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정립 시대가 아닌 남북국 시대 관점 필요성
삼국사기는 많은 부분에서 실제적인 역사에 부합되지 않고, 또 가장 중요한 내용과 부분들에서 역사를 교묘하게 조작하였다. 삼국사기는 많은 부분에서 거짓과 조작이 가미되고 편집되고 가공되고 희화화되고 진실이 탈루된 조작과 망작의 위서에 해당한다.
읍루족 가운데 신라에 귀순하지 않고 구당서가 서술하였듯이 고구려의 풍속을 유지하고, 별도의 왕조를 체제를 세웠던 발해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망한 이후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 귀순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한반도의 역사 시대 구분의 관점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도 갖고 있는 “삼국”시대 즉 삼국 정립 시대가 아니라, “남북국” 시대로써 전체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고 리얼하게 바라보는 통합적 시각을 요구한다. 삼국의 정립 시대가 아닌 남북조 대치의 양강구도적 역사 관점은 정치적 이념 구분 측면에서도 유용한 시각이다. 미국의 정치지형도 링컨대통령의 남북전쟁에서부터 오늘날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남북국 보수와 진보의 양진영 대결 구도요, 일본도 막부 체제가 성립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남북조 정통성의 전쟁 역사가 말해주듯 존왕양이 쇄국과 개방의 그네타기요, 중국의 역사도 장강을 양계로 유교대도교의 남북조 시대요, 한국도 읍루발해대신라 남북국 시대이다. 따라서 여야대립적 양체제 관점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심층적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오늘날에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1]
만주사관
"만주족"은 우리 민족과 요순시대 때부터 북쪽에 국경을 접해 살아 온 북방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다. "만주"는 청나라 때부터 부른 이름이고, 청나라가 세워진 병자호랸 이전까지는 "여진" 족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북방민족의 지칭이다. 여진족이라고 하면 고려시대의 역사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 만호를 지낸 시절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 강토를 지켜낸 역사를 상기한다면 여진족이 북방 오랑캐족속임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한다.
그런데 그런 똑같은 여진족들이 청나라 대국을 세우고 난 후 “만주”족으로 호칭을 바꾼 이후 그리고 특히 일제가 조선을 집어 삼켜 먹고 만주를 경략하기 위해서 한민족을 만주족과 같은 동족으로 내세우는 만선일체의 역사조작이 이루어진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만주족이라고 부르면 여진족과는 다른 민족이고 우리나라 한민족이 마치 만주족과 동족인냥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켜 오고 말았다.
일제가 대륙 침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만선일체” 즉 (만주+조선)이라는 식민지 역사 조작을 동원했는데 이를 통해서 만주족이 마치 한민족과 동류이고 원류인냥 만주족을 청나라 왕정이 거짓으로 기술해낸 역사책의 의도에 입맞춰 만주족을 미화시켜 왔다. 일제의 만주경략의 목적에 크게 이바지한 역사서 가운데 하나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이었다. 만선일체의 식민지 경략 이념이 짙은 대표작 “조선상고사”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일제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던 시기에 일제하의 신문 조선일보가 1931년 6월 10일부터 103회 연재하였던 책이다.
신채호는 “도둑을 끌어들여 형제를 멸하게 한 자”라며 김춘추를 혹평했고, 연개소문을 높이 평가하면서 김춘추는 대한민국의 국토 경계선을 한층 남쪽으로 낮게 가져왔다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비판했다. 하지만 신채호는 역사적 본질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불교를 도교와 동일시한 큰 잘못을 범했다.[2] 또 신채호의 이런 생각은 북방오랑캐가 조작한 삼국사기의 견해를 답습하고 연장한 사고에 다름아니다. 삼국사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先君盛業 奉而異圖 内潰疑臣 外招強陣 豈爲智也”(삼국사기, 문무왕조), “선왕의 뛰어난 위업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고, 안으로는 의심스러운 신하를 없애고 밖으로는 강한 군대를 불러들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국편위 번역). 무엇보다도 신채호는 문무왕릉비 비문을 제대로 해석조차 해내지 못했고, 한민족의 원류를 규명하는데 크게 실패했다. 신채호의 책은 일제의 만주사관에 경도되었고, 일제의 만주경략에 이용되었고,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봉사했을뿐이다.
읍루와 여진족과 만주족
읍루 발해 거란 말갈 여진 만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청나라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되면서부터 만주 평야를 자신들의 조상의 땅이라고 숭앙하고 그곳에 사람들의 발을 못붙이게 하고 접근 금지시켰다. 청나라가 망해가자 일본이 그 버려진 황무지 만주 평야를 차지하고자 대륙을 진출한 것이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개항하고 산업화를 완성한 후 만주 경략을 본격화하면서 일본인 이주민 이외에 노동력 확보를 위한 조선사람들의 만주 지역 이주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만선일체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민족의 원류는 중국 본토의 비옥한 땅 중원이지 쓸모없는 동토의 땅 동북삼성 만주평야가 아니었다. 한민족의 원류는 동북의 한켠 추운 변방이 아니라 중국 중원을 차지하고 최고의 문명의 꽃을 피운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시대의 아픔에 밀려서 한민족의 찬란한 문명은 파괴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서 일제 그리고 2차대전후 중공과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아시아 패권을 추구하면서 은연중 만주족과 한민족 원류가 동일하다고 주입하면서 몽고 알타이호수를 신비화하는 역사조작이 끊임없이 진행되어왔던 것이다.
한민족과 만주족은 비록 오랜 역사를 통해서 서로 국경을 맞대어 살아온 이웃나라 사람들이긴 하지만 긴 역사를 통해서 대대로 평화와 전쟁의 시기를 함께 가져온 다른 민족임이 분명하다. 만주족이 여진족의 다른 별칭임이 분명한데 여진족이라고 말하면 우리 민족을 괴롭혀온 적이라는 개념이 강한 반면 만주족이라고 말하면 여진족이라는 상대방 적이라는 개념이 다소 무디어지고 희미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지금의 중국은 동북삼성의 소수민족의 구성을 동북공정을 통해서 만주족을 조선족과 구별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동북공정은 일제의 만선일체론과는 반대입장에서 똑같은 맥락을 갖고 있지 않는가?
다시 명칭 구별의 문제로 돌아가서 재확인해 보자. "여진"이라는 북방오랑캐 이름은 고려 시대 즉 송나라 때부터 원나라 명나라 때까지 쓰였던 말이고, 그 이전의 수나라 당나라 시대 때엔 "말갈"족으로 불리웠다. 수당 이전의 남북조 시대엔 "물길"로 지칭됐고, 그 이전의 한나라 땐 "읍루"로 불리웠다. 이 “읍루”라는 북방오랑캐 호칭이 당나라 시대였던 문무대왕의 문무왕릉비 비문에 쓰여져 있다.
이런 읍루, 말갈족이라는 명칭은 한나라 이전 주나라 땐 "숙신"으로 쓰였고, 그 이전의 상고시대 요순시댄엔 "식신"으로 일컬었다.
고려는 후기로 접어들어 몽고족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원나라를 세운 몽고족은 여진족 말갈족과 사촌지간에 해당한다. 몽고족과 만주족과의 관계는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할 때 세운 삼전도의 비문에서 확인된다.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하고 청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들 북방 오랑캐에 대한 호칭을 여진족으로 부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청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청나라의 조공 노예로 살아오기를 300년 동안이나 허덕여오다가, 20세기 들어서도 조선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역으로 일제에게 집어 삼켜 먹히고 말았다.
일제 36년을 겪고 6.25 동란을 겪은 주된 이유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외세 때문이었다. 비록 세계 제국 미국의 우산아래 물질적 번영은 구가하게 되었으나 한편으론 일본과 중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정신적 노예 그리고 무역산업적 노예로 신음해 온 것이 불쌍한 한민족의 현재까지의 상황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고 심히 유감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책에 여러 다른 이름들로 바꾸어 등장한다고 해서 북방 오랑캐들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다. 숙신, 말갈, 물길, 여진. 만주 이러한 북방의 같은 동족들은 그 부르는 호칭이 시대와 왕조의 출현에 따라서 달라졌을 뿐 북방 오랑캐 민족들이라는 역사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이라고 호칭이 달라졌다고해서 북방오랑캐의 본성과 역사의 줄기가 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결코 놓쳐서는 아니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억압의 체제를 유지하는 북방오랑캐들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한 우리나라 한민족에게 크나큰 역사적 고통을 안긴 북방오랑캐들과 다를 바가 결코 없다는 점을 말이다.
숙신, 말갈, 여진, 만주족이라는 중국의 북방오랑캐 민족들은 상고시대 이래로 중국에 밀려서 우리나라 북쪽에 자리를 틀고 우리민족과 서로 접해 살아 왔는데 이들은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질적으로 또 정신문화적으로 크나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혼란한 시대에 틈만 나면 무력을 들고 일어나 우리 조상들에게 받았던 큰 은혜를 져버리고 배은망덕하면서 우리 한민족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친 철천지 원수임에 다름 아니다.[3]
북방 오랑캐들의 역사 조작
1135년 ‘조선일천년래제일대사건’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개경파 김부식 도당이 1145년 삼국사기를 완성하고 역사를 조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고려시대 1200년대, 1500년대 당시의 역사와 관련하여 문서 조작이 쉽게 가능한데 하물며 그보다 한참 오래 전인 서기 600년대의 역사를 조작하기란 훨씬 더 쉬었지 않았겠는가? 일제시대 이후 최근 들어서까지 고조선 역사를 조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북한의 역사 조작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시 오래 전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살펴보자. 한서에서도 곽광과 상호대비시키며 김일제를 투후라며 역사를 바꿔치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런 천벌받을 몹쓸 짓은 천성지금의 왕릉을 도굴하는 것만큼, 카톨릭의 면죄부 장사만큼, 조선말의 양반 족보 편입하기만큼 비일비재한 일이 아니었던가? 고려는 말갈족의 금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몽고족의 원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조선 개국으로 세종의 중흥시대를 낳았고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아 여진족 만주족 청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식민지배 동안 어찌 올바른 역사가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숙신 읍루 말갈 거란 여진 여진 만주 몽고 이들은 각자 지파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종족 개념으로 판단하면 같은 족속에 속한다. 1135년 묘청의 패배 이후 조선 건국까지 257년, 병자호란 이후 일제병탄까지 274년, 이렇게 530년 동안 만주족의 식민지로 전락했는데 그동안 어찌 조선과 신라의 민족혼이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조선 건국과 임진왜란 발발까지 230년 동안 민족 중흥기를 마련했지만 그 이후 만주족과 일제의 식민지로 다시 전락하는 바람에 자주 독립 한반도 한민족 국가는 쓰러지고 말았다. 한민족의 중흥을 이룰 한민족 고유 정신의 부활은 언제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조선1천년래제일대사건
고려는 당나라 신라가 망한 이후 흥성한 이들 흉노족들이 세운 요나라 금나라 몽고의 원나라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우리 민족의 중세 암흑기를 가져온 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 주변국가들이 세운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혈통도 섞이게 되고 문화와 종교가 파괴되고 이중삼중의 폐해를 겪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청나라의 식민지배를 250년 이상 겪다 보니, 민족중흥의 기본 저력이 모두 말살당해,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재전락하면서 삼중사중의 피해를 겪고 말았다. “조선일천년래제일대사건” 묘청의 난이 1136년 진압된 후 고려는 흉노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오백년 이후 목덕 조선 건국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민족 중흥의 역사를 다시 썼지만 임진란으로 다시 쑥대밭이 되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400년 동안 청나라와 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굴욕과 반역의 역사를 당해왔다. 그런데 천도회선 물극필반이라고 했던가? 세상이 다시 돌고 돌아 2천년 전의 역사가 다시 전개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임진란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호란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400년의 식민지를 청산하고 1천년을 지속해 온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게 된다면 2000년 전에 건설했던 찬란한 황금시대를 다시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아 하늘에게 물어보아야 하는가? 2천년 동안 묻혀 있던 역사의 보물이 다시 살아 난다면? 천의인가? 인사인가?
[1] “They soon split up into groups, and whereas some work peacefully together, others violently rebel. The boys’ behavior symbolizes the broader human struggle between the civilizing instinct to obey rules and behave morally and the savage instinct to attain power, ignore moral rules, and act violently.” “그들은 곧 두 무리로 나뉘어져, 한 쪽은 평화롭게 일하고, 다른 쪽은 폭력적으로 반항한다. 소년들의 행동은 규칙을 따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문명화된 본성과, 권력을 얻고 도덕 규칙을 무시하며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야만적인 본능 사이의 보다 광범위한 인간 투쟁을 상징한다.” (윌리엄 골디의 “파리대왕” 소개 다음 아고라 글에서 인용).
[2]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 …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나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은 무슨 사건에 원인하는 것인가. … 나는 한마디 말로 회답하여 말하기를 고려 인종 13년 서경 천도 운동,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다. (중략)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王師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밑줄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3]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인조의 고두배 그 삼전도의 피눈물로 인해서 만주 땅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환향녀"라는 노예의 한맺인 삶을 살았던, 그 역사적 원한이 어찌 그냥 잊혀질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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