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장재 칠애시와 망국지음
且山谷遷貿人代推移 산과 골짜기도 변하고 인간세상도 변한다-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과 칠애시 관련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구절의 표현 且山谷遷貿人代推移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 구절은 인생무상을 노래한 장재의 七哀詩칠애시를 참고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칠애시의 구절을 보라.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 季世喪亂起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 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珍寶見剽虜 … 蹊徑登童豎狐兔窟其中 …昔為萬乘君 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悽愴哀今古.
삼국사기 유조문의 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은 장재의 칠애시 昔為萬乘君今為丘中土의 5자 5자의 오언한시의 구절의 뜻을 6자 6자의 구절로 풀어 쓴 표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의 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구절은 장재의 칠애시의 昔為萬乘君今為丘山土 구절의 의미는 서로 같다. 삼국사기는 만승군 대신 ‘만기의 차량을 타고 호령하던 영웅’이란 뜻의 萬機之英만기지영으로 표현문구를 살짝 바꾸었으나 만기지영은 萬乘君만승군과 같은 뜻이다. 만승군은 만승의 수레를 지휘하는 군대의 최고 지휘자 즉 천자 제왕을 지칭하는 말이다. 만기영萬機英 또한 천자 제왕을 지칭하는 말이니 둘 다 같은 의미가 된다. 삼국사기의 終成一封之土은 장재 칠애시의 今為丘山土의 의미와 그대로 같다. 丘山土나 丘中土는 서로 같은 뜻이다.
삼국사기의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초목가기상호토혈기방) 구절은 문무왕릉 비문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문무왕릉비문의 파편에서 樵글자 부분은 떨어져 나가서 “□牧哥其上”상태인 바, 이 결자 부분의 글자가 “樵”자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나는 “□牧哥其上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 부분을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타난 표현인 牧兒목아, 牧童목동, 童牧으로 이해하여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문무왕릉의 비문은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이 아니라, 그 진실적 표현 구문은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으로 추측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문무왕릉 비문의 구절은 “목동이 그 위에서 슬픈 애가를 부르니, 토끼와 여우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한편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의 만가사 부분의 구절 예컨대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의 구절 등은 비록 문무왕릉 비문의 표현 글자를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이고, 그 변형의 배경에는 장재의 칠애시의 蹊逕登童豎狐兔窟其中와 感彼雍門言의 구절을 차용한 측면이 있다. 童牧哥其上의 표현을 삼국사기가 樵牧歌其上으로 바꾼 배경에는 칠애시 구절 感彼雍門言의 의미가 작동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雍門옹문은 거문고 악사 옹문자주를 지칭하므로 옹문자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초목가기상의 표현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牧哥其上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부분을 지금까지는 국편위의 번역대로 “樵牧哥其上狐兔穴其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치 화석처럼 정설화되어 왔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보다 깊은 천착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 “樵牧歌其上”초목가기상이라는 어구의 표현은 초목동樵牧童이라는 주어 사람 童동이 없으므로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표현이 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童동이 생략된 표현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으나 그러면 싯구의 전체 맥락에서 이어진 경우에야 가능할 것이다. 초목가라는 표현은 당나라 시대 훨씬 이후인 송나라 徐僑(1160-1237)의 싯구절 只有晚歸樵牧歌에 나타난다. 칠애시의 저자 장재가 활동했던 위진남북조시대에선 童牧哥其上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나라의 운명이 나의 운명임을 깨달아-感彼雍門言
예로부터 우리 삶은 인생무상이고 또 국가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해 왔다. 나라가 망하면 그 국민들은 노예로 잡혀 나가거나 뿔뿔이 흩어져 유랑의 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라가 망하면 자신 또한 죽는 것으로 여기는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왔다. 이런 인생관을 잘 알려주는 고사 하나가 맹상군과 옹문자주의 망국의 슬픈 노래 망국지음의 이야기인데, 이를 전하고 있는 유향劉向의 “說苑”설원의 기록을 잠깐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맹상군孟嘗君(?-BC 279)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서 역성혁명을 일으켜 전田씨왕조를 세운 사람이다. 雍門子周옹문자주는 당시대에 슬픈 가야금 음악을 연주하는 유명한 궁중악사였다. 맹상군과 옹문자주와의 음악 대화에 관한 설원의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세상의 식견 높은 사람들 중에 당신을 위해 마음이 아프고 코가 시큰거리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먼 훗날에는 사당에 제삿밥도 올리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대광실은 무너지고, 구비친 큰 정원연못도 쉬이 흙으로 메워지며, 무덤 또한 평지가 되어 푸른 풀만 돋아나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이 또 땔나무를 구하는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당신을 애처롭다고 서글퍼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존엄하고 귀하게 대우받던 맹상군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 줌 흙으로 변했다는 말인가?” 이에 맹상군은 눈동자에 눈물이 이슬방울처럼 맺히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옹문자주가 가야금을 꺼내서 연주하매, 낮은 음자리의 궁성과 징성으로 잔잔하게 시작하다가 비장한 느낌조의 우성과 각성으로 가볍게 휘몰아 치듯 한 곡조로 연주를 마치자, 맹상군의 눈물이 바닷물처럼 불어났다. 맹상군은 장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들으니 마치 내가 나라가 망하고 봉토를 잃은 파멸한 사람같이 느껴지는군요.”
雍門子周以琴見乎孟嘗君 孟嘗君曰 「先生鼓琴亦能令文悲乎」 雍門子周曰 「臣何獨能令足下悲哉 臣之所能令悲者 有先貴而後賤 先富而後貧者也 不若身材高妙 適遭暴亂 無道之主 妄加不道之理焉 不若處勢隱絕 不及四鄰 詘折儐厭 襲於窮巷 無所告愬 不若交歡相愛無怨而生離 遠赴絕國 無復相見之時 不若少失二親 兄弟別離 家室不足 憂蹙盈胸 當是之時也 固不可以聞飛鳥疾風之聲 窮窮焉固無樂已 凡若是者 臣一為之徽膠援琴而長太息 則流涕沾衿矣 今若足下千乘之君也 居則廣廈邃房 下羅帷 來清風 倡優侏儒處前選進而諂諛 燕則鬥象棋而舞鄭女 激楚之切風 練色以淫目 流聲以虞耳 水遊則連方舟 載羽旗 鼓吹乎不測之淵 野遊則馳騁弋獵乎平原廣囿 格猛獸 入則撞鍾擊鼓乎深宮之中 方此之時 視天地曾不若一指 忘死與生 雖有善琴者 固未能令足下悲也」 孟嘗君曰「否 否 文固以為不然」 雍門子周曰 「然臣之所為足下悲者一事也 夫聲敵帝而困秦者君也 連五國之約 南面而伐楚者又君也 天下未嘗無事 不從則橫 從成則楚王 橫成則秦帝 楚王秦帝 必報讎於薛矣 夫以秦 楚之強而報讎於弱薛 譽之猶摩蕭斧而伐朝菌也 必不留行矣 天下有識之士無不為足下寒心酸鼻者 千秋萬歲後 廟堂必不血食矣 高臺既以壞 曲池既以漸 墳墓既以下而青廷矣 嬰兒豎子樵採薪蕘者 蹢躅其足而歌其上 眾人見之 無不愀焉 為足下悲之曰 「夫以孟嘗君尊貴乃可使若此乎」 於是孟嘗君泫然泣涕 承睫而未殞雍門子周引琴而鼓之 徐動宮徵 微揮羽角 切終而成曲 孟嘗君涕浪汗增 欷而就之曰 「先生之鼓琴令文立若破國亡邑之人也」
장재 七哀詩 칠애시
七哀칠애라는 말은 처참하고 처량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극도로 슬프고 아픈 상심을 말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캄캄한 밤을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때의 강조 형용사로 쓰인 칠이다. 칠애는 팔애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칠애는 전쟁과 반란, 전염병, 홍수나 강물 바다에 익사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극도의 슬픔에 빠진 아픈 마음을 표현한 애도시의 한 종류에 속한다. 칠애시로 잘 알려진 경우는 왕찬, 조식, 장재 이들 3인이다. 이들 칠애시의 주제는 한 나라가 멸망한 이후 전란으로 황폐해져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말세기의 심정을 담고 있다.
칠애시 1수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恭文遙相望原陵郁膴膴 季世喪亂起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珍寶見剽虜 園寢化為墟周墉無遺堵 蒙蘢荊棘生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蕪穢不復掃 頹隴並墾發萌隸營農圃 昔為萬乘君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悽愴哀今古 |
북망산 겹겹이 둘러 쌓인 사오십개가 넘는 저 높은 무덤들, 누구의 무덤들인지 물어보니 모두 한나라 왕릉이라네. 태평성대엔 한안제安帝공릉恭陵 한영제靈帝문릉 서로 쳐다 보이고 광무제光武帝 원릉原陵 아름답게 보이지만, 말세가 되어 전란이 일어나면 맹수 같은 도적떼들이 무덤들을 파헤치고 지나가, 깊은 석실 구들방 문들은 다 열어 제쳐지고, 염한 옷들은 시체에서 떨어져 나부러지고, 진귀한 부장품들은 보이는 대로 약탈되었네. 왕릉은 허물어져 폐허가 되고, 주변의 담장도 사라져, 초목과 덤불 관목만 무성하게 자라나, 어린아이들이 그 위로 지나 다니고, 여우와 토끼들이 그 속에 굴을 파고 들고, 잡초만 우거진 황무지로 변해도 벌초 한 번 하지 않고, 황폐한 묘지는 개간되어 농민들의 경작지로 변했네. 어제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이었건만 오늘 작은 언덕의 한 줌 흙으로 변했구나! 거문고로 심금을 울려주던 그 옛날의 옹문자주의 말이 실감나네. 흘러간 무상세월에 마음은 애달프고 슬픔만 가득하네. |
한시원문 | 독음 |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恭文遙相望原陵郁膴膴 季世喪亂起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珍寶見剽虜 園寢化為墟周墉無遺堵 蒙蘢荊棘生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蕪穢不復掃 頹隴並墾發萌隸營農圃 昔為萬乘君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悽愴哀今古 |
북망하루루고릉유사오 차문수가분 개운한세주 공문요상망원릉욱무무 계세상란기도적여시호 훼양과일부편방계유호 주합리옥체진보견표로 원침화위허주용무유도 몽롱형극생혜경등동수 호토굴기중 무예불복소 퇴롱병간발맹례영농포 석위만승군금위구중토 감피옹문언처창애금고 |
칠애시 2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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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망산은 우리 민요 성주풀이의 사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 명이더냐”의 구절로 익숙하듯이, 그리고 칠애시의 표현이 말해주듯이, 한나라 왕릉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명당 자리를 가르킨다. 한나라 왕릉뿐만 아니라 당나라 왕릉 21개 중 19개가 북산에 위치한다. 낙양 근처에 왕릉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원에 위치한 낙양이 중국의 역사 13개 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터인데 북산은 구릉지 비교적 낮게 솟아오른 언덕 산에 가까워 천혜의 장지 길지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북망산은 무덤을 가르키는 일반명사화된 표현이기도 하다. 이 칠애시에 나타난 단어 北芒, 高陵, 家墳, 原陵, 一抔, 便房, 園寢, 頹隴, 中丘土 들은 모두가 墳墓분묘 무덤 묘지 왕릉 릉원 등 무덤을 가르키는 표현들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으로 망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언어란 사람 사이에 뜻의 전달과 상호 소통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표현들을 만들어 내고 더욱 복잡하게 발전되어 왔다. 이 싯구를 번역할 때 무덤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것을 표현해 낼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덤 한 단어로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인간 세상사 한 단면을 표현해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비목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왕릉 아방궁의 개인 분묘가 있고 공동묘지가 있고 공동묘지에도 국립묘지가 있고 공원묘지가 있고 가족묘지선영이 있으며 또 만인총 무명용사탑 등 다양한 형태로 나눠진다. 언어의 다양성은 혼란과 파괴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인류는 서로 소통을 통해서 계속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張載
張載장재(?-?)는 西晋서진시대(266-316) 문학가로 촉군蜀郡태수를 지냈다. 왕조교체와 정치 사회 혼란이 극도로 심했던 팔왕의 난(291-306) 시기에 정치 참여를 하였다가 처형당했던 반악과는 달리 장재는 관직에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칠애시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한나라 왕조가 붕괴된 정치 혼란의 상황을 인생무상의 의미로 쓸쓸히 비웃고 있는 장재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반면 반악潘岳(247-300)은 효성이 지극하고 정통 중화왕조를 복원하고자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맞섰던 비장함을 간직한 문학가였다. 반악은 당시 민중들에게 특히 부녀자들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반면 장재는 민중들의 혐오를 산 인물이었다.
반악이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이유 중에는 죽은 사람에게 애도의 정을 잘 표현한 문학가였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정치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갔는데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잘 표현한 애뢰哀誄 비문碑文의 대가로 알려진 반악이 민중들의 애통한 마음 애도지정을 달래 주었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치 혼란기에 명철보신의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혼란을 수습하기 보다 그저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하거나 세상을 조소하며 비겁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는 점을 반악과 장재의 삶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장재와 반악의 삶과 문학은 진서晉書 그리고 “문선”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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