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天子之尊 赤縣先其司牧
天子之尊 赤縣先其司牧(천자지존적현선기사목)의 구절의 뜻은 ‘국왕은 최고로 존중받는 존엄한 존재이다. 하지만 국가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국민을 관리 통치하라’. 여기서 赤縣적현은 추연이 말한대로 중국을 지칭하는 단어이니 국가를 뜻한다. 司牧사목은 관리, 통치統治 또는 군주君主 또는 양이나 소를 키우는 목장을 관리하는 관원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관리 통치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이 문장은 천자가 최고 지엄한 존재로서 밑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존재일지라도 국왕이 솔선수범하여 백성을 섬기며 관리 통치를 잘 하라는 훈계이다. 군주는 백성의 여론에 따라 그 지위가 변동되는 자리이고 또 무엇보다 국가가 있어야 국왕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군주는 백성을 먼저 섬겨야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백성이 우선이라는 애국애족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써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분연히 의로운 혁명이 일어나는 도교적 정치사상에 합치한다. 이런 측면에서 백두혈통에 집착하는 북한의 일인지배 체제와 천황의 혈연적 혈통에 정통성을 강조하는 야마가 소고우의 복고적 교조주의는 유교적 교리에 닿아 있음이 나타나고 또 그런 정치적 교조주의는 닫힌 사고의 산물로써 이것은 당태종의 도교적 백성 우위의 정치사상과는 배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을 먼저 섬기는 섬김의 통치 이론은 오늘날 현대 자유민주주의 정체에서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선거 캐치 프레이즈 표현으로 유명한 “Putting People First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로 표현되고, 이는 맹자의 ‘民貴 社稷次之 君爲輕’의 표현과 같은 맥락의 사상이다. 국왕은 민중에 의해 옹립 수립되는 개념이고 또 만약 국가가 없다면 민중 자치의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백성의 뜻을 살피고 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병자호란이나 한일병탄의 치욕이 말해주듯, 나라를 잃으면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죄다 남의 나라의 노예로 끌려가 노예노동에 시달리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것임으로 국민에 의한 여론이 형성될 조건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소크라테스의 ‘배부른 돼지’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배부른 돼지가 정치철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는 법이며, 오로지 배고픈 자만이 빵을 찾게 된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유에서 여실히 입증되듯이 인간 행복의 실현은 자유가 먼저라는 전제조건이 부여되어 있다. 당태종의 대화록을 적은 오긍의 “정관정요”와 위징의 상소문에 등장하고 또 그보다 훨씬 앞서 순자荀子의 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배를 엎어 버릴 수도 있다” “君舟也人水也 水能載舟 亦能覆舟”의 말을 상기하라. 따라서 위증이 간언한대로, 국민의 최고 대표자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가져다준 그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항상 그 근원을 두려워하고 근신해야 한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국민의 공복이고 민심이 천심이기에 항상 빚을 지고 있는 존재이다. 당태종 유조문이 말해 주듯이, 국가가 존재하고 난 뒤에 국왕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국왕은 국민의 뜻에 의해 옹립되는 후자적 개념이다. 제 아무리 국왕이 전권을 행사하는 봉건왕조시대라고 해도 국왕의 자리를 자기의 사유물로 생각하는 경우는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하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천명론이 그것이었다. 당태종은 “정관정요”가 전하듯이, 사대부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지지를 받고 그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국정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봉건 왕조 시대의 특출한 제왕적 통치자로 군림했던 당태종은 자신이 가장 바라고 편애하는 4남 이태를 후계자로 삼을려고 했으나 대신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없었다. 당태종은 자신의 의견을 걷어들이고 대신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타협책을 구사했음을 상기하라.
3. 정반합의 통합 발전론
天命之重 綠錯奉其圖書 天子之尊 赤縣先其司牧 而功兼造化. 천명이라 해서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민중들의 여론에 의해서 표출된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 또한 국가와 국민이 존재해야 국왕이 설 지위가 있는 것이므로 이들 삼 요소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맞물러 지탱하는 삼위일체의 다층적 구조 개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功兼造化공겸조화라는 말을 쓴 것이다. 功兼造化공겸조화의 뜻을 살펴 보자. 음양오행설로 잘 알려져 있는 이론적 설명이지만, 造化조화는 무언가 새로움을 가져오는 천지창조 대자연이라는 뜻이다. 노자도덕경 제42장에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구절이 등장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만물은 네가티브와 파지티브의 양 흐름을 서로 끌어내고 잡아 당겨서 새로운 제삼의 결과를 이루어낸다는 뜻이다. 컴퓨터는 영과 일의 두 수로 운영되는데 이는 양과 음의 전류 흐름과 같으니, 그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단지 영과 일이라는 단 두 개의 수로써 운영 작동되듯이, 우주만물은 네거티브와 파지티브 이 두 개의 부호가 서로 합하고 나눠지고 어울려져서 새로운 제삼의 결과를 창조해 낸다. 양과 음의 두 개의 기가 서로 합하고 충돌하고 대립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가면서 새롭게 발전해 나가는 역사를 써나간다고 이해된다. 이렇게 우주만물이나 인간세상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서 새로움을 창조해 낸다. 우리들은 흔히 가장 아름다운 미를 지칭할 때 자연미, 천연미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런 자연미가 造化조화의 뜻이다. 자연의 법칙과 같이 사람들의 공적과 업적은 혼자서는 이루어내기 어렵고, 우주만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러한 서로 의존하여 새로운 공과 업적을 이루어내는 것을 兼功겸공이라고 말한다. 만유인력 법칙 중력장의 법칙이 말해주듯 우주만물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功兼造化공겸조화가 아닌가? 인간 세상의 법칙 또한 그렇지 않은가? 겸공의 개념은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 중에 등장하는 是故臣兼功于君 子兼功于父 妻兼功于夫 陰兼功于陽 地兼功于天 구절로써 잘 알 수 있다. 과거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고, 현재 없이 미래가 어찌 있겠는가? 영어로 현재를 present라고 쓰는데, 이 프레젠트는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 현재는 과거가 주는 선물이 아닌가? 우리가 태어난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그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그리고 보라. 부모없이 태어난 자식이 있을 수 없지 않는가? 한편 만약 자식이 없다면 어찌 부모가 기억될 수 있겠는가? 다리 교각의 토목건축의 이치나 씨줄날줄 베틀짜기나 상하좌우 부부의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음양과 종횡의 상호교차함으로써 새로움이 창조된다. 자연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톨레스가 논거하듯 인간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4. 橋山之樹已陰 業致昇平-조상의 음덕
橋山교산은 사기 오제본기에 나오는 黃帝 崩 葬 橋山의 구절이 보여주듯 현재 협서성 황릉현 黃陵縣 황제 무덤 黃帝 葬處의 별칭이다. 황제릉은 여기뿐만 아니라 하북성 河北省 탁록涿鹿현에도 있다. 이 곳은 황제와 당요 唐堯 즉 요임금의 사당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를 橋山교산이라고도 부른다. 涿鹿탁록은 신라의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부족명으로써 신라비명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辰韓진한 편에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당요 唐堯 즉 요임금은 삼황오제 중 제곡의 작은 아들로써 요임금님의 후계자는 순임금님이다. 제곡은 신라의 먼 시조로도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항우는 순임금님의 후손이라고 말했는데, 당나라는 당요의 후신임을 자처한 것으로 볼 때 당태종 유조문에서 橋山교산은 하북성 탁록현을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교산은 선조의 무덤이고 무덤은 큰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다. 나무는 성경에서 생명의 나무, 지식의 나무, 이브의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윤리의 나무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지식의 가지치기, 자손의 가지치기, 번영의 뿌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가지치기를 낳는 근원인 나무의 뿌리를 찾아 가는 과정을 보라.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Roots”(뿌리)를 텔레비전 드라마로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18세기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 미국 농장으로 강제 이주된 흑인 아프리카-미국인이 자신의 집안 뿌리를 찾아 쓴 족보 연대기이다.
또 나무는 성경에서 표현하듯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쉼터의 기능을 제공한다. 큰 나무에는 나무그림자가 드리어지는데 나무그늘 樹陰수음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가림막을 쳐주고 그래서 사람은 나무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한다. 공자는 은행나무 밑에서, 예수와 석가는 종려나무와 보리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진시황제 또한 大夫松대부송의 전설이 내려온다. 진시황이 태산에 봉선 제례를 행하려 태산을 오르다 도중에 비가 내려 큰 나무 밑으로 피했는데 그 때 비를 피하게 해준 소나무를 大夫松으로 이름 짓고 대부 작위를 수여하였다는 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이런 예가 보여주듯 나무신 樹神은 사람을 보호하고 병을 치유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구름을 몰고 와서 비를 내리게 할 강우의 능력을 가졌다는 믿음이 전한다. 나무는 비비람으로부터 보호막이의 기능을 한다. 보호막이란 결국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昇平승평은 太平盛世태평성세의 뜻이고, 業致업치는 집안을 일으키다는 發家致業발가치업의 뜻이다. 그러므로 橋山之樹已陰 業致昇平이란 구절은 집안을 흥하게 일으키고 가업을 잘 계승한 업적이 조상 선조로부터 음양으로 받은 덕택에 힘입어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5. 黃帝 황제와 商湯 상탕 상나라 시조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해치는 원인은 외부의 침략이 그 하나인데 외적의 침입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원정을 단행할 필요성이 있다. 요임금의 뒤를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순임금은 머나 먼 남방 원정을 단행했고 그 남방 원정길에서 전사했다. 순임금의 장례는 전장터에서 화장식으로 거행했고, 그곳에 무덤을 지었는데 그곳이 蒼梧창오라는 지역이었다.
蒼梧之駕方遠 至於平寇亂 安黎元 灑洪災 攘大患의 유조문 구절은 평화와 번영의 길이라면 먼 남방의 원정길에 순국한 순임금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蒼梧之駕方遠의 구절은 순임금님의 남방원정의 역사를 말해준다. 왜 남방 원정를 단행했다는 말인가?
寇亂구란의 뜻은 외환外患과 내란內亂을 의미하고 또는 외부의 침략을 당했을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의 以恤禮哀寇亂 구절에 대한 정현의 주를 보면 兵作于外為寇 作于內為亂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구가 쳐들어온 우리나라 역사를 보라. 왜구가 자주 출몰한 때는 국내의 정치 상황이 매우 어지럽고 혼란이 극도로 높았던 고려말 조선말 등 시대적으로 세계사적 격변기이었다. 국내의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면 외부의 침략에 쉽게 당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외침과 내란이 일어나는 내외적 요인의 원인 관계는 서로 맞물려 있기에 시간이 흐른 뒤에도 쉽게 찾아내 정형화하기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어떤 상황이든 내부적 안정이 무척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내우외환의 사정을 타개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외국 원정을 단행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남방원정의 이유가 외국의 침략을 평정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요즈음에도 대홍수와 대화재가 일어나는 비상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해서 큰 재앙을 제압하는 경우가 있는데, 灑洪災 攘大患의 구절은 무력의 힘을 빌어서도 나라의 큰 재앙의 불길을 끄고, 큰 환란을 물리쳐 냈다는 무력 동원의 대의를 말해준다. 이러한 전쟁의 기록은 황제의 오십삼번, 상나라의 시조 성탕왕의 이십칠번이라는 경이적인 전쟁 역사 기록에 감히 견주될 수 있을 것이라고 회고하는데, 당태종이 북방에서 건설된 수나라를 엎어 버리고 거대한 중국을 새롭게 건설해 낼 때 수 많은 전쟁을 치러냈던 역사를 상기하라. 당시 오호십육국 시대의 어지러운 역사를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황제의 건국 역사와 동이족이 세운 상나라의 시조 성탕왕의 건국 역사는 신화와 전설로 내려오기에 그 전쟁 역사의 정확성을 사료로 따지기에는 어려울지 모른다. 따라서 당태종 유조문에서 황제의 오십삼 전, 상탕왕의 이십칠 전의 기록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오천년 전, 삼천년 전의 역사에 해당하므로 구체적인 전사 기록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상징적 의미의 숫자에 보다 가까울 것 같다.
商湯(상탕)은 成湯(성탕)으로도 불리우는데 동이족의 상나라를 수립한 상나라 (BC 1600-BC 1046) 시조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가 쓰여진 이후 인류 역사를 볼 때,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전쟁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6. 辛李衛霍之將 신이위곽 명장
辛李衛霍신이위곽은 모두 한나라 때 북서쪽의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명성을 쌓은 신경기, 이광, 위청, 곽거병 같은 이름 높은 명장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전기는 모두 한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서진西晉 반악의 서정부西征賦에서 이 구절이 등장한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저자의 책 “투후는 누구인가”을 참고하라.
辛慶忌신경기(?-BC 12)는 북서쪽의 흉노족과 강족을 정벌하여 이름높은 장군이다.
李廣이광(?-?)은 사마천이 위대한 사기의 저작을 남기게 된 배경 중 하나가 한무제 앞에서 이릉(?-BC 74)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한 처절함이었는데 이광은 이릉의 할아버지이다. 이광은 흉노와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칠십여 차례나 치러낸 백전노장이었지만 끝내 작위를 수여 받지 못한 불행을 겪었고, 모함을 받고 재판을 받게 되자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丈夫不能再辱 ‘사람은 두 번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을 택했다. 史聖 사마천은 이광의 일생에 대해 최고의 군인으로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장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勇于當敵 仁愛士卒 號令不煩 師徒鄕之(용우당적 인해사졸 호령불번 사도향지) 즉 이장군은 ‘적을 만나 싸울 때는 용감했고, 부하 군사들에겐 인자하고 자애롭게 대했고, 명령이나 지시는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여, 군인병사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자 했다’. 위계질서와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 세계에서 아랫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말만큼 최고의 인물 평가가 더 있겠는가? 그런데 그처럼 뛰어났던 백전노장 이광은 전쟁에서 왠만한 공을 세워도 작위를 받았던 당시 봉건시대에서 끝내 분봉작위를 받지 못했다. 왜? 후세사람들은 시운이 불운해서라고 명운교차의 말로써 설명한다.
衛青위청(?-BC 106) BC 127년과 119년에 흉노를 대파했던 명장으로 군 최고위직인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올랐고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위황후의 동생으로 실권자였다.
霍去病곽거병(BC 140-BC 117) 위청과 같은 동향출신으로 흉노를 대파한 명장으로 표기장군에 이르렀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BC 119년 흉노 군을 대파하였고 이 때 한무제의 후계자 싸움에 관련되게 되는 김일제와 망하라등의 흉노족 고위층을 포로로 잡아왔다. 곽거병은 젊은 나이에 전사하였고, 한무제 사후 최고실권자로 군림한 곽광의 이복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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