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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비 연구-제4권-역사혁명

문무왕 & 당태종 통치철학: 이효치국(以孝治國)

by 문무대왕 2025. 4. 22.

 

문무왕 & 당태종 통치철학: 이효치국(以孝治國)

 

신라 문무왕릉비 비문앞면 제12행 해석

□□□□詩禮之訓姬室拜梓之□□□□□□□□□□□□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국편위 번역: ()와 예()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에 응하여 .…

 

추홍희 해석: (신하들은 항상 바른 길을 걷고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진실대로 간언하여야 하고)[1], 자녀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제후는 부자간의 믿음의 원칙을 지키고 결코 패역을 저지르거나 교만하면 아니된다. 당태종 이세민은 (전쟁에서 희생된 군사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고 국가가 나서서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12不言而信(불언이신)以孝治國(이효치국)-아버지의 엄명은 무엇이었는가?

 

以孝治國(이효치국)

姬室(희실)橋梓之道(교재지도), 移木之言(이목지신)

최초의 왕으로 도교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의 성()이 희()성이다. 주나라 선조 후직(后稷)씨는 황제지후(帝之后), 황제의 희()성이고, 주나라 황실의 성씨도 희()성이니 주나라 왕조를 희주(姬周)라고 부른다. 주나라 문왕 희창(姬昌)姬伯(희백)으로 부르고, 주왕조의 성씨가 희()이니, “朕本姬室(짐본희실원예)이라고 말하면짐은 본래 주나라 황실의 먼 후손이라는 뜻이고, “姬室”(희실)은 주나라 왕조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姬室(희실) 주공단

周公旦(주공단)은 주나라 시조 주문왕(周文王)의 넷째 아들이고 주무왕周武王(BC 1087-BC 1043)의 동생으로 태어나 아버지와 형의 주나라 건국 대업을 보좌했다. 반란을 평정하고 수도를 천도하고, 예악을 마련하여 사방의 인재들을 버선발로 뛰쳐나와 예우하고 교화의 덕정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하자 천하 모두가 귀부해 왔다. 조조의 단가행에서 읊은周公吐哺 天下歸心”(주공토포 천하귀심)이 주공단의 역사적 위치를 핵심적으로 집약 평가해준다. 무측천이 690년에褒德王”(포덕왕)으로 추봉했다.[2]

 

姬室(희실)()橋梓之道(교재지도)

 

“희실(姬室)”은 주나라 왕조를 지칭하는 단어이고, 주공단은 주나라 건국 시기의 최고권력자로서 먼 훗날 공자가 태어나는 공자의 고국 공자의 고향 곡부가 위치한 곳 산동성의 노나라에 자신의 아들 백금을 제후에 봉했다. 주공단은 역사적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서, 姬室(희실)橋梓(교재)()의 세 단어를 조합하면 고사성어伯禽趨”(백금추궤)의 의미를 도출한다. 橋梓(교재)는 부자지간의 마땅히 해야할 도리를 뜻하는 말이다. ()는 무릎 끓고 절을 하는 것 ()의 뜻을 갖는 글자이다. 姬室(희실)橋梓(교재)()의 세 단어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자식은 부모의 뜻을 받들고 이어받는다는 자승부교(子承父敎), 자승부업 (子承父業), 백금추궤(伯禽趨)의 의미를 갖는다.

백금추궤(伯禽趨)는 주공단이 그 아들 백금(伯禽)을 노나라의 제후로 봉하고서 제아무리 최고권력자라고 해도 결코 교만해서는 아니된다는 겸손의 국정철학을 가르친 고사성어이다.[3] 따라서 비문 12행의姬室拜橋梓之▨”(희실배교재지□)의 문구에 대해서 국편위가 번역한주나라는 교재(橋梓)에 경의를 표하였다는 해석은 의미가 전혀 연결조차 되지 않는 엉터리 번역이다. 비문 12행의姬室拜橋梓之▨”제후는 부자간의 가르침과 믿음의 원칙을 지키고 결코 패역을 저지르거나 교만하면 아니된다는 의미이고, 이를 당시의 국정철학 이념으로써 표현하면 以孝治國(이효치국)을 의미한다.

12 □□□詩禮之訓姬室拜橋梓之□ □□□□□□□ 구절 내용은, 以孝治國(이효치국)의 국정철학을 기술하는 내용에 해당한바 그 뜻은, (신하들은 항상 바른 길을 걷고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진실대로 간언하여야 하고), 자녀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제후는 부자간의 믿음의 원칙을 지키고 결코 패역을 저지르거나 교만하면 아니된다.

백금추궤, “周魯伯禽 觀於橋梓 入門而趨 登堂而”(주노백금 관어교재 입문이추 등당이궤) 표현은 상서대전과 문선 등 거의 모든 역사서에서 기재하고 있는 문구이다. 아래의 글은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문단이다.

 

仰俯(앙부)入門而趨登堂而(입문이추등당이궤)

橋梓(교재)의 의미에 대해서 문자해석을 해보자. ()는 고개를 숙이다의 低頭(저두)의 뜻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한다는 측면에서 상대방을 어른으로 모시는 경칭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시경에서의入門而趨 登堂而”(입문이추 등당이궤) 표현의 뜻과 같이, 고귀한 왕족의 신분이지만 말단 청소부터 시작하여 배움의 길에 정진하고 이런 각고의 과정을 통해서 성장발전하고 그리하여 부모의 뜻을 깨닫게 되었을 때-이런 때를 득도했다는 표현을 쓴다- 기쁜 마음으로 부모에게 달려가-(), 제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군신관계처럼 예의를 갖추고 무릎을 끓고서 아뢰는 모습을 상기하라. ()는 무릎 끓고 절을 하는 것 ()의 뜻을 갖는 글자이다. ()()의 상대적인 의미로써 하늘을 위로 쳐다보는 것 앙수(仰首)의 의미 그리고 약봉지를 입에 털어 넣고 먹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상상되듯이 仰藥(앙약)이라는 말은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한다는 의미이다. 주나라가 상나라의 폭정 왕을 토벌하는 정벌을 나설 때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데 만약 전쟁 포로가 되면 자살을 택할 테니 그러면 자식이 관(재목梓木 관 널판을 짜는데 쓰이는 나무) 앞에서 무릎 끓고 슬픔을 거둔다는 전쟁과 포로의 역사를 생각나게 한다. 다리 ()는 원고료의 稿() 글자하고 비슷하니, 아버지는 미리 계획을 하고 그림을 그려 놓으면 그림의 완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해낸다. 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타협 없이 대쪽과 같이 살다가 적국에 결코 굴복하지 않고 죽음마저 선택하면 아들은 그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고자 꼭 살아남아서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고 (전장터에 묘를 써놓고 가로세로의 십자가 나목으로 표시해둔다) 장례를 치르고 (전쟁이 끝난 후에 반장함) 아버지의 유언을 완성해낸다-는 부자지간의 엄명 완수 恪守父命(각수부명)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의 주노공세가에 기재된대로 역사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부모의 엄명을 완수하는 것이 효의 근본이라고 효경은孝莫大于嚴父적고 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사람들이라면 어찌 법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보통의 착한 사람들은 스스로 법을 지키고-“人皆趨令”(인개추령), 따라서 이런 착한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법을 제대로 지킨다면 어찌집집마다 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다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엄명은 무엇이었는가?

교만하지 말라

 

梓木(재목)은 관을 짜는데 사용되는 질이 좋은 나무이다. 요즈음은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주로 심는데 옛날에는 재()-가래나무를 궁전 앞 도로에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고 한다. 굴원과 유신의 시에 재나무가 등장하는데 이런 까닭에재나무가 보이는 곳을 임금이 사는 궁전에 비유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교목은 대들보 써가래라는 우리 목조건축용어에서 보듯이 동량-집의 기둥이 되는 중심적인 목재로 쓰인다. 橋木(교목)은 한자 뜻으로 보면 교량목이다.[4] 지구의 경위는 직물을 짜듯이 가로 세로로 엮어 있는데, 교목은 다리를 놓는 가로대 벌판-다리의 횡목 빔(beam)을 이르고, ()목은 세로대 즉 기둥받침을 이른다. 사다리를 만들 때 종적과 횡적으로 널판과 버팀목이 필요하다. 가로대와 세로대의 서로 이음매 없이 다리나 사다리를 만들 수 없다. 사람의 일 또한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고 단언한 법치주의의 대가 상앙의 말을 기억하라.

이와 같은 비유법에 따라서 부모는 횡목 널판대 가로대요, 자식은 그것을 떠받치는 기둥 세로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종적이면 자식은 형제지간으로 나란히 양쪽으로 퍼져나가는 횡적 팽창적 존재이다. 사람이 갈비뼈로 태어나고, 또 어머니의옆구리에서 태어난다는 말의 뜻은의 특성적 모습에 기인한다.

()는 왕연수의 노영광전부에 나오는旁夭以橫出에서의 (요교)의 의미를 갖는 말이다. (교는) 절지동물 누에곤충을 지칭하는데, 박물관의 공룡의 뼈 구조물이 보여주듯, 절지동물 뱀과 악어의 배의 모습이 그러하듯, ()의 모습을 이른다. 이런 절지동물의 뱃가죽이 보여주듯이 옆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오늘날에는 칸막이가 수없이 이어지면서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고 기차가 다니는 사다리 모양 철로가 그것이다. 기차가 터널 속을 들어갔다 터널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높은 산에 가서 보면 장관인데 그렇게 옆으로 나오는 모습을 교라는 글자로 쓴다. 도교에서 최고의 민족 신으로 추앙받는 황제(黃帝)의 장지가 교산(橋山)에 위치한다. 다리가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터널 속을 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기에 교산(橋山)이라고 부르고, 최고의 장지 길지 최고의 명당 자리로 알려져 있다. 요즈음의 토목 공학에서 최고의 예술이 다리 건축 아닌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는 굽은 것을 바르게 펴는 교정하다, 匡正(광정)하다 뜻의 ()와 통하는 글자이다. ()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時矯首而遐觀”(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의 구절에서의 의미와 같이 교수(矯首)는 앙수(仰首)와 같은 뜻으로 높이 쳐다본다는 뜻이다. 다리 구조를 알다시피, 교목은 높은 곳으로 쳐다보는 ()이요, 재목은 빔, 위에서 아래로 굽어 보는 ()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仰俯(앙부)는 음양 자웅암수 오목볼록 요철(凹凸)하고 같은 개념이다. 세상 만물은 홀로 선 것이 아니라 짝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다리가 그렇듯이 집을 지을 때 가로대와 세로대가 서로 요철로 맞물려 하나가 되듯이 말이다.

 

詩禮之訓 시례지훈

 

詩禮之訓(시례지훈)의 의미는 논어에 출전한다. 공자 같은 대성인도 자기 자식을 가르칠 때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취급하지 않고 똑같이 공평무사하게 대했다. 공자가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어떤 특별과외-논어에는특이한 가르침이라는 뜻의異聞”(이문)으로 적었다-를 시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논어에서 분명히 말했다: “孔子之敎其子無異於門人”, (공자지교기자무이어문인), 공자께서 아들을 가르침에 다른 제자들과 다름이 전혀 없었다. 교육은 평등해야 한다. 배움의 기회를 다같이 부여하는 기회의 균등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을 똑같이 대우하고 길러내는 평등의 교육관이 중요하다. 국민평등교육이 실현되려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가르치는 교육자의 公平無私(공평무사)함을 요구한다. 공자같은 대성현도 자기자식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공부시키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시경과 예기를 배우게 했다는 뜻에서 시례지훈이라는 말은子承父”(자승부교)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공자는 교육자이었으니 공자와 그의 아들인 백어를 두고서 자승부교라는 말이 적합할테지만 다른 일반 사람들은 자식이 부친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자승부업(子承父業)을 쓴다. 봉건시대 왕권에 비유한다면 문무왕이 부친인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는 것, 嗣君(사군)을 의미한다.

 

자승부교

봉건시대에서는 대부분 부친의 직업을 자식이 계승했으니 직업을 배제하고 가정교육측면에서 보면, 子承父(자승부교)는 자식은 부모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따른다는 준승부모교회(遵承父母)의 뜻이다. 시례지훈의 의미에 대해서 그 출전인 논어 계씨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陳亢問於伯魚曰 子亦有異聞乎 對曰 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詩乎 對曰 未也 不學詩無以言 鯉退而學詩 他日又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禮乎 對曰 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 聞斯二者 陳亢退而喜曰 問一得三 聞詩聞禮 又聞君子之遠其子也 진항이 백어에게 물었다. 스승께 특별한 가르침이라도 들었는가? 백어가 대답했다. 없다. 한번은 스승께서 당상에 홀로 서 계실 때 내가 총총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는데, 시경(詩經)을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시경을 배우지 않으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했다. 나는 되돌아가 곧장 시경(詩經 시문학)을 배웠다. 또 어떤 다른 날 그 때처럼 뜰 앞을 바삐 지나치는데 스승이 禮記예기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예기를 배우지 않으면 바로 설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돌아와 곧장 예기禮記를 배웠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들었다. 진항이 물러 나와 기뻐하면서 말했다. 하나를 물었는데 셋을 깨우쳤다. 시경에 대해서 알고 예기법에 대해 알았으며 또 군자가 그 자식을 편애하지 않음 그것이었다.

 

시례지훈 설명 구절에 나오는 趨而過庭(추이과정)은 교재지교의 구절에 나오는入門而趨 登堂而”(입문이추등당이궤)의 구절의 의미와 같다. ()는 종종걸음으로 걷다는 뜻으로 배우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실천한다는 뜻이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면 무언가를 주저한다는 의미인데 부모자식간에는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없으며 무언가를 배우고 깨우치면 즉시 실행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래서 학교를 갈 때는 즐겁게 빨리 가서 배우고 수업이 끝나면 그 배운 것을 부모에게 직접 말씀드리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손살같이 뛰어서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달려오지 않았는가?

 

伯禽趨跪(백금추궤)와 교재지도

 

유향의 說苑(설원) 건본(建本)편에 시경에서 언급한 伯禽趨跪(백금추궤)의 의미를 설명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왜 그렇게 엄히 다스리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하자 상자(후에 진시황의 진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끈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앙이 저술한 商君書商子라고도 부른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5]  

주공단의 장자 백금은 상자를 스승으로 삼고 공부에 일로 매진한다. 상자는 백금에게 부자지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교재지교의 비유로써 설명했다.

 

商子曰 「二子盍相與觀乎南山之陽有木焉 名曰橋」 二子者往觀乎南山之陽 見橋竦焉實而仰 反以告乎商子 商子曰 「橋者父道也」 商子曰「二子盍相與觀乎南山之陰 有木焉 名曰梓」 二子者往觀乎南山之陰 見梓勃焉實而俯 反以告商子 商子曰 「梓者 子道也」 二子者明日見乎周公 入門而趨 登堂而跪 周公拂其首 勞而食之曰 「安見君子」 二子對曰 「見商子」 周公曰 「君子哉 商子也」 두 사람[6]은 남산의 북쪽에 가서 거기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고 오라. 그 나무이름은 교()라고 부른다.” 두 사람은 시키는 말대로 남산 북쪽에 자라는 나무를 살펴 보니, 교목이 실로 하늘 높이 꼿꼿하게 솟구쳐 서 있었다. (그 꼿꼿한 자세에 두려움이 느낄 정도였다). 돌아와 상자에게 보고 느낀 바를 보고하자 상자가 답을 말했다, “교목(橋木)은 아버지의 가는 길 그 부도(父道)를 말해준다.  그러면 이제 두 사람은 남산의 남쪽을 가서 거기에 자라는 재()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를 보고 오라. 학생 두 사람은 지시대로, 파도치듯 왕성하게 자라고 있는 재목(梓木)을 관찰해보니, 땅에 엎드린 모습 굴복의 자세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돌아와 선생 상자께 보고하니, 선생은 말했다: “재목(梓木)은 자식이 취해야 할 예의를 말해준다”. 이만하면 교육과정을 마쳤다고 여겨진 두 학생은 다음날로 주공단을 알현할 수 있었다. 아들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총총걸음으로 마루에 올라 엄부자모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주공단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배움의 노고를 치하하고 후한 음식을 내주며 말을 건넸다. “선생은 누구였던고?”  소개받은대로 상군 밑에서 배웠습니다.” “상군서[7]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책이로구나!”

 

관자의 교육 이론

 

詩禮之訓 姬室拜橋梓之

비문의 이 구절은 경제적 기초 관계를 형성하는 嫡親(적친)姬室(희실) 사이의 집안 가정 교육 문제를 거론하는 내용이다. 당태종의 제범 서문에 나오는汝以幼年 偏鍾慈愛 義方多闕 庭訓有乖구절에서의 庭訓(정훈) 즉 가정교육에 대해서 그 의미를 기술하고 있다. 詩禮之訓(시례지훈), 橋梓之敎(교재지교) 이 구절에 의거하여 앞뒤 문맥상 의미를 연결해 본다면, 이 부분은 교육에 대한 정책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추가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君臣守義序之德

嫡親振詩禮之訓

姬室拜橋梓之敎

인간 사회는 육친화목하고 이사엄부의 교육을 통해서 후세를 이끄는데, 신라의 교육 국정 철학이 시례지훈과 교재지교의 불언지교의 교육 철학을 택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상서대전에 나오는 교재지도의 의미를 보자. 숲 속에 가면 큰 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나무도 함께 자라난다. 숲 속에는 교목이 있는가 하면 재목도 있는 것처럼 사람은 능력은 각자 다르지만 모두 쓸모가 있는 존재이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하는 것을 쳐다보고 배우며, 윗사람은 올라오는 아랫사람을 굽어 보며 가르치고 배우며 지도하고 학습하는 교육 방법, 중세 시대로 말하면 도제 교육 방법론인 것이다.

 

不言之敎

현대 경제학의 태두로 알려진 아담 스미스의 자본주의 사상, 실용주의의 사상을 스미스보다 2천년 전 이전에 국정에 반영하고 실천해서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던 관자의 교육철학과 정책이 불언지교 즉 자신이 직접 행동으로 몸소 모범을 보여서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차려서 변화시키는 교화의 교육실천 철학이다. 도교의 중심철학자 한 사람인 관자의 교육 철학과 교육정책의 근저가 불언지교이다. 불언지교의 교육이념은 노자 도덕경 제2장과 제43장에도 분명히 제시되어 있는 개념이다. 노자도덕경 제2장의 말씀 중 불언지교의 구절을 보자. “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성인은 의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써 가르친다. 영어로 lead by example의 교육방법론이다. 사람은 모방의 귀재이기에 남이 따라하기 쉽도록 자신이 직접 나서서 쉽게 가르칠 때 학생도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과 우주만물은 말없이 잘 돌아가고 발전한다.[8]

노자도덕경 제43장 중의 구절不言之敎天下希及之” (불언지교 천하희급지), 말 대신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고 가르치는 불언지교로써 세상사람들 모두가 바라고 소망하고 희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불언지교를 영어로 번역하면, the benefit of leading by example instead of preaching by speech이 되겠다. 또 노자도덕경 제10장의 구절로 반복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자. “生之畜之 生而不有 長而不宰”. 아무리 자신은 연장자이고 어른이고 지위가 높고 반면 상대방이 하인이나 첩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 말로 타일러서 스스로 깨닫게 해야지, 결코 윽박지르거나 지배하려거나 군림하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상대방을 잘 되도록 도와주고 길러주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연장자라고 해도 지배군림하지 않는다. 분명히 부모가 자식을 낳지만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부유별이라 하는데 부부관계는 평등한 계약관계이지, 힘 센 장부라고 해서 또 연약한 아녀자라고 해서 힘으로 제압하려거나 지배하고 복종시키려는 태도는 결코 옳지 않다. 군신간에는 의리가 개입되는 윤리와 질서의 관계가 작동된다. 이와 같이 不言之敎(불언지교)는 교육자가 피교육자 학생들에게 직접 모범을 보임으로써 교육생들이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는 교육철학을 함의한다. 시례지훈, 교재지교, 의방지덕 이런 말들은 불언지교의 교육방법론에 속한다. 건릉 술성기에 나오는刑不怒而威 不言而信의 표현 또한 불언지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불언지교를 정치에 적용하면, ‘서로 다투지 않는다는 국정 철학을 의미한다. 노자 도덕경 제73장 구절의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然而善謀 (천지도 부쟁이선승 불언이선응 불소이자래 산연이선모) 구절의 의미가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하늘의 도는 발버둥치거나 다투지 않아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반응하며,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며, 유유자적 만만(漫漫)한 것 같지만 계획대로 잘 돌아간다.[9]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된 인간이고 또 그러기에 선하고 착한 본성을 갖고 있다. 사람의 자율성의 가치를 믿는다면, 사람의 선한 본성을 발현하게끔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모른다고 해서 또 자기보다 못한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윽박지른다거나 강요하려 들지 않고 대신 윗사람이 행동으로 직접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들은 스스로 알아 깨우친다. 그러니 굳이 무엇을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이와같이 사람은 타율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해 주고 끌어주는 방법론이 더욱 효과적이다. 노자 도덕경 제48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 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구절이 그 이치를 말해준다. 새로운 지식을 배울수록 매일 할 일이 많아지는 반면, 도를 행하면 날마다 할 일이 줄어든다,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마침내 더 이상 시도할 일이 없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일부러 하는 일도 없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 자체가 없게 된다, 천하를 차지할 때도 억지로 해야 될 일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억지로 시켜서 일을 하게 되면 천하를 얻기에는 부족하다.[10] 결론을 따오면, 정치의 장에서도以德政感化人民”(덕정감화인민) 즉 상대방을 덕으로써 감화시켜 변화시키는 방법이 보다 옳다.

 

橋梓之敎 교재지교

 

교육방법론으로써 아이들에게 매질을 해도 좋다는 엄한 체벌 허용론이 근자까지 통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부자지간 골육지간에도 교육은 자승부교(子承父敎)라고 하여,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와 사랑으로써 가르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이어 받는 것을 교육론의 기초로 삼았다. 매질은 타율적인 방법인데, 한 순간 반짝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나 계속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근본적인 처방으로써 기능하기 어렵다. 도교의 교육철학을 국정에 반영하고 실천했던 사람이 관자인데 관자는 우리들에게 관포지교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관중을 지칭한다. 관중은 교육방법론으로 德刑相補(덕형상보)의 가치를 내세웠는데, 그 근본은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며 사랑으로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스스로 깨우치고 배우는 자율의 교육철학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였다. 덕화를 기본으로 삼지만 법을 어긴 자는 엄격히 처벌하여 그 죄를 경계하였다. 사람은 공과가 함께 하는 부족한 인간이므로 功過相補(공과상보)의 이치를 적용하는 것이 옳다. 잘못에 눈감기보다 잘못을 깨우치고 새로운 발전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발전하는 존재이므로 풍상을 겪으며 큰 인물로 자라난다. 모든 초목은 바람을 맞고 찬이슬을 맞으며 자라나지 않는가? 자연의 이치이지 않는가? 南齊書(남제서) 최조사전에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論儒者以德化爲本 談法者以刻削治世之粱肉 刑憲亂世之藥石 故以化比雨露 名法方風霜”.[11]

 

嫡親(적친)과 희실(姬室), 종실과 종친(宗親)의 의미

 

姬室(희실)의 의미를 말할 때, () 글자가 첩을 이르는 뜻이 있다고 해서 첩관계를 지칭하는 비칭으로 쓰인 말이 아니다. ()는 여자를 좋게 부르는 미칭이다. 강희자전 옥편에 자를 찾아보면 고문은 ()의 글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희실(姬室)이란 단어는 고대 모계 사회의 남녀상배 여와 전통이 남아 있음을 말해준다. ()偏房(편방), ()의 뜻을 갖는 말로써 첩실(妾室), 소실(小室), 측실(側室), 방실(房室), 별가(別家)와 비슷한 말이다. 우리말로 작은집 즉 방계혈족에 해당한다. 측실이란四方是則즉 횡적으로 동등하게 퍼져나가는 관계를 갖고 있다. 첩의 제도가 일본에서 법적으로 폐지된 시기는 1912년에 이르서였다. 한국은 보릿고개 지배당하던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 1960년대까지 비공식적으로 성행했었다. 하지만 직계와 방계의 법적 경제적 이유를 정확하고 심도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嫡親(적친)姬室(희실) 이 두 글자는 모두 여자 변이 있는데 그 뜻을 보라. 고대는 모계사회였기 때문에 여자가 집안 살림을 담당했고, 여자가 후사를 이었고, 여자가 광의 키를 쥐고 일가를 이끌며 중요한 집안 역할을 담당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혼자서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듯이, 사람이 큰 일을 이룩하고자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남녀상배와 여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와같이 희실(姬室)이란 단어는 親屬(친속)의 개념을 말해준다. 같은 일가, 같은 겨레를 일컫는 親屬(친속) 또는 친족(親族)이란 개념은 嫡親(적친)姬室(희실)로 나눠지는데 적친은 직접적인 친자(親子)관계에 있는 직계(嫡親血), 희실은 방계혈족(傍系血族)의 의미를 갖는다. 직계 가족은 종적인 의미, 방계는 횡적인 개념이다. 동엽봉제(桐葉封弟)의 고사성어가 말해주는대로 진나라의 통치질서가 그러했듯이, 당태종이 종실에게 분봉하고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듯이, 직계(直系) 방계(傍系)는 돈독한 우애 관계를 기초로 함께 번창하는 인간사회의 발전의 기초관계를 말해준다. 직계와 방계의 구분은 호적법에 따르면 그 실익이 존재한다.

 

일가친족의 경제적 이유

親屬(친속)을 뜻하는 嫡親(적친)은 핏줄 혈연으로 연결된 혈연적 기초를 필요로 하는 부자지간을 이른다. 하지만 꼭 핏줄과 혈연에 한정된 부자지간의 관계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고대사회에서 일가친척은 경제적 단위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적친은 종실이요, 희실은 방계 종실 일가에 해당된다. 희실(姬室)은 핏줄 혈연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 부부관계처럼 계약으로 연결된 사람 사이를 포함한다. 세상 만물은 베틀로 직물 찌듯이 경위-가로와 세로-로 연결되어 만들어진다. 지구가 경도와 위도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천구와 천망 또한 그러하고, 인간 사회의 질서 또한 그런 규칙이 작동한다. 고대에는 집안 즉 일가의 구성 범위는 혈연적 기초에서만 성립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기초와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도 성립되었다. 황족의 종실(宗室) 개념을 보라. ()집안을 말하는데 주로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 경제적 단위를 구성하는 개념이었다.

주나라 주왕조를 周室(주실)이라고 표현하는데, 좌전에서도 周室 적었고, 당두보의 싯구절에도 周室(주실)로 표현했다. 五侯九伯 女實征之 以夾輔 周室 (左傳); 身退卑 周室 經傳拱 漢皇 (杜甫, 冬日洛城謁玄元皇帝廟). 왕연수의 영광전부에서 한나라 왕실을 漢室(한실)로 표현했다: 瑞我漢室 永不朽兮(서아한실 영불후혜), ‘상서로운 우리 한나라 황실이여, 영원무궁토록 존속하리라’.

요즈음은 宗家(종가)의 개념이 장자 큰 아들에게만으로 한정되는 개념이지만 고대에는 동족(同族)의 개념으로 쓰였다. 종친(宗親)의 개념도 지금은 범위가 협소해졌지만 과거에는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는 모두 종친에 속했다. 고대사회는 모계사회가 그 바탕이었음을 상기하라. 유태인은 지금까지도 모계사회의 동족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시민권자가 되려면 어머니가 유태인의 혈통임을 증명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유태인의 혈통을 입증해 준다. 사실 씨를 검사하는 유전자검사 방법이 쓰여지는 때는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서야 적용되는 방법이 아닌가? 그리고 씨를 기준으로 하면 조선후기 들어 청나라 식민지배로 전락하면서 청나라 지배층에 연계된 김씨성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사례가 보여주듯이 남의 자식이라도 호적에만 올리면 자기자식이 되어 경제적 기초가 무너질 위험성이 크므로 (분배할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자식이 불순간 급증하게 되면 잘게 쪼개기를 해야 되고 그리하여 한계효용의 경제학 법칙에 의해서 산업생산력이 저하된다), 유태인 여부를 어머니의 혈통에 따르는 유태인 방법이 보다 합리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 동족이라는 개념이 고대사회에선 꼭 혈연적 기초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방에게 패해 자살한 서초패왕 항우가 자살하였지만 유방은 항우의 집안을 유방의 유씨 황족으로 편입하고 예우하였다. 항우 본인은 비극적 최후를 마쳤지만 항우는 죽어서 그의 집안을 황족으로 살린 자기 희생이 아니었던가? ‘꼭 자식에게만 의존하지 말라는 노자의 가르침이 있었고, 요순우 시대의 황금시대에는 왕위를 자신의 핏줄인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대신 선양의 제도를 통해서 왕위를 물려 받을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을 골라서 미리 시험을 해보고 그런 연후에야 왕위를 그에게 물려 주었다. 왕의 자격이 되는지 여부를 사전에 테스트해 보고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왕위를 물려 받았으니 황금시대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천도무친 상여선인이라는 노자의 말씀을 사마천의 웅변으로 다시 한번 상기해 보라. 노자의 사고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온지구상에 퍼져나갔듯이, 횡적 팽창 개념이지, 협소한 종적 구속의 개념이 아니다.

 

계약 사회

한국 사회의 기초는 계에 있다. 각종의 계모임을 보라. 문중계는 물론이요 저축하고 적금들고 하는 계모임, 동기동창 계모임뿐만 아니라 봄가을 상춘과 만추를 만끽하고자 놀러가는 계모임까지 실로 각종 다양한 계모임이 있다. 신라 사회의 기초는 계약에 있었다. “라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하백이 강을 건널 때의 개구리 신화 그 개구리와 전갈의 우화는 아담 스미스가 인간사회를 서로 바게인(bargain)하는 계약관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서로 타협하는 계약 관계로 규정한 것의 정치 도덕 철학의 기초를 말해 준다. 민의를 존중하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정치철학으로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던 관중의 정치 사상이 바로 계약관계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 건설이었다. 이런 계약 관계에 기초한 나라가 바로 상나라가 아니던가? 상나라가 바로 조선이요 신라이요 바로 한반도를 지상낙원으로 건설했던 우리의 선조들이다. 공자가 극구 칭찬했던 기자, 유가들이 받드는 기자 조선의 실체 또한 기자는 상나라가 망할 때 상나라의 반체제 인사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설 때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으니 기자 자신은 상나라 사람이었다. 조선은 동이족 상나라가 해외 진출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세상 만물은 베틀로 직물 찌듯이 경위-가로와 세로로 연결되어 만들어진다. 지구가 경도와 위도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천구 천망 또한 그러하고, 인간 사회의 질서 또한 그런 규칙이 작동한다. 사회계약의 기초를 서양의 존 로크 등의 서양 사상가들이 기초한 것으로 한정하는 정치경제학의 이론은 한쪽만 보고 다룬 것에 불과하다. 관중의 民富論(민부론)國富論(국부론)의 정치경제 철학을 참조하라.

 

어떻게 부강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송나라 왕안석의 상앙의 시를 보면 국가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기를 치지 않는 것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이미 아담 스미스가 밝혀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법집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상앙이었다. 진시황제가 태어나기 약 1백년 전에 상앙은개간령[12] 법률을 제정하여 전답을 개척하고 국부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새로운 법의 효과에 대해서 국민들은 의구심이 컸다. 황금을 캐려고 하면 실제로 황금이 발견되어야 한다.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만 나면 사람들은 누가 가지 말라고 해도 서로 가려고 난리가 난다. 사람의 동기는 누가 어떻게 부여하는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그것은 오로지 국민에게 달려 있다. 전쟁의 승리도 전쟁계획과 전략은 장수가 책임지고 마련하지만 실제 전투장에서의 승리는 그 명령에 따르는 사졸들에게 달려 있다. 캘리포니아 1849년 금광 발견의 소문을 듣고 일확천금을 노린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 들어 미국의 발전은 하루 아침에 도약했다.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고서 무상노동으로 국부를 창조할 수 있는가? 범죄자들을 한데 몰아서 천리장성을 쌓아본들 무슨 소용인가?

왕안석과 상앙

自古驅民在信誠
一言爲重百金輕
今人未可非商鞅
商鞅能令政必行
(자고구민재신성
일언위중백금경
금인미가비상앙
상앙능령정필행)
옛부터 국민을 움직이는 근본은 진실로 믿음을 지켜내는데 있었다.
말 한마디는 천금의 가치보다 더 크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상앙을 비난할 수 있을텐가?
상앙은 법률과 정책을 새로 제정하면 엄정하게 집행하였으니.
(
왕안석, “상앙”)

 

땅을 백날 파보니 동전 하나 나오지 않는데 그저 농민들에게 땅을 일구라고 명령을 내려본들 그것이 먹힐 리가 없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땅을 개척할 수 있을까?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을 지급하지 않으면 아무도 쳐다보질 않을 것이다. 맨 처음 맨땅을 일굴 때 어떻게 사기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할 수 있을까? 곽언과 상앙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고 새로운 정책을 펼 때 고민하던 지점이 이것이었다. 금광개발도 마찬가지이다. 금광 발견은 소수의 탐험가 모험가 자본투자가들이 리스크-테이킹을 하고 투자를 감행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는 산업이다. 무역도 마찬가지이고, 새로운 부의 창출에는 먼저 투자가 필요하고, 투자는 신용에 달려 있다. 정주영회장이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지을 때 한국은행 종이 화폐 속의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그림으로 공장 설립 자금 대출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일화가 말해주듯이 상업도 농업도 광업도 축산업도 어업도 그 성공의 기초는 신용, 믿음에 달려 있다. “疑行無成 疑事無功” (상앙). No Risk No Return. 유명한 히브리서의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 어찌 믿음없이 새로운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겠는가?[13] 不言之信(불언지신). 사람은 누구나 황금사과를 따먹을 황금의 기회 (golden opportunity)를 갖는다.[14]

상군서, 국정 개혁의 요체-어떻게 성공할 것인가?[15]

국정 최고 책임자의 성공 조건

 

臣聞之 疑行無成 疑事無功 君亟定變法之慮 殆無顧天下之議之也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거사에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사람은 어떠한 공훈도 얻지 못한다.  새로운 법을 신속하게 제정하는 결단을 내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판 여론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負於世 有獨知之慮者 必見訾於民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할 수 있고, 독자적인 지식체계로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語曰 愚者闇於成事 知者見於未萌民不可與慮始 而可與樂成 우둔한 사람은 일을 끝내놓고도 그것에 대한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싹이 트기도 전에 그 사유를 먼저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세상 사람들과 의논을 나누기 보다 일을 먼저 성취해 놓고 그 기쁨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보다 낫다.
郭偃之法曰 論至德者 不和於俗 成大功者 不謀於衆[16] 경제개혁정책에 성공한 곽언은 말했다: 최고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대단한 사람은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法者 所以愛民也禮者 所以便事也 법은 국민을 어여삐 여기고 아끼기 때문에 나온 것이며,[17] 관행이란 매사를 잘 돌아가기 위한 도구와 수단이다.
是以聖人苟可以 不法其故 苟可以利民 不循其禮 따라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기존의 법규에 속박될 필요가 없고, 국민을 이롭게 하려면 기존의 관행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大唐太宗文武聖皇帝 대당태종문무성황제

진자앙의 唐故朝議大夫梓州長史楊府君碑銘 비명에太宗文武聖皇帝初臨天下 物色幽人 焚山榜道 綱羅遺逸구절이 나타난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598-649)은 당나라 제2대 황제였다.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이 大野氏(대야씨)인데 대야란 곳은 양산이니 천자의 사냥터를 말한다. 유방이 한신을 운몽의 사냥터로 유인하여 죽음을 안겼듯이 예로부터 사냥터는 대권을 결정하는 승부의 결전장이었다. 수렵이란 전쟁에 다름 아니었고 천자의 사냥터를 지키는 것은 천자를 지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사냥은 활과 화살로 하고 활과 화살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대야씨가 사냥터를 지키는 집안 족속이라면 와신상담의 명수 월나라 구천 또한 같은 사냥터를 지키는 추오족이었으니 이들은 거슬려 올라가면 같은 동족이 된다. ()나라의 이름 그 자체가 말해주듯 사냥터를 지키는 족속이므로 추오족 대야씨하고 같은 동족이다. 이들 족속들은 종교적 의미에서 모두 사냥터 수렵 나무와 새로 연결되고 역사적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동엽봉제의 고사성어 의미에 대해서 이 책의 앞쪽 설명을 참조하라. 木德治世(목덕치세). 오월나라 양나라 당나라 신라는 제곡고신씨를 시조로 하는 조상이 모두 목덕치세로 같이 연결되는 동족의 혈연적 관계가 깊다. 당태종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한대의 교훈을 주는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문무왕의 역사 기록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은 오천년 한국사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 같은 거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헤게모니 체제 사회에서 진실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이중삼중의 철책이 처져 있고, 또 기존의 학설이 편견과 선입관으로 워낙 공고하게 다져 있고, 국정 교과서에 실려 있어 어린 시절 학교와 자유 탐구의 대학 교과서와 학계의 연구서까지 그리고 해외의 모든 책에서도 한국사신론이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무비판적으로 액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진실추구의 척박한 환경을 감안하면 그렇다. 사실 당태종과 문무왕 유조문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문은 문무왕릉 비문 구절을 조금만 살펴보면 즉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문무왕릉 비문 문장이 많이 떨어져 나가 없어졌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비문 파편 속에 남아 있는 부분에 ”□
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구절이 분명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당태종에 관한 명문은 문무왕릉 비문 앞면 12행에 등장한다. 그런데 왜 여지껏 어느 누구도 삼국사기 문무왕릉 유조문과 문무왕릉 비문과 당태종 유조문 내용에 관한 상호연관성에 관한 의문을 품거나 조사 탐구하거나 해제 해결해내지 못하였을까? 우리들에게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관자의 교육론을 유추해보면,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장기적 안목과 전략적 가치적 개념임을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들의 기존의 교육의 내용과 그 방법론에서 큰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 심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문무왕릉 비문 12행에 적혀 있는 ”□詩禮之訓姬室拜梓之□”의 내용을 우리들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그것을 계승발전하였다면 어찌 이민족이 가한 억압적 진실 파괴의 식민지 지배로 전락하여 신음했겠으며, 어찌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 한 두 명에 이르겠는가? 본성이 착하고 생각이 창의적이고 자신을 절제하고 타인을 위해 용기를 발휘하는 그런 위대한 선조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인데 어찌하여 이민족의 침략을 받고 중세의 암흑 세상을 겪고 헤매이다 결국 발전된 세상을 이끌어 내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의문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고, 이제서라도 민족 중흥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천하에 다시 묻고 싶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역사 조작의 폐해

 

삼국사기의 문무왕 기사에서 문무대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유조문 전문의 전체 글자수는 350자이다. 이 중에서 238여 글자의 내용이 거의 전부 당태종 유조문을 그대로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맨처음으로 밝혀냈다.

또 삼국사기가 기술한 유조문 가운데 경계문 구절인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32 글자의 내용은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 책으로 완성하여 태자에게 남겼던帝範”(제범)의 유훈 속에 들어 있는 내용임을 저자는 새롭게 밝혀냈다.

또 유조문의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 12 글자의 문장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구절을 도용한 표절임을 밝혀낸다. 삼국사기의율령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는 의미의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의 12 글자 부분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律令格式 或有不便於事者 宜依前敕修改 務當政要 구절을 도용한 표현임을 밝혀낸다.

또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 전문 350 글자 가운데, 55글자의 만가시 표현 구절: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의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는 이 구절 부분은 위진남북조 시대 장재의 七哀詩(칠애시)를 차용한 표현임을 밝혀냄과 아울러 이 부분의 45 글자는 문장 구성 형식상 고려가 북방민족의 국가에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시대 후기 즉 송원대에 유행했던구구소한도의 형식으로 표현한 사실임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과 분석에 따라, 삼국사기 문무왕의 유조문 중 문무왕의 장례식 관련 부분인 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구절의 13 글자 부분, 그리고 만가 애도시 부분인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구절의 55글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은 당태종 유조문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밝혀낸 것이다.

위의 짤막한 요약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의 전체 350개 글자수 가운데 305여 글자가 문무왕릉비 비문원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쓰여 있다는 것, 또 그것은 다른 글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한 표절의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저자는 밝혀냈다. 이에 저자는 삼국사기의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한 역사 조작의 경악할만한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당태종 유조문을 번역 설명함과 동시에 국편위의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 해석에 있어서 잘못된 오류들을 지적하고서 잘못을 바로잡는 정확한 해석문을 제시하여 묻혀진 역사의 진실을 캐내고 잘못된 역사 교과서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한다.

 

 



[1] ( 存乳臭 反己正身 以順天常 雕琢切磋 敬佩弦韋 六位三親)▨▨▨▨▨( 君臣守義方之德 嫡親振)詩禮之訓 姬室拜梓之敎▨▨▨▨▨▨▨▨▨▨▨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2] 주공단의 역사적 평가 요약, “生於周室 輔佐父兄, 周公吐哺 東征平叛, 制禮作樂 化四方, 誨后嗣,千古流芳”.

[3] 사마천, 사기, 주노공세가, 백금, 伯禽即位之後 有管 蔡等反也 淮夷 徐戎亦興反 於是伯禽率師伐之於 曰 陳爾甲胄 無敢不善 無敢傷 馬牛其風 臣妾逋逃 勿敢越逐 敬復之 無敢寇攘 踰墻垣 魯人三郊三隧 峙爾芻 糗糧 楨榦 無敢不逮 我甲戌筑而征徐戎 無敢不及 有大刑 作此 遂平徐戎 定魯.

[4] () 다리는 발판을 의미하므로 희생의 가치가 들어 있다.  아버지가 어린 아이를 자기 어깨 위에 무등을 태워주는 경우가 흔히 보이는데 아이는 그 어깨 위에 무등을 타면 무척 즐거워한다.  거인의 어깨 위로 넘어다보며 배운 지식과 무등을 타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의 지혜를 발견한 인류의 지식 전승 전통을 표현한 뉴튼의 비유를 기억하라.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실재그와 같은데 어찌 부모의 희생없이 자식의 삶이 있으리오?  "Great achievement is usually born of great sacrifice, and never the result of selfishness." (Napoleon Hill). 

[5] 상앙, 상군서, 更法편 서두에 慮世事之變 討正法之本 求使民之道구절이 나오는데, “세상사는 부침이 있고 그렇게 변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법을 바로 세우고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 수 있을까의 방법론즉 국토를 개척하고 나라를 부강 발전시킬 법률개혁과 그 성공 방법을 논한 책이 상군서이다.

[6] 왜 두 사람인가? 태종도 당고종도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통일을 완성해냈다. 문무왕 또한 아버지의 엄명을 실천하여 삼국의 통일 과업을 성취해냈다. 집을 짓거나 다리 놓는 토목건축물은 혼자서는 올릴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사람은 홀로 선 단독자가 아니다. 전쟁도 상대방이 있는 법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공간적 존재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재에서도, 물리학 철학 정치학의 대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이어가는 존재이고, 서로 주고받는 상부상조의 존재이다. 무엇보다 배움의 과정은 학교에 가서 여러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 “삼인행 필유아사”. 법조인은 고독한 절간에서 혼자 고시법전 외우는 과정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큰 일을 성취하려면 누군가하고 함께 일을 도모해야 한다. -워크를 필요로 한다. 여씨춘추 孝行覽 本味에 나오는 구절: “不謀而親 不約而信 相爲智竭力 犯危行苦 志懽樂之 此功名所以大成也 固不獨” (불모이친 불약이신 상위탄지갈력 범위행고 지환락지 차공명소이대성야 고부독), ‘굳이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 전에도 서로 마음 속으로 통하고, 굳이 문서를 만들어 꼭 도장을 찍지 않아도 서로 신뢰한다. 서로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고 있는 힘을 다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괴로움도 참아가면서,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크게 날리는 까닦이 된다. 진실로 혼자서는 공을 이룰 수 없다.’

Man is by nature a political and social animal.”-(토마스 아퀴나스, 인간은 본래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타고난 순간 사회적 존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한대로, 인간은 무엇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깊은 숲 속에서 홀로 떨어져 살아가지 못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섞어 살면서 공동체 사회 속에서 조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따라서 공동체 사회에서 공동체 사회 전체의 공통된 공공의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전제와 본능이 개재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Anyone who either cannot lead the common life or is so self-sufficient as not to need to, and therefore does not partake of society, is either a beast or a god.”, “공동체 사회의 선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거나, 혼자로도 자급자족이 충분하기에 사회 생활의 참여가 필요없는 고립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짐승이 아니면 신이 틀림없다.

[7] 상앙(BC 395-BC 338)의 저서 商君書”(상군서)商子”(상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8] 도덕경 제2장 구절을 영어로 번역하면, ”Sages live the life in flow like a water (instead of acting on purpose or pretending) and lead by example (instead of teaching in words). All things in the world and universe work well and flourish, not by way of command in words.”

[9] 영어 표현은, The Way of heaven does not strive; yet it wins easily. It does not speak; yet it gets a good response. It does not demand; yet all needs are met. It is not anxious; yet it plans well.

[10] 영어 번역을 보면, The pursuit of learning is to increase day by day. The practice of the Way is to decrease day by day. Less and less is done until one reaches non-action. When nothing is done, nothing is left undone. The world is led by not interfering. Those who interfere cannot lead the world.

[11] 南齊書, 崔祖思傳, 「論儒者以德化爲本 談法者以刻削治世之粱肉 刑憲亂世之藥石 故以化比雨露 名法方風霜 是以有恥且格 敬讓之樞紐 令行禁止爲國之關楗 然則天下治者 賞罰而已矣 賞不事 所病于不均 罰不在重 所困於不當 如令甲勛少 乙功多 賞甲而捨乙 天下必有不勸矣 丙罪重 丁眚輕 罰丁而赦丙 天下必有不悛矣 是賞罰空行 無當乎勸沮 將令見罰者寵習之臣 受賞者仇讎之士 戮一人而萬國懼 賞匹夫而四海悅」

[12] 墾草令”(간초령), ()나라 효공(秦孝公) BC 356년 상앙(.)을 재상에 임명하고 토지개간령을 시행함.

[13] “No one is ready for a thing until he believes he can acquire it.”

[14] “Opportunity often comes disguised in the form of misfortune or temporary defeat.” “Every adversity, every failure, every heartbreak, carries with it the seed of an equal or greater benefit.”

[15] 商鞅, “商君書”, 更法편.

[16] 영어 번역은 J.J.L. Duyvendak, "The Book of Lord Shang" (1928), 'He who is concerned about the highest virtue is not in harmony with popular ideas; he who accomplishes a great work, does not take counsel with the multitude.'

[17]法者 所以愛民也”, 법은 국민을 사랑하는 것에 그 존재 이유가 있다는 의미에 대해서 W H오든, “Law, Like Love”(법은 사랑처럼) 영시를 참조하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또는 무관심한 상태로 벗어나려는

모두가 바라는 희망을 억누르네.

나는 적어도 여러분과 나의 허영심을

제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유사성을

소심하게나마 말한다면,

우리들은 그래도 나와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네

법은 사랑 같은 것이라고.

 

법은 사랑처럼 우리들이 어디에 있는지, 왜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법은 사랑처럼 강요하거나 벗어날 수도 없는 것,

법은 사랑처럼 우리가 흔히 눈물 흘리는 것,

법은 사랑처럼 우리가 거의 지키기 어려운 것.”

 

W H오든, “Law, Like Love”(법은 사랑처럼) 영시 중에서 마지막 두 연 인용. 오든이 이 시를 쓴 시기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1939 9월쯤이었다. Auden, "Collected Poems", Edited by Edward Mendelson. Vintage. 1st ed. Feb 1991 pages 262-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