분을 복원해 볼 수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 또한 당서의 기록을 다른 말로 약간 바꿔써서 재정리한 수준이다.[2] 당서는 소정방의 수군의 전투에 관해서만 기술하고 있고 신라와 백제의 육군이 황산벌에서 벌인 전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以待君王
“以▨君王” 결자된 글자는 以待君王(이대군왕)으로 해석되고 따라서 嚴陣以待(엄진이대)의 의미로 연결된다. 嚴陣以待는 ‘진지(陣地)를 확고히 정비하고 적의 공격을 기다리다’의 뜻이다. 즉 무모한 선제공격을 자제하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돌격형 공격을 감행하기보다는 적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고 수성하는 전략이 전쟁승리의 요체이다.
국편위는 “君王”(군왕)을 “文武王을 가리킨다”고 주해했지만, 군왕은 참전한 여러 나라의 군사지도자를 가르키는 표현이다. 660년 다시 전쟁은 한중일 뿐만 아니라 북서쪽의 변방국들도 관련된 국제전이었다.
18행
□□□□□□□□- (顯慶五年 蘇定方為) |
660년 소정방을 |
熊津道行軍大摠管 | 웅진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
以(待)君王 | 군왕들로 하여금 (진지를 확고히 재정비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
[1] 소정방평전에 의거 결자부분을 메꾸어보면, “顯慶五年 左武衛大將軍 蘇定方為 熊津道行 軍大總管 以待君王 隨命 嚴陳 率勵義勇 平討百濟 熊津江口 因與賊戰 揚帆蓋海 賊師敗績 岸上擁陣 飛楫鼓譟”.
[2] 삼국사기, 문무왕조 부분중,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끌기 어려웠으나 이전의 은혜를 좇아 생각하셔서 힘써 국경에 이르러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백제의]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한 뒤에 선왕께서는 드디어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의논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이끌고서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삼국사기 국편위 번역, 주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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