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뒷면 제5행 燒葬 화소장
5행
□□□□□□□□□□□□□□□□□燒葬卽以其月十日大□□□
燒葬 화소장
燒葬(소장)은 불탈 燒소, 연소하다의 뜻이니, 火葬 화장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력도원의 수경주水經注에 “有一道人命過燒葬 燒之數千束樵 故坐火中”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燒葬(소장)은 평소 고인이 쓰던 물건을 불태우는 것-焚燒送葬物(분소송장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화장식 장례는 순임금, 도공의 신 범려와 서시가 그러했듯이 서주의 도교적 종교 장례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기원전 21세기 이전의 오랜 역사에 걸친 장례식이었다. 당연히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장례식 방법이다. 삼국사기에서 문무왕 유언을 전하면서 “依西國之式 以火燒葬”이라고 기술했는데, 이에 대한 국편위는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라고 번역하고 서국에 대해서 “西國은 인도를 가리키는데,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불태워 火葬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서국의 의식은 바로 火葬을 뜻한다”라고 주해를 달았다. 하지만 화장식 장례 방법은 불교의 전래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유의 장례 방법에 해당하기 때문에 인도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영향만이 아니다.
“西國”(서국)이라는 단어는 ① 춘추공양전에 나오는 “周公 東征則西國怨 西征則東國怨”이라는 구절에서 보이는 뜻처럼 서쪽 지방에 분봉받은 제후를 뜻한다 ② 중국의 서쪽 지방 西域 ③ 불교 발상지 ④ 삼성퇴 유적이 발견된 그리고 제갈량과 유비의 촉한으로 잘 알려져 있는 西蜀서촉 즉 오늘날 사천성 지방에서 건설된 나라를 의미한다. 유백온의 “촉가” 즉 촉나라 상인들이라는 표현, 소식의 싯구에 “諸葛 來西國 千年愛未衰 今朝游故里 蜀 客不勝悲”이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西蜀(서촉)을 지칭한다.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 시가 있는데 여기의 귀촉도의 구체적 역사적 대상이 촉나라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댐인 삼협대가 위치한 거대한 양자강의 물길에서 삼성퇴의 문명이 일어났던 그곳을 말한다. 문무왕의 선조가 유비의 촉한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로써 역사상 나타나므로 문무왕 유언에서 말하는 “서국”은 서촉 또는 서주로써 이해된다. 서주는 “徐方”(서방)으로 동해왕의 영토이었고, 상나라의 태동지였고 공자의 노나라 맹자의 추나라 그리고 도공의 범려, 또 그 이전의 동이족 백이숙제의 고죽국, 양나라 중심지 양산이었다. 서국을 단지 불교의 발상지 인도를 가르키는 인도와 동의어로 이해되어서는 아니된다.
卽以
卽以(즉이)는 遂以(수이)와 같은 뜻의 낱말로써 ‘무엇무엇에 이어서’ ‘곧바로’ 뜻이다. 유언에 따라 모년모월모일 어디에 장사지냈다는 그런 뜻으로 묘지명에 흔한 표현이다. 진자앙이 쓴 묘지명 가운데 “即以某年月日 葬於西嶽習仙鄉登仙裏之西麓 遵遺命也” 표현이 있다.
“卽以”(즉이)라는 말을 쓰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장례식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비문 행의 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遂以送王 이런 내용이 뒤따를 것 같다. 送喪(송상)은 喪家行列(상가행렬), 영구를 장지로 보내는 것을 이른다. 같은 동의어로 送殯(송빈), 送葬(송장)이 있다. 사람이 돌아가시면 즉 상을 당하면 빈소를 차리고 조의를 받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장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 망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날을 送王之日(송왕지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망자를 떠나 보내는 송왕의 장례식을 화장식으로 거행했다는 뜻이다. 화장의 장례식을 지금에서는 불교식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화장식은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중국 고유의 장례법에 속했다는 사실을 참고하라. 중국 고유의 종교는 도교와 유교이다. 불교는 다신교에 속하는 힌두교가 주된 종교인 인도에서 유입된 외래종교이다.
其月十日
“其月十日”(기월10일)이라는 문장 표현을 두고서 삼국사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대로 문무왕이 서거한지 “열흘만에 장례를 치렀다”는 기사는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문무왕릉 비문에서 분명하게 국장으로 치렀다고 “王禮”(왕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고 있기 때문에, 국장을 10일 이내에 치를 수는 없으므로 그런 삼국사기의 기사는 조작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운명하면 빈소를 차리고 염을 하고 조문객을 맞는 등 국가 예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장례식 이전에 해야 될 예법대로 최소한의 적법절차를 지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국장을 10일만에 치를 수가 없었다.
孟冬十月
여기서 “其月”이라는 표현은 결자된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추측컨대 당태종의 예처럼 4월 장례식 즉 7월 달에 운명한 사람을 4개월에 걸쳐서 국장을 준비하고 안장식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시간적 개념이므로 그해 10월 달에 화장식을 거행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앞에서 孟冬(맹동)이라는 시간개념을 기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맹동은 음력 10월 달을 말한다. 그래서 “孟冬十月”(맹동시월)이라는 관행적 표현으로 흔히 쓴다. 지금껏 전통으로 내려오는 조상들의 시제를 10월 달에 지내는 것을 볼 때 음기 숙숙한 음력 10월달은 장례식 치르기에 좋은 시기에 속한다. 맑은 하늘에 아직 눈이 내리기 전 숙연한 음력 10월의 기상을 상기해 보라. 결자된 부분에서 맹동이라는 음력 10월을 지칭했을 것으므로, “孟冬十月”이라는 반복적 표현 대신 시간 대명사 기(其)로 처리하여 “기월(其月)”-그달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맹동시월이라는 표현이 있었기에 기월 10일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월10일은 맹동10월 즉 음력 10월 10일을 지칭한다고 해석된다.
망자의 사망시간이 중요하고 장례식 또한 길일을 택일해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장례기일을 중요하게 취급하여 명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개시 날자도 택일을 하고-이런 의식은 진흥왕 순수비에서도 확인된다. 상량식도 택일을 하고 장례식도 택일을 하는 이유는 그것을 미신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기상조건 일기예보의 확률에 따라 예식을 치르려는 합리적인 기후경제학적 요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심리학적 요인도 있겠지만 우선 기상요건을 미리 살펴보는 합리적인 행동에 속한다.
음력 10월 달을 다른 명칭으로 “孟冬”이라 표현하는데, 당시는 농력에 따라 맹동이라는 표현이 익숙하게 쓰였지, 지금처럼 아라비아 숫자 12345678910가 익숙한 달력은 아니었다. 결자부분을 추측해 본다면, 孟冬繁霜 陰寒氣鬱寂肅清 이라는 의미의 문장이 이 부분에 들어 있을 것 같다.
구당서 본기 권5 고종하 개요원년 681년 10월 기사를 보자.
“冬十月 丙寅朔 日有蝕之 乙丑 改永隆二年為 開耀元 曲赦定襄軍及緣征突厥官吏兵募等 丙寅 斬阿史那伏念及溫傅等五十四人於都市 丁亥 新羅王金法敏薨 仍以其子政襲位”.
개요원년 음력 10월달 정해일은 농력 681년 10월 22일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7일이 된다. 개요원년 동10월 정해일에 신라왕 김법민이 서거했고 그의 아들 정이 왕위를 이었다고 적혀있다. 681년 음력 10월 10일은 양력으로 11월 25일 乙亥을해일이 된다. 따라서 문무왕릉 비문의 10월 10일에 장례식을 치렀다는 구절은 구당서의 문무왕 서거일자와 거의 비슷한 날짜가 된다.
그날 눈발이 날렸다는 해석 또한 첫눈이 내리는 계절이 11월말경이 되므로 당시의 기상 기후와도 거의 일치된다. 삼국사기에서 기록한대로의 “屬纊之後十日”(속광지후십일) 즉 7월 1일 운명했으므로 7월 10일이 문무왕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 아니라 겨울철 음력 10월 10일이라고 합리적인 추측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문무왕릉 비문의 “其月十日”(기월10일)은 681년 음력 10월 10일로 추측한다.
맹동10월 즉 음력 10월 10일에 장례식을 거행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이 날은 하얀 눈발이 흩날렸다고 당일의 날씨 상태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장례식 때 하얀 눈발이 날리는 날이면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진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을 하얀 자작나무가 타듯이 불태우면서 저 세상으로 보낼 때의 마음 속 슬픔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발에 적셔지지 않을까?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의 마지막 길을 어찌 하늘인들 무심할 수 있겠는가?
大
여기의 글자 판독을 일부는 “火”(화)로 판독했는데, 다수는 유희해의 판독과 마찬가지로 “大”로 판독했다. 나는 유희해의 판독을 따르고자 한다. “大”라고 판독하면 아마도 “大王”이란 지시대명사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글자판독을 “火”로 하건 “大”로 하건 여기 이 문맥상의 의미 내용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추측 가능해 진다.
火자 다음의 결자부분을 추측해 본다면 아마도, 火燒之數千束樵 또는 火焚之數千積薪 이런 내용일 것 같다. 火焚之數千積薪 이런 구절로 화장식의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했을 것 같다. ‘수천 다발의 땔나무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불을 태워 화장식을 거행했다’. 이런 화장식의 모습은 2017년 거행된 태국 푸미폰 국왕의 화장 장례식이 어느 정도 전형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유투브로 그 장면을 보면 아마도 문무왕릉 비문의 결자된 부분의 내용을 상상하고 추측하는데 도움이 된다.
5행 요약
燒葬 | 문무왕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장례의식을 화장火葬식으로 거행했다 |
卽以其月十日 | 이날은 맹동시월 즉 음력 10월 10일이었다 |
大 - (火燒之數千束樵) 火焚之數千積薪) | 대(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수천 다발의 땔나무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불을 태워 화장식을 거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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