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뒷면 제4행
□□□□□□□□□□□□□□□□牧哥其上狐兔穴其傍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국편위 번역)
碑文비문의 구조와 성격
비문 헤더에서 “文武王”문무왕, “王陵”왕릉, “碑文”비문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문무왕릉의 비문은 상장례 예식의례에 속한다. 사람은 한 번 죽는다. 人必有一死. 비문 碑文은 誄碑, 誄文(뢰문), 哀祭文, 哀辞(애사), 哀策(애책), 祭文(제문), 吊文(조의문), 墓志銘(묘지명), 行狀(행장), 輓歌(만가), obituary, eulogy 종류에 속한다. 이런 부류의 글은 오로지 한 번뿐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고 문상하는 성격의 글이다.
묵자墨子는 “誄者 道死人之志也”, 순자荀子는 “其銘誄繫世 敬傳其名也”라고 말했다. 道志와 傳名이라는 말이 일러주듯, 양나라 유협의 뢰비誄碑에 대한 글을 읽어보라. 망자의 살았을 때의 덕행德行을 널리 선양하는 것이 그 목적 아닌가? 공자가 말한 誄(뢰)는 죽음을 슬퍼하여 망자의 행적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70년 이전에 태어난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 나이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죽음에 대해서 노애공이 애도를 표한 제문 誄(뢰)문을 보자. 좌전 노애공편에 나오는 孔子誄(공자뢰) 전문은 사마천의 사기에도 실려 있다.
夏 四月己丑 孔丘卒 公誄之曰 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屏余一人以在位 煢煢余在疚 嗚呼哀哉 尼父 無自律 子贛曰 君其不沒於魯乎 夫子之言曰 禮失則昏 名失則愆 失志為昏 失所為愆 生不能用 死而誄之 非禮也 稱一人 非名也 君兩失之 (사기, 孔子世家)
憖은 원愿意하다 損傷손상하다, 煢경은 홀로 남음 孤獨, 疚구는 심적 고통, 愆건은 죄과罪過를 뜻하는 낱말이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으셔서 이 늙은 한 노인을 남겨 두지 않고 데려가 버리고, 내 같은 못난 사람만 임금님의 자리에 앉혀 놓고, 홀로 되게 만들고, 그래서 마음의 고통만 안겨 주는구려. 아 슬프고 애통하다. 공자선생이여, 이제 내게는 중요한 자문을 해줄 사람마저 없으니 난 어쩌란 말인가?
자공이 말했다. 임금님은 아마도 노나라에서 천수를 다해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공자님이 말씀하기를 예법을 잃으면 나라가 혼탁해지고, 명분을 잃으면 허물이 생기고, 대의를 잃게 되면 혼란이 생기고, 각자 제자리를 잃게 되면 죄과를 낳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살아생전에는 공자를 중용하지 못하고서 죽은 이후에 이렇게 애도를 표하는 것은 예에 합당한 것이 아니지 않겠어요? 그리고 (주나라 천자도 아닌 단지 제후왕에 불과한 노애공의 신분에 비추어) 자기 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으니, 임금님은 두 가지 잘못을 범한 것이 됩니다.
망자의 덕행을 칭송하고 후세에 전하는 내용이지 망자를 깎아내리고 비아냥거리는 비판이 비문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자아비판은 “죄기조”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가?
장재 칠애시와 망국지음
且山谷遷貿人代推移 산과 골짜기도 변하고 인간세상도 변한다-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과 칠애시 관련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구절의 표현 且山谷遷貿人代推移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 구절은 인생무상을 노래한 장재의 七哀詩칠애시를 참고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칠애시의 구절을 보라.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 季世喪亂起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 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珍寶見剽虜 … 蹊徑登童豎狐兔窟其中 …昔為萬乘君 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悽愴哀今古.
삼국사기 유조문의 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은 장재의 칠애시 昔為萬乘君今為丘中土의 5자 5자의 오언한시의 구절의 뜻을 6자 6자의 구절로 풀어 쓴 표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의 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구절은 장재의 칠애시의 昔為萬乘君今為丘山土 구절의 의미는 서로 같다. 삼국사기는 만승군 대신 ‘만기의 차량을 타고 호령하던 영웅’이란 뜻의 萬機之英만기지영으로 표현문구를 살짝 바꾸었으나 만기지영은 萬乘君만승군과 같은 뜻이다. 만승군은 만승의 수레를 지휘하는 군대의 최고 지휘자 즉 천자 제왕을 지칭하는 말이다. 만기영萬機英 또한 천자 제왕을 지칭하는 말이니 둘 다 같은 의미가 된다. 삼국사기의 終成一封之土은 장재 칠애시의 今為丘山土의 의미와 그대로 같다. 丘山土나 丘中土는 서로 같은 뜻이다.
삼국사기의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초목가기상호토혈기방) 구절은 문무왕릉 비문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문무왕릉비문의 파편에서 樵글자 부분은 떨어져 나가서 “□牧哥其上”상태인 바, 이 결자 부분의 글자가 “樵”자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나는 “□牧哥其上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 부분을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타난 표현인 牧兒목아, 牧童목동, 童牧으로 이해하여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문무왕릉의 비문은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이 아니라, 그 진실적 표현 구문은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으로 추측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문무왕릉 비문의 구절은 “목동이 그 위에서 슬픈 애가를 부르니, 토끼와 여우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한편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의 만가사 부분의 구절 예컨대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의 구절 등은 비록 문무왕릉 비문의 표현 글자를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이고, 그 변형의 배경에는 장재의 칠애시의 蹊逕登童豎狐兔窟其中와 感彼雍門言의 구절을 차용한 측면이 있다. 童牧哥其上의 표현을 삼국사기가 樵牧歌其上으로 바꾼 배경에는 칠애시 구절 感彼雍門言의 의미가 작동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雍門옹문은 거문고 악사 옹문자주를 지칭하므로 옹문자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초목가기상의 표현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牧哥其上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부분을 지금까지는 국편위의 번역대로 “樵牧哥其上狐兔穴其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치 화석처럼 정설화되어 왔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보다 깊은 천착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 “樵牧歌其上”초목가기상이라는 어구의 표현은 초목동樵牧童이라는 주어 사람 童동이 없으므로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표현이 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童동이 생략된 표현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으나 그러면 싯구의 전체 맥락에서 이어진 경우에야 가능할 것이다. 초목가라는 표현은 당나라 시대 훨씬 이후인 송나라 徐僑(1160-1237)의 싯구절 只有晚歸樵牧歌에 나타난다. 칠애시의 저자 장재가 활동했던 위진남북조시대에선 童牧哥其上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나라의 운명이 나의 운명임을 깨달아-感彼雍門言
예로부터 우리 삶은 인생무상이고 또 국가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해 왔다. 나라가 망하면 그 국민들은 노예로 잡혀 나가거나 뿔뿔이 흩어져 유랑의 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라가 망하면 자신 또한 죽는 것으로 여기는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왔다. 이런 인생관을 잘 알려주는 고사 하나가 맹상군과 옹문자주의 망국의 슬픈 노래 망국지음의 이야기인데, 이를 전하고 있는 유향劉向의 “說苑”설원의 기록을 잠깐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맹상군孟嘗君(?-BC 279)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서 역성혁명을 일으켜 전田씨왕조를 세운 사람이다. 雍門子周옹문자주는 당시대에 슬픈 거문고 음악을 연주하는 유명한 궁중악사였다. 맹상군과 옹문자주와의 음악 대화에 관한 설원의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세상의 식견 높은 사람들 중에 당신을 위해 마음이 아프고 코가 시큰거리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먼 훗날에는 사당에 제삿밥도 올리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대광실은 무너지고, 구비친 큰 정원연못도 쉬이 흙으로 메워지며, 무덤 또한 평지가 되어 푸른 풀만 돋아나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이 또 땔나무를 구하는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당신을 애처롭다고 서글퍼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존엄하고 귀하게 대우받던 맹상군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 줌 흙으로 변했다는 말인가?” 이에 맹상군은 눈동자에 눈물이 이슬방울처럼 맺히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옹문자주가 거문고를 꺼내서 연주하매, 낮은 음자리의 궁성과 징성으로 잔잔하게 시작하다가 비장한 느낌조의 우성과 각성으로 가볍게 휘몰아 치듯 한 곡조로 연주를 마치자, 맹상군의 눈물이 바닷물처럼 불어났다. 맹상군은 장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거문고 가야금 연주를 들으니 마치 내가 나라가 망하고 봉토를 잃은 파멸한 사람같이 느껴지는군요.”
雍門子周以琴見乎孟嘗君 孟嘗君曰 「先生鼓琴亦能令文悲乎」 雍門子周曰 「臣何獨能令足下悲哉 臣之所能令悲者 有先貴而後賤 先富而後貧者也 不若身材高妙 適遭暴亂 無道之主 妄加不道之理焉 不若處勢隱絕 不及四鄰 詘折儐厭 襲於窮巷 無所告愬 不若交歡相愛無怨而生離 遠赴絕國 無復相見之時 不若少失二親 兄弟別離 家室不足 憂蹙盈胸 當是之時也 固不可以聞飛鳥疾風之聲 窮窮焉固無樂已 凡若是者 臣一為之徽膠援琴而長太息 則流涕沾衿矣 今若足下千乘之君也 居則廣廈邃房 下羅帷 來清風 倡優侏儒處前選進而諂諛 燕則鬥象棋而舞鄭女 激楚之切風 練色以淫目 流聲以虞耳 水遊則連方舟 載羽旗 鼓吹乎不測之淵 野遊則馳騁弋獵乎平原廣囿 格猛獸 入則撞鍾擊鼓乎深宮之中 方此之時 視天地曾不若一指 忘死與生 雖有善琴者 固未能令足下悲也」 孟嘗君曰「否 否 文固以為不然」 雍門子周曰 「然臣之所為足下悲者一事也 夫聲敵帝而困秦者君也 連五國之約 南面而伐楚者又君也 天下未嘗無事 不從則橫 從成則楚王 橫成則秦帝 楚王秦帝 必報讎於薛矣 夫以秦 楚之強而報讎於弱薛 譽之猶摩蕭斧而伐朝菌也 必不留行矣 天下有識之士無不為足下寒心酸鼻者 千秋萬歲後 廟堂必不血食矣 高臺既以壞 曲池既以漸 墳墓既以下而青廷矣 嬰兒豎子樵採薪蕘者 蹢躅其足而歌其上 眾人見之 無不愀焉 為足下悲之曰 「夫以孟嘗君尊貴乃可使若此乎」 於是孟嘗君泫然泣涕 承睫而未殞雍門子周引琴而鼓之 徐動宮徵 微揮羽角 切終而成曲 孟嘗君涕浪汗增 欷而就之曰 「先生之鼓琴令文立若破國亡邑之人也」
장재 七哀詩 칠애시
七哀칠애라는 말은 처참하고 처량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극도로 슬프고 아픈 상심을 말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캄캄한 밤을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때의 강조 형용사로 쓰인 칠이다. 칠애는 팔애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칠애는 전쟁과 반란, 전염병, 홍수나 강물 바다에 익사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극도의 슬픔에 빠진 아픈 마음을 표현한 애도시의 한 종류에 속한다. 칠애시로 잘 알려진 경우는 왕찬, 조식, 장재 이들 3인이다. 이들 칠애시의 주제는 한 나라가 멸망한 이후 전란으로 황폐해져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말세기의 심정을 담고 있다.
칠애시 1수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恭文遙相望原陵郁膴膴 季世喪亂起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珍寶見剽虜 園寢化為墟周墉無遺堵 蒙蘢荊棘生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蕪穢不復掃 頹隴並墾發萌隸營農圃 昔為萬乘君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悽愴哀今古 |
북망산 겹겹이 둘러 쌓인 사오십개가 넘는 저 높은 무덤들, 누구의 무덤들인지 물어보니 모두 한나라 왕릉이라네. 태평성대엔 한안제安帝공릉恭陵 한영제靈帝문릉 서로 쳐다 보이고 광무제光武帝 원릉原陵 아름답게 보이지만, 말세가 되어 전란이 일어나면 맹수 같은 도적떼들이 무덤들을 파헤치고 지나가, 깊은 석실 구들방 문들은 다 열어 제쳐지고, 염한 옷들은 시체에서 떨어져 나부러지고, 진귀한 부장품들은 보이는 대로 약탈되었네. 왕릉은 허물어져 폐허가 되고, 주변의 담장도 사라져, 초목과 덤불 관목만 무성하게 자라나, 어린아이들이 그 위로 지나 다니고, 여우와 토끼들이 그 속에 굴을 파고 들고, 잡초만 우거진 황무지로 변해도 벌초 한 번 하지 않고, 황폐한 묘지는 개간되어 농민들의 경작지로 변했네. 어제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이었건만 오늘 작은 언덕의 한 줌 흙으로 변했구나! 거문고로 심금을 울려주던 그 옛날의 옹문자주의 말이 실감나네. 흘러간 무상세월에 마음은 애달프고 슬픔만 가득하네. |
한시원문 | 독음 |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恭文遙相望原陵郁膴膴 季世喪亂起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珍寶見剽虜 園寢化為墟周墉無遺堵 蒙蘢荊棘生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蕪穢不復掃 頹隴並墾發萌隸營農圃 昔為萬乘君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悽愴哀今古 |
북망하루루고릉유사오 차문수가분 개운한세주 공문요상망원릉욱무무 계세상란기도적여시호 훼양과일부편방계유호 주합리옥체진보견표로 원침화위허주용무유도 몽롱형극생혜경등동수 호토굴기중 무예불복소 퇴롱병간발맹례영농포 석위만승군금위구중토 감피옹문언처창애금고 |
칠애시 2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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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망산은 우리 민요 성주풀이의 사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 명이더냐”의 구절로 익숙하듯이, 그리고 칠애시의 표현이 말해주듯이, 한나라 왕릉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명당 자리를 가르킨다. 한나라 왕릉뿐만 아니라 당나라 왕릉 21개 중 19개가 북산에 위치한다. 낙양 근처에 왕릉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원에 위치한 낙양이 중국의 역사 13개 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터인데 북산은 구릉지 비교적 낮게 솟아오른 언덕 산에 가까워 천혜의 장지 길지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북망산은 무덤을 가르키는 일반명사화된 표현이기도 하다. 이 칠애시에 나타난 단어 北芒, 高陵, 家墳, 原陵, 一抔, 便房, 園寢, 頹隴, 中丘土 들은 모두가 墳墓분묘 무덤 묘지 왕릉 릉원 등 무덤을 가르키는 표현들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으로 망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언어란 사람 사이에 뜻의 전달과 상호 소통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표현들을 만들어 내고 더욱 복잡하게 발전되어 왔다. 이 싯구를 번역할 때 무덤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것을 표현해 낼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덤 한 단어로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인간 세상사 한 단면을 표현해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비목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왕릉 아방궁의 개인 분묘가 있고 공동묘지가 있고 공동묘지에도 국립묘지가 있고 공원묘지가 있고 가족묘지선영이 있으며 또 만인총 무명용사탑 등 다양한 형태로 나눠진다. 언어의 다양성은 혼란과 파괴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인류는 서로 소통을 통해서 계속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張載
張載장재(?-?)는 西晋서진시대(266-316) 문학가로 촉군蜀郡태수를 지냈다. 왕조교체와 정치 사회 혼란이 극도로 심했던 팔왕의 난(291-306) 시기에 정치 참여를 하였다가 처형당했던 반악과는 달리 장재는 관직에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칠애시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한나라 왕조가 붕괴된 정치 혼란의 상황을 인생무상의 의미로 쓸쓸히 비웃고 있는 장재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반면 반악潘岳(247-300)은 효성이 지극하고 정통 중화왕조를 복원하고자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맞섰던 비장함을 간직한 문학가였다. 반악은 당시 민중들에게 특히 부녀자들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반면 장재는 민중들의 혐오를 산 인물이었다.
반악이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이유 중에는 죽은 사람에게 애도의 정을 잘 표현한 문학가였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정치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갔는데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잘 표현한 애뢰哀誄 비문碑文의 대가로 알려진 반악이 민중들의 애통한 마음 애도지정을 달래 주었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치 혼란기에 명철보신의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혼란을 수습하기 보다 그저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하거나 세상을 조소하며 비겁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는 점을 반악과 장재의 삶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장재와 반악의 삶과 문학은 진서晉書 그리고 “문선”에 실려 있다.
국편위의 且山谷遷貿人代推移 구절 번역은 잘못됐다
且山谷遷貿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
이 구절을 국편위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석했다. “또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하지만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국편위가 번역한 대로 且차는 “또”라고 번역되기 보다는, 단순한 문언조사로써 夫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金鳧금부는 글자 그대로의 뜻대로 “금으로 만든 물오리”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따른다. 金금이란 Gold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리로 주조한 청동물을 금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따라서 金人이라는 말과 같이 金鳧는 꼭 금이 아니라 청동주조물로 만든 금부를 말하고 또 金鳧금부는 제왕의 무덤에 부장하는 부장품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나라 왕은 유명한 오왕 합려吳王闔廬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오왕 무덤에서 금부를 볼 수 없다’는 표현은 그 무덤이 이미 도굴되어서 제왕의 부장품을 더 이상 무덤 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즉 무덤이 도굴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且山谷遷貿人代推移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 이 구절을 조금 다시 가다듬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어 가고, 인간 세상도 바뀌어 가느니.
북산의 오왕 무덤들은 도굴되어 부장품을 남아 있지 않고,
위나라 황제 조조의 무덤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대라는 이름만 전해질 뿐.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천하의 영웅도 결국 무덤 속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간다네.
먼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를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파고 든다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음만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死者人之所必不免也處必然之勢”. 모든 사람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죽을 이 몸이거늘, 그래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보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때 하늘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는 듯한 격한 슬픔과 애통함을! 산천도 놀라 목이 메이고, 내리던 눈발도 멈추어 선 그 때의 슬픔을 기억하는가?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그 때의 아픔을! 오호애제 嗚呼哀哉于時天震地駭如天斯崩如山斯傾.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구절의 표현 “且山谷遷貿人代推移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狐兎穴其旁”은, 유신庾信의 애강남부의 “雙鳧永去 … 一雁空飛”, “狐兔而窟穴”, “指愛子而託人知西陵而誰望非無北闕之兵猶有雲臺之仗”, 유신의 拟連珠의연주시 중 “雀台弦管空望西陵之松“, 그리고 장재의 七哀詩칠애시에서의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蹊逕登童豎狐兔窟其中”, “昔為萬乘君今為丘山土” 구절 등에서 차용한 표현인 것으로 추측된다. 문무왕릉 비문에서의 애도시 挽歌辭만가사의 문장에 이러한 표현 구절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비문이 깨어져 떨어져 나가 사라지고 마멸되고만 안타까운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칠 증거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복원할 길이 없겠지만 문무왕릉 비문의 원래 문장의 내용은 장재의 칠애시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보이는 挽辭만사 애도시의 표현을 인용하여 문무왕의 서거에 대한 극도의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한 문장이 비문의 내용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러한 원문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지 않았고 대신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역사를 조작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삼국사기에서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구절은 비문 원래의 문장 그대로를 전재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과 조작의 차이점을 가려낼 수 있을까? 삼국사기와 문무왕릉의 비문과의 비교에서 유일하게 같은 구절로 확인되는 문장은 “□牧哥其上狐兔穴其傍” 이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문무왕릉 비문의 “東征西□”과 같은 뜻으로 삼국사기는 “西征北討”(서정북토)라는 말로 대채 표현을 썼다.
狐兔之悲 호토지비
비문 구절의 狐兔穴其旁은 狐兔之悲(호토지비)를 표현한 뜻으로 쓰였다. 호토지비 즉 여우와 토끼는 서로 원수지간이지만 그 원수지간의 동물도 상대방이 죽으면 슬퍼할 줄 알고 그래서 ‘흐느끼며 제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호토지비의 의미로써 ‘호토혈기방’을 쓴 것이다. 애강남부의 狐兔而窟穴호토이굴혈, 칠애시의 狐兔窟其中호토굴기중, 문무왕릉비문의 狐兔穴其旁호토혈기방은 모두 거의 같은 뜻의 글자로 쓰여진 구절이다. 장재의 칠애시의 狐兔窟其中호토굴기중은 ‘여우와 토끼가 무덤 근방에 굴을 판다’ 즉 영웅의 무덤이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헐고 황폐화된다는 인생무상을 뜻하는 구절로 쓰였다.
그러면 문무왕릉 비문의 狐兔穴其旁의 뜻은 어떠한가? 문무왕릉 비문 구절은 무덤의 황폐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여우와 토끼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 애도를 표한다’는 狐兔之悲호토지비의 뜻으로 쓰였다. “아! 목동아”의 가사 내용처럼, 양나라 시대 임방의 구절에 나오는 狐兔成穴童牧哀歌(호토성혈동목애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함은 분명하지 않는가?
국편위의 삼국사기 구절의 번역은,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국편위는 “□牧哥其上狐兔穴其旁”의 구절은 이 문장 바로 앞의 구절을 이어받아 즉 지난 날의 영웅도 죽으면 여우와 토끼가 무덤 옆에 굴을 판다는 의미로 번역 해석하고 있다. 이는 장재의 칠애시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무덤이 황폐화된다’는 인생무상의 의미를 반영하게 된다. 장재의 칠애시가 나온 배경은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 상황에 있다. 혼란한 시국에서 전쟁이 자주 발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사회였다. 당시 사람들의 인생관이 어떻게 변해 갔겠는가? 사람들은 인생무상의 절망감에 휩싸여 들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낱말 낱개의 의미로써 잘못 해석하고자 할 때는 문맥의 의미를 잃고 오해를 하거나 그 본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문서 조작을 하지 않아도 세월의 변천과 함께 언어 또한 변하고 그리고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언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간세상의 이치인데, 언어 해석의 다툼이 아니라 아예 문서를 조작한다면 그것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가 된다.
아 목동아! 목동애가 狐兔成穴童牧哀歌
양나라 시대 임방의 구절 狐兔成穴童牧哀歌에서 동목애가라는 표현이 나온다.
목동과 애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1913년 영국에서 나타난 대니보이만큼 현재 국제적으로 알려진 노래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 대니보이의 가사 아 목동아 대니 보이 Danny Boy 가사를 여기에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Danny는 다니엘의 애칭이니 사자의 밥이 되었다가 살아 남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상기하면 된다. 대니보이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바로 직전에 나타난 전쟁과 죽음에 관한 노래이다. 성경의 다니엘서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예언서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 않는 면이 있긴 하다.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아이덴디티 독자적 고유성을 지켜낼 것인가? 여기선 어려운 사회과학적 분석은 차치하고 우선 대니보이의 가사부터 재음미해 보자.
아 목동아, 피리, 피리 소리를 불러다오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산마루에서 골짜리로 울려 퍼지네
여름이 가면 장미꽃은 시들어 떨어지겠지.
그 땐 너도 가야 하는가? 그렇다면 난 기다릴 거야.
하지만 다시 초원이 푸르른 다음 해엔 너도 다시 돌아오겠지.
그렇지 않다면 골짜기는 눈으로 덮여 적막해지겠지.
해가 나든 숨든 나는 여기에 나타날 거야.
해가 나든 숨든 나는 여기에 나타날 거야.
오 목동아, 오 목동아, 난 널 사랑해
하지만 네가 다시 돌아올 땐 꽃들은 모두 시들어졌을거야.
내가 죽었거든, 뭐 이미 죽었을 테지만
내 묻혀 있는 곳을 찾아 내어
무릎 꿇고 내게 작별인사라도 해주렴.
내가 그걸 들을 수는 있을 꺼야. 내 무덤을 사뿐히 밟는 소리까지
그러면 내 무덤은 더욱 따뜻해지고 아늑해질테지.
네가 고개 숙여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네가 다시 올 때까지 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테야.
나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牧哥其上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 부분을 위진남북조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童牧으로 이해하고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 동목가기상호토혈기방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목동가기상호토혈기방은, 목동이 그 위에서 슬픈 애가를 부르니 토끼와 여우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가네. 童牧哥其上狐兔穴其傍은 장재의 칠애시의 蹊逕登童豎狐兔窟其中의 구절과 닮아 있다. 七哀詩가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시이기 때문에 만가하고 성격을 같이한다. 이 구절은 삼국사기에 전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무왕 유조와 비문 비교 분석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구절의 전후 문맥상의 의미와 그 표현기교를 함께 살펴볼 필요성이 크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보자. “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 삼국사기의 이 구절에 대한 국편위의 번역을 보자.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註1 위(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註2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註1 《越絶書》에 吳王 합려가 죽어 虎丘山에 장사지냈는데, 血池를 만들고 黃金珠玉으로 鳧鷹를 만들어 띄웠다고 한다. 註2 《鄴都故事》에 曹操가 일찍이 銅雀臺를 짓고 즐기다가 죽음에 이르러 아들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은 후 나의 妾과 伎人을 동작대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臺上에 6尺의 床을 설치하고 밑에 細布의 帳을 치고 아침 저녁으로 酒•脯•粻•糒 등을 바치게 하며 朔望에는 帳 앞에서 伎樂을 연주케 하고 너희도 때때로 西陵墓田을 바라보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전한 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 … 昔日萬機之英終成一封之土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 구절의 글자수 형태는 6자 6자, 5자 5자 형식이다. 이런 글자수 파격은 운과 율의 격을 중시하는 한시 구조와 형태에 어울리지 않는 측면을 보여준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이 구절의 글자수 형태는 1 4 4, 2 4, 2 4, 2 4, 2 4, 2 4, 2 4, 5 5 글자수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글자 수의 구조는 운율을 중시하는 한시 구조 더욱이 당시 오언한시나 보허사의 형태에는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문무왕릉 비문의 애도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의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에 대한 국편위의 번역은,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국편위는 이렇게 두 구절을 한 문장으로 묶고서 해석하였으나, 한시에서 구절의 글자수가 6자에서 5자로 급변할 때 그 문맥상 연결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재의 칠애시 전문을 다시 보라.
삼국사기의 “吳王北山之墳詎見金鳧之彩” 구절 부분은 장재의 칠애시 “北芒何壘壘高陵有四五借問誰家墳皆雲漢世主” 그리고 유신의 애강남부의 “知西陵而誰望非無北闕之兵”, “李陵之雙鳧永去”의 의미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왜곡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은 庾信유신의 의연주擬連珠시에서의 “雀台弦管空望西陵之松” 구절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살짝 바꾸어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장재의 칠애시는 한 때의 영웅들의 무덤도 시간이 흐르면 모두 폐허가 된다는 인생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도 결국 잊혀지는데 하물며 우리 보통사람들의 죽음은 무엇하랴,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의미를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패배적 조소적 소극적인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기본적으로 만가사는 망자에 대한 애도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어떤 비판이 끼어들기 힘든 측면이 있다. 국편위가 번역 해석을 함에 있어서, 문무왕릉 비문에 대해서 장재의 칠애시와 유신의 애강남부를 비롯한 시구절과의 연관성을 전혀 언급조차 해내지 못하는 있음은 심히 유감이고 안타깝다. 애도시의 의미와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그에 대한 해석이 엉뚱한 의미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무지에서 범하는 잘못은 누구의 책임인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양나라가 반란군에 접수되고 외국 침략자에게 유린당해 도성이 무너질 때의 참담한 상황을 묘사한 구절 그리고 위나라 조조가 죽음의 병상에서 남긴 유언 내용 등은 미래세대를 위해서 현 세대가 죽음을 불사하고 국가사직을 지켜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책무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4행 번역
□□□□ | |
(昔為萬乘君 今為南山土) |
(어제까지 만기철마를 달리던 천승군 오늘 남산의 흙이 되었네) |
□牧哥其上 狐兔穴其傍-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 | 목동의 애가가 그 위에 울려 퍼지니 여우와 토끼도 슬퍼하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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